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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지났을까. 조디의 방에서 나와 복도를 지나가는 로하나 앞에 황제 부부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로하나.”
바르디가 부르는 소리를 무시하며 로하나는 발걸음을 빨리했다. 이제 저런 소리에 일일이 반응하지 않을 셈이었다.
“로하나.”
턱, 하니 손목이 잡혔다. 뒤돌아보자 바르디 황제였다. 그의 얼굴은 못지않게 참담해 보였다.
“죄송합니다, 지금은…….”
“알았어.”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잔뜩 날카로워져 있던 신경에 차분한 목소리는 차가운 물처럼 사람을 조금 진정시켰다.
“알았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뭐가 되었든 네 뜻대로 되게 내가 할 테니까.”
로하나는 천천히 잡혔던 손목을 떨구었다. 그에 맞춰서 커다란 손이 그녀를 놓았다. 시녀장이 다가와 머리를 조아렸다. 의원의 얼굴이 함께 보였다.
“마님, 이쪽으로.”
올려다본 바르디는 고개를 끄덕이며 어서 가라고 재촉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사람을 붙였다는 게 무슨 말일까. 케이든의 내실로 끌려오다시피 한 로하나는 응접실에 앉은 채 그를 기다렸다.
옷이라도 갈아입으라는 시녀들의 말에도 로하나는 그대로 앉아 있었다.
“공작께선 어디 계신가.”
“마님.”
도대체가 다들 질문에 호칭으로 대답하는 것은 황궁이나 여기나 마찬가지였다. 로하나는 진정하려 숨을 들이켰다.
케이든은 분명 사람을 붙였다 했다. 히스와 그의 수하가 그것에 실패한 것에 기가 찬 모습이었고.
케이든은 조디를 이미 수상하게 여기고 있었다는 건가. 어떻게? 그리고 왜 나에게 말을 하지 않은 거지?
모든 정보는 솔직하게 주고받기로 충분히 이야기했다고 생각했는데.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아주 늦은 밤이 되어서야 문이 열렸다.
“케이든.”
눈 바로 위로 떨어지는 은발 아래 흑안에는 차가운 빛이 역력했다.
“그 애를 어떻게 해 달라는 순진한 소릴 하려고 기다렸다면 시간 낭비했습니다.”
그 엄청나던 불을 꺼뜨리던 그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로하나는 잠시 멈칫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뒤쫓아 갔다.
“미수였을 뿐이라는 소리 할 거 압니다. 사정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도 알고.”
케이든은 능숙하게 말하며 리큐어 테이블로 성큼 걸었다. 크리스털 잔에 가득 찬 위스키는 한 모금에 절반 이상이 사라졌다.
“원칙대로 할 테니 물러가십시오.”
“그런 것 아닙니다.”
로하나가 고집스럽게 대꾸했다.
“분명 빈틈이 있었어요. 제가 어떻게든 설득해서 물으면 분명…….”
“로하나.”
순간, 성큼성큼 다가온 케이든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몸이 닿을 듯 가까워지니 열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당신 정말 무슨 생각입니까.”
케이든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가까이 다가온 그의 얼굴에 분노와 황망함이 뒤섞여 있었다.
“정말 죽고 싶기라도 한 겁니까.”
“그럴 리가 있겠어요?”
로하나의 미간이 좁아졌다.
“사람 죽어 나가는 것 보고도 어떻게 이따위로 행동해! 당신 죽이겠다고 저렇게들 혈안이 된 걸 빤히 보고도.”
다시 높아진 목소리가 버럭 높은 천장을 타고 울렸다.
“어떻게 살았으면 이렇게 용감합니까. 순진해 빠진 것도 정도가 있어.”
비꼬는 목소리도 처음 듣는 것이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게 당신이 나의 무능을 원망하는 방식이라면 잘 알았으니 이제 그만하지.”
낮아진 목소리가 중얼거렸다. 로하나는 기가 찬 듯 헛숨을 내쉬었다.
“무능을 원망하다니.”
둘의 눈이 얽혔다.
“누가 누굴 무능으로 원망한다는 건가요.”
케이든의 눈이 가늘어졌다.
“제 목숨이었고, 제 상황이었어요. 조디가 절대로 끝까지 가지 못할 거라는 걸 알아서 한 행동이었고, 설령 내 예상이 빗나갔어도 그건 내 책임이지 당신 탓이 아니에요.”
냉랭하게 굳은 그녀의 얼굴을 보는 케이든의 눈이 가늘어졌다.
“잘나셨군.”
“왜 그렇게까지 감정적으로 대응하는지, 왜 나보다 당신이 더 화를 내고 있는지 알 수가 없어.”
로하나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지금 누구보다 화가 날 사람은 당신이 아니라 나예요.”
조디는 그런 사람이었다. 막상 입술 밖으로 말을 하니 도리어 실감이 나 목소리 끝이 떨렸다.
“내가 아니라 당신이라.”
케이든이 자갈 긁히듯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그런 당사자인 당신이 뭘 할 수 있는데.”
로하나는 조용히 숨을 골랐다. 무능에 대한 분노가 심장을 강하게 옥죄었다.
“뭐라고요?”
사실인가.
그의 말이 사실이야?
“내가 당신을 지키겠다는 게 그렇게 듣기가 불편한가?”
가까워진 몸에서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얼음 같으면서도 닿으면 더웠다. 높고 곧은 콧대 옆으로 그림자가 길게 졌다.
“저런 걸 굳이 다시 고용해서 여기까지 끌고 온 것도 모자라.”
로하나가 어깨를 떨었다.
“옆에서 지켜보라고 한 쉬운 명령 하나 제대로 이행 못 한 부하를 뒀으니.”
뒷걸음질을 쳐도 거리가 좀체 멀어지질 않았다. 길게 늘어진 붉은 드레스 소매가 촛불에 반짝였다.
“나 같은 건 차치하고 알아서 하시겠다는 것 같은데…….”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어진 로하나는 결국 그를 정면으로 올려다봐야 했다.
“어쩌지.”
케이든은 천천히 손을 들더니 흐트러진 긴 머리카락을 조용히 쓸었다.
“나도 이번에는 내 마음대로 해야겠어.”
침묵이 흘렀다. 핀 하나가 떨어져도 온 실내가 울릴 듯 숨 막히는 침묵이었다. 로하나는 천천히 마른 입술을 열었다. 속삭이는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왜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조디를 주시하고 있었으면서.”
케이든의 얼굴에 비소가 스쳤다. 로하나가 오히려 앞으로 걸음을 내딛자 둘 사이는 닿을 듯 가까워졌다.
“나와 정보를 공유하기로 했잖아요.”
그때였다. 하, 하는 깊은 탄식이 케이든의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제야 로하나는 그의 행동이 조금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비뚤어진 입가의 쓴 미소와 결국 자신에게서 눈을 돌려 바깥을 바라보려는 듯 옆으로 돌아가는 턱 끝.
한참을 잊고 살아서 몰랐다.
누가 누군가를 걱정할 때 어떤 모습을 하는지.
“관두죠.”
순간 로하나가 훅하고 멀어지는 케이든의 팔을 저도 모르게 덥석 잡아 쥐었다. 작은 힘이었지만 케이든은 그에 잡혀 멈추어 섰다.
미친 듯이 불규칙적으로 뛰던 심장의 고동 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다. 로하나는 고개를 꺾어 케이든을 올려다보았다.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둘의 시선이 옭아매어졌다.
“내 잘못도 아니고.”
케이든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새 조금 길어진 은발이 짙고 깊은 눈매 바로 위에서 흔들렸다.
“그렇지만 조디라면 내가 가장 잘 알아요. 나도 같이…….”
그때였다.
“아니.”
케이든의 중얼거림에 로하나가 다시 고개를 드는 순간, 그의 날카로운 턱이 기울었다. 낮은 신음이 귓가에 이르기도 전에 입술로 숨이 먼저 닿았다.
조금 물러나는 로하나를 이번엔 놓치지 않겠다는 듯 케이든이 깊이 고개를 숙였다.
<당신이 무슨 생각인지 알고 싶어.>
화재가 났던 파인체이서의 밤에 숨을 멈추고 계속했던 생각이 찰나에 스치고 지나갔다.
머리가 멈추고 숨결만이 남았다. 간절하고도 거친 숨소리가 입술을 타고 흘렀다.
커다란 손이 목덜미와 귀를 감싸 그러안자 로하나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그의 가슴으로 손을 올렸다. 단단한 근육 밑으로 빠르게 뛰는 심장이 어지러웠다.
집요하고 진득하게 옭아 오는 입술과 혀끝에 점차 숨이 넘어가듯 차올랐다.
조금 떨어진 사이 낮은 신음이 흐르고 물러나는 몸짓에 케이든이 다시 집요하게 붙어 왔다.
로하나가 가쁜 숨을 내쉬며 가슴에 얹은 손을 조금 밀어내서야 케이든은 멈추었다. 겨우 떨어진 둘은 이마를 맞댄 채 거친 숨을 내쉬었다.
으르렁거릴 만큼 낮은 목소리가 다시 한번 거친 숨에 섞여 나왔다.
“그냥.”
왜인지 모르게 눈물이 날 것 같아 로하나는 차라리 눈을 더 깊게 감았다. 눈을 감는 눈꺼풀 위로 차갑고 긴 손가락이 섬세하게 지나갔다.
“그냥 있어.”
케이든의 낮디낮은 중저음이 숨소리에 섞여 귓가에 스몄다.
“미안하지만, 그냥 있어. 내가 다 죽일 거니까.”
가빠 오는 숨결 속에서 어지러이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결국 로하나는 입맞춤을 끊고 방으로 들어갔다.
*
새파란 새벽빛이 떠올랐다. 로하나는 조심히 제 침실에서 걸어 나왔다. 케이든의 침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아직 밭은기침이 나오는 것을 참으며 가운을 걸쳤다.
그녀가 내실에서 나오자 복도에 서 있는 히스가 보였다. 옅은 눈동자가 로하나를 보더니 조금 커졌다.
귀부인이 단장도 채 하지 않고 아무렇지도 않게 밖으로 나오는 일은 흔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레이디.”
로하나가 별말 없이 미소를 지으며 올려다보자 히스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어젠 정말 죄송했습니다. 급한 전갈이 오는 바람에 상황 파악을 하느라 잠시. 케이든 옆에 있으니 괜찮으실 거라 생각했어요.”
로하나는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면 내 부탁 좀 들어줘요.”
무슨 부탁인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아 히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정말 잠깐입니다. 그리고 설마 아무것도 안 가지고 계시지요?”
어두운 분위기를 털어 보려는 듯했지만 오히려 어두운 농담이 되어 버린 말이었다.
“네.”
로하나가 양손과 드레스를 털어 보이자 히스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둘은 나란히 말없이 걸었다. 네 개 층을 더 밑으로 내려가자 지하 감옥이 나왔다.
지하 감옥은 생각보다 깨끗했고, 생각보다 어두웠고, 생각보다 추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