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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잠한 눈동자가 그녀를 똑바로 응시했다. 조디의 얼굴에 빠르게 다른 표정이 스쳤다가 꺼졌다. 로하나의 큰 눈이 파르르 떨렸다.
“마님, 그게 무슨……. 그게 정말 무슨 말씀이세요.”
일그러지며 빠르게 굳는 얼굴. 거짓말하는 사람의 전형적인 표정 변화다. 로하나는 마음이 조용히 가라앉았다.
“케이든이든 황제든 제대로 조사하면 정말 안 걸릴 거라고 생각해?”
침묵이 흘렀다.
“다 털어놔.”
둘의 눈동자가 첨예하게 부딪쳤다.
“안 그랬다가는 너만 혼자 죽어.”
그 소리를 들은 조디의 눈동자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뭐라도 사정이 있었을 거 아냐. 얘기해.”
사정이 있었을 거 아냐.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그렇게 긴 세월을.
“뭘?”
불쑥, 익숙한 목소리가 낯선 말을 했다.
“뭘 털어놓아 줘야 하지?”
조디가 천천히 입을 떼더니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로하나는 눈을 크게 떴다.
하, 하고 짧은 한숨을 쉰 조디가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그래요. 아까 의원한테까지 다녀오던데, 눈치챘나 보네.”
처음 보는 목소리, 처음 보는 표정.
“내가 한 거 맞아요.”
로하나는 천천히 낯선 조디의 얼굴을 바라봤다.
“카르크 출신이야, 조디? R. D. 소속이라서 그랬던 거야?”
“아니.”
의외의 대답에 로하나가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라면 왜.”
로하나가 되물었다.
“왜?”
“개인적 원한.”
조디가 조용히 앞치마를 벗으며 말했다.
“원한?”
로하나의 떨리는 목소리에 조디가 낮게 코웃음을 쳤다.
“정말 꿈에도 모르나 보네.”
마주치는 눈동자에 경멸과 증오가 비쳤다.
“내가 누군지.”
혼란스러워하는 로하나의 얼굴을 보며 조디가 머리를 풀었다. 로하나와 똑같이 길게 늘어뜨린 검은 머리, 희고 투명해 잘못하면 창백해지는 피부, 붉은 입술.
<저에게도 우리 공녀님 같은 딸이 있어요. 예쁜 머리카락이 정말 닮았어.>
로하나는 숨을 삼켰다.
<따님이 보고 싶어서 어떻게 해요.>
<우리 공녀님 어른스럽기도 해라. 괜찮아요, 성 밖에서 잘 지내고 있어요.>
보름달이 떴던 그날 밤, 돌아오지 못했던. 유모가 떠올랐다.
이제 그녀를 더 닮은 딸이 로하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로하나는 사진처럼 그날을 기억했다. 열두 살이 되던 여름날이었다.
<공녀님, 꼭 이맘때면 이렇게 몸살이 나시네요.>
아름다운 늦여름 날이 무색하게 로하나는 땀을 흠뻑 흘리며 몸살을 앓았다. 시녀장은 땀을 닦을 손수건을 건네주며 안쓰럽게 어린 여자아이를 바라봤다.
그녀가 왜 이맘때면 몸살을 앓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듯했다.
<그러게요.>
<이번에 새로 들어온 견습 시녀, 조디라고 합니다.>
그날, 그 아이를 처음 만났다.
어쩐지 낯이 익었는데, 저를 닮아서 그런 줄로만 알았다. 검은 머리카락에 흰 피부, 유난히 입술이 붉어 부은 듯 보이는 것까지.
유모와 닮았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응, 그래.>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는 로하나를 보며 그녀의 나이 또래나 되었을 법한 조디는 싹싹하게 말을 붙였다.
<몸이 좀 안 좋으신가 봐요.>
<좀 그렇네.>
<그럴 때는…… 약간 산책을 하시는 게 도움이 될 수도 있어요.>
<뭐?>
다른 시녀들이 당황하며 로하나와 조디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로하나는 소파에 앉은 채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나가시죠!>
활짝 웃는 얼굴이 밝았다. 밝았다고 생각했다.
“이제 기억이 나나 보네.”
일그러진 조디의 얼굴이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면 나한테 이유는 충분하지?”
“왜…… 말 안 했어?”
로하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조디는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말해서 나도 죽여 달라고 빌었어야 한다는 거야?”
절로 일그러진 얼굴과 눈에는 흐르지 않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내가 무슨 소리 하는지 알잖아.”
로하나도 한 음 한 음 눌러서 말했다.
“모르겠는데. 하노버 공작가는 사람이 아니라서 그런가.”
조디가 떨리는 입술 사이로 속삭였다.
“항상 뭐라는지 모르겠더라고.”
붉게 충혈된 보랏빛 눈동자에 눈물이 고였다. 조디가 악에 받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감히 내 앞에서 울기만 해.”
“조디.”
로하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눈물이 턱을 타고 흘렀다.
“얘기해. 연루된 사람들, 아는 정보 모두.”
로하나의 눈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그래야 내가 널 살려 줄 수 있어.”
조디는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아직도 자신만만하네. 건방져.”
“그러는 너야말로.”
로하나의 눈이 조디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날 죽일 생각이었던 게 맞긴 해?”
조디의 미간이 좁혀졌다. 로하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날 죽이고 싶었으면 지금 죽여 봐.”
“뭐?”
“여기 이 칼로 죽여 봐.”
로하나는 저녁 식탁에서 가져온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얇고 예리한 날이 달빛에 빛났다.
“다치게라도 시도해 보든지. 얼굴이나 눈이라도.”
로하나의 도발에 조디의 얼굴이 굳었다.
“말이 번지르르한 건 너야, 조디.”
로하나가 침착하게 말했다.
“샹들리에랑 파인체이서는 연루된 다른 사람이 있었을 거야. 그러니 그 정도라도 한 거지.”
로하나가 조디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너는 망설이고 있잖아.”
“닥쳐.”
“정말로 원수를 갚겠다고 날 없앨 거였으면 기회는 차고도 넘쳤어.”
조디의 핏대 선 눈동자가 흔들렸다.
“지금도 그 순간 중 하나야. 죽여 봐.”
조디의 손이 나이프를 향했다. 떨리는 손이 나이프를 쥐자, 손과 나이프가 같이 테이블에 부딪치며 달그락거렸다.
“샹들리에도 떨어뜨린 너니…… 이 정도 무기면 나 같은 거야 얼마든지 없앨 수 있겠지.”
나이프를 잡은 손에 흰빛이 일었다. 그때 히스가 화살을 쏠 때도 이런 빛이 일었었다. 로하나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해 봐.”
조디의 눈에 눈물이 가득했다. 떨리는 손이 나이프를 더욱 세게 감아쥐었다.
쾅!
갑작스런 굉음에 두 여자 모두가 순간 중심을 잃었다.
잠갔던 문이 순식간에 박살이 나고 먼지가 일었다. 찰나의 순간 조디의 몸이 바닥으로 내리꽂아졌다.
케이든이었다.
*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케이든!”
케이든이 조디의 어깨와 목을 잡아 쥐고 있었다. 꼼짝도 못 하는 조디의 얼굴이 두려움으로 일그러졌다.
“케이든! 그만!”
케이든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반응 없이 그대로 조디를 일으켜 세웠다. 작은 몸이 너무 쉽게 끌려 일어났다.
이러다 곧 죽이겠다, 싶었다.
“그만하라니까.”
로하나가 케이든의 팔을 거칠게 붙잡아 끌어내리니 그제야 적의로 가득했던 눈이 로하나를 내려다보았다.
“당신은 지금 뭐 하자는 거지?”
케이든의 목소리가 서늘했다.
“적에게 칼을 쥐게 하고……. 마력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도 정도가 심하네.”
낮디낮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으르렁거렸다.
케이든이 조디의 손목을 쥐어 잡자 디너용 나이프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심지어 당신이 가져온 모양인데.”
조디보다 로하나에게 더 화가 난 것 같은 목소리였다.
“죽고 싶어서 작정했어?”
벼락같이 고함지르는 소리가 작은 방을 치고 울렸다. 잠시 얼어붙었던 로하나가 겨우 입을 뗐다.
“그런 것 아니에요.”
“뭐?”
“내가 알아서 하고 있었어요.”
보랏빛 눈동자가 고집스럽게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케이든은 어이가 없는 듯 피식 웃었다. 차분한 목소리가 냉정하게 흘러나왔다.
“적이 칼을 쥐고 있는데 ‘알아서 하고 있었다.’라는 헛소리가 나옵니까.”
당장이라도 조디의 목을 부러뜨릴 듯 그의 힘이 가해지고 있는지 조디가 괴로운 숨소리를 냈다.
로하나의 미간이 깊게 구겨졌다.
“됐으니까 일단 그만하세요.”
“왜 그래야 하지, 무려 현행범인데.”
조디는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여기에서 저 애가 뭘 어쩌겠습니까.”
로하나의 다급한 목소리에도 케이든은 언제 소리를 질렀냐는 듯 냉정하기만 했다.
“케이든!”
결국 로하나가 소리를 지르는 순간, 케이든은 거칠게 그녀를 던지듯 내려놓았다. 바닥에 떨어진 조디가 구석에 내팽개쳐졌다. 그때 다급하게 달려온 목소리에 비명 소리가 이어져 들렸다.
오렐리아와 황제인 게 분명했다. 로하나는 둘을 잠시 쳐다보았다.
그리고 이어서 히스가 뒤에서 나타났다. 그때였다. 순식간에 벼락같이 성마른 소리가 실내에 울렸다.
“넌 어디에서 뭘 한 거야.”
아까보다 더 섬뜩한 목소리가 히스를 향했다.
“송구합니다.”
히스가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의 연회색 눈동자는 앞의 광경에 놀라기보단 참담한 빛을 띠고 있었다.
“붙였다는 사람은 어디 갔길래 둘이서 이러고 있었던 거야? 넌 어디 있었어?”
“수도에서 급한 보고가 왔다고 해서 잠시……. 정말 잠시였습니다. 붙인 이는 두 분이 만나는 것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히스가 참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옆에선 다른 군인이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저로서도 이런 실수는 당황스러운지 히스답지 않게 여유를 잃은 얼굴이었다.
이번에 되물은 것은 로하나였다.
“사람을 붙여요? 조디한테?”
케이든은 더 이상 대화하기 불편했는지 냉정한 목소리로 군인들에게 지시했다.
“포박하고 연행해.”
뒤이어 들어온 사병들이 조디를 거칠게 잡아끌었다.
“케이든…….”
“히스, 너도 따라와.”
로하나가 말을 걸기도 전에 케이든은 눈길 한번을 주지 않고 군인들과 함께 재빠르게 자리에서 벗어났다.
로하나는 잠시 망연하게 그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