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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디의 어두운 눈자위가 무표정하게 오렐리아를 응시했다. 피식 웃으며 오렐리아가 소파에 폴싹 가볍게 앉았다. 등받이에 걸친 가는 팔이 반들반들했다.
“샹들리에 때야 네가 서툴러서 그렇다 쳐도…….”
오렐리아의 황금빛 눈이 반짝였다.
“파인체이서 건은 뭐야?”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자객들이 실패하게 생겼길래…….”
“그럼 더 확실하게 해결했어야지.”
고양이를 닮은 눈이 번뜩였다.
“어설프게 불을 내?”
조디가 입술을 깨물었다. 팔짱을 낀 팔에 단단하게 힘이 들어갔다.
“그 짓 때문에 일이 더 꼬인 거 알긴 하니? 공작님이 어떤 능력을 가진 줄도 모르고?”
“죄송합니다, 폐하. 저는…….”
“너는?”
날카로운 목소리가 여유 있게 끼어들었다.
“무섭기라도 하다는 거야? 남은 동생들은 걱정 안 되나 봐.”
오렐리아의 입술이 비틀리며 올라갔다.
“그 많은 빚을 어찌 갚고 살려고.”
속삭이는 목소리에 경멸이 가득했다. 조디의 꼭 쥔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그런데…… 이건 그냥 궁금해서 묻는 건데 말이야. R. D.는 왜 그렇게 로하나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야?”
“그러는 황후 폐하께선 왜 그러시는 거죠?”
“뭐?”
하핫, 하고 오렐리아가 짧게 웃었다.
“얘 봐라. 너 지금 나한테 뭐라고 하는 거야? 넌 이유가 있고 난 없으니 네가 나보다 좀 나은 거 같니?”
조디의 눈이 흔들렸다.
“그렇게 떳떳하면 지금이라도 로하나한테 가서 빌어 봐. 나쁜 R. D.가 협박해서 어쩔 수가 없었다고 말야.”
오렐리아는 겹겹이 러플이 화려한 드레스를 들어 올리며 다리를 꼬았다.
“우리 모두가 원했던 건 아주, 너무나 쉬운 단 하나였는데.”
그녀의 눈이 번뜩였다.
“그걸 계속 이렇게 망치네?”
“로하나는 아린족입니다. 약까지 먹였는데 그렇게 순식간에 일어나서 탈출하는 건 불가능했어요.”
“근데 탈출했잖아?”
오렐리아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심지어 아주 멀쩡하게 걸어 다니잖아?”
벌떡 일어난 오렐리아가 또각또각 걸어 나가 조디의 머리카락을 쓸었다.
“두 번의 실수라니.”
오렐리아가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사실은 살짝 실패하고 싶기라도 했던 거야? 결국엔 주인마님을 정말 죽이진 못하겠든?”
오렐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궁금한 얼굴을 했다. 조디가 아랫입술을 더 강하게 깨물었다.
“어머니가 아셨다면 실망이 정말 크셨겠어. 어떻게 그럴 수가.”
조디의 눈에 당장 폭발할 듯 핏대가 섰다. 부들부들 떨리는 턱을 꽉 깨문 그녀는 간신히 버티고 서 있는 것 같았다.
“잘 붙어 있어.”
오렐리아가 냉정하게 속삭였다.
“하다못해 R. D.에게 위치라도 보고해 줘야지, 저번처럼.”
오렐리아가 툭 치면서 지나가자 뼈밖에 남지 않은 듯 마른 조디의 몸이 휘청했다. 눈에서 후드득 눈물이 떨어졌다.
*
늦어진 저녁.
어둑해진 밤하늘에는 겨울의 별자리가 수놓아져 있었다.
층고가 높은 대연회장 다이닝 룸에는 수십 명은 앉을 수 있는 거대한 회갈색 대리석 테이블이 위엄을 보여 주고 있었다.
딱 네 명이 앉아 있을 뿐이었지만.
“이렇게 모두를 물리고 넷이 식사를 하니 정말 좋네.”
굳이 예를 갖춰서 화려한 환영식을 하라는 명령에 노프탈이 그 짧은 시간에 준비를 하느라 난리를 쳤는데 막상 황제는 사람들 인사를 받기 싫다고 변덕을 부렸다.
로하나는 식사 내내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상을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혹시 몸이 아파 그럽니까.”
아침에도 그렇고 아까도 그렇고 반복해서 기침을 하던 것이 생각나 케이든이 속삭이며 물었을 때에도 로하나는 말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늘 짓던 미소조차 없는 얼굴을 보자 케이든은 처음 겪어 보는 불안함을 느꼈다.
“딸기와 체리를 곁들인 머렝 갈레트입니다.”
긴 식사가 어찌어찌 지나가고, 드디어 상큼한 붉은색의 디저트가 테이블에 올랐다. 그때였다, 바르디가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는 말을 한 것이.
“아, 아까 로하나한테 들었는데.”
바르디가 입을 열었다. 수려한 케이든의 태연한 얼굴에 살짝 금이 갔다.
“파인체이서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 말이야.”
옆을 돌아보자 로하나는 디저트는 건드리지도 않은 채 와인 잔을 들고 있었다.
바르디의 말에도 관심이 없는 듯 잠시 황제를 바라보던 로하나는 케이든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것인지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네.”
으득 이를 물며 케이든이 대답했다.
“무능에도 정도가 있지, 어떻게 감히 바로 로하나까지 위험에 빠뜨릴 수가 있지?”
짐짓 침착하게 말하려 애를 썼으나 바르디의 목소리는 노기와 흥분이 묘하게 뒤섞인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파란 눈동자가 케이든을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심지어 여태 주동자를 못 찾았다고.”
“수사 중입니다.”
케이든이 서늘하게 대답했다.
“아직도.”
둘의 시선이 다시 맞부딪쳤다.
“어디를 봐서 그 대단한 동부의 영주라는 건지 모르겠네.”
케이든의 한쪽 입꼬리가 피식 올라갔다.
“사건은 내가 조사할게.”
케이든의 표정을 본 바르디가 더더욱 거만하게 몸을 부풀리며 말했다. 반짝이는 은발 밑으로 날카로운 눈매가 적대감으로 반짝였다.
“폐하가 무슨 수로 뭘 조사하신다는 겁니까.”
순간 정적이 흘렀다. 그답지 않은 대답이었다.
“뭐?”
바르디는 자기도 모르게 황망하게 되물었다. 황제의 말에 토를 달다니, 오렐리아조차 케이든의 의외의 모습에 놀란 눈을 했다.
“카르크족과 마력이라 하는 게 어떤 건지는 압니까. 아, 원래는 마법이라고도 불렀었는데…… 말이 바뀌었죠. 그게 언제였더라.”
케이든이 여유 있게 와인 잔을 흔들며 말했다.
“아르드골드 제국 때부터였던가요.”
바르디는 그럼 그렇지, 하는 얼굴로 제 사촌을 바라보았다. 네가 언제 이빨을 드러내나 했다, 하는 속 시원함과 함께 약간의 본능적 두려움이 그를 훑고 지나갔다.
“저와 저의 부하, 그리고 무엇보다 제 아내에게 위해를 가하려 했거나 가한 자들은.”
케이든이 눈을 가늘게 뜨며 몸을 바로 세웠다.
“악명대로 유명한 저에게 죽여 달라 빌게 될 테니 걱정 마십시오.”
쨍그랑.
별안간 유리 깨지는 소리가 울렸다.
모두가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로하나가 들고 있던 와인 잔을 대리석 바닥에 떨어뜨리며 잔을 산산조각 냈다.
“로하나?”
케이든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서슬 퍼렇던 바르디도 순식간에 걱정하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죄송합니다. 오늘 몸이 좀 안 좋아서…….”
창백하고 냉랭한 얼굴이 그런 그녀의 말을 뒷받침하고 있기는 했다.
“실례지만,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뭐?”
벌떡 일어나 자리를 뜨는 로하나를 보며 바르디조차도 별다른 반응을 하지 못했다.
케이든은 로하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티 내려 하지 않아도 발걸음이 급했다.
어딘가를 가는 모습이다.
쫓아가려는 찰나, 노래하는 듯한 목소리가 그를 붙잡았다.
“델클리프 공.”
오렐리아의 눈동자가 보석처럼 반짝였다.
어차피 문 앞에 히스가 기다리고 있으니 그가 로하나를 쫓으리라 생각하고 케이든은 다시 비스듬히 제 의자에 앉았다.
“네.”
“그리고 황제 폐하.”
오렐리아가 몸을 한껏 기울이며 말했다.
“두 분께서 너무 무시무시하게 말씀을 하시니 공작 부인께서 아무래도 힘드셨나 봅니다.”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바르디는 너무 잘 알았지만, 케이든이 오렐리아의 말에 자리에 앉는 것을 보니 헤어날 수 없는 만족감이 들었다.
로하나를 걱정하느라 그러고 보니 이 둘이 어떤 사이였는지, 이 둘의 재회가 어떨지 미처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럴 리가요.”
“설마 여기에 손님으로 온 황제와 황후를 둘만 내버려 두고 자리를 비우실 생각은 아니시겠지요?”
오렐리아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축하연도 지금 하려는 것 같은데…….”
마침 문 앞에 웅성거리고 서 있던 연주단을 오렐리아가 쳐다보았다.
히스가 있으니 괜찮을 것이다.
케이든은 비스듬하게 기울여 앉은 채 고개를 까닥했다. 오렐리아의 만족스러운 미소가 그를 향했다. 축하연은 현란한 현악으로 이루어졌다.
바르디에게 굳이 말을 걸어 이런저런 말을 속닥대는 오렐리아를 보던 케이든이 무심코 로하나가 남기고 간 빈자리를 내려 봤을 때였다. 어처구니없는 위화감이 눈에 띄었다.
설마.
탄식이 터져 나왔다.
*
시녀가 머무르는 작은 방 앞에 선 로하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똑똑.
얼마 지나지 않아 노크 소리에 맞춰 문이 열렸다.
“마님, 아직 저녁 만찬이 한창이실 텐데, 여기까지 어쩐 일이세요?”
반가운 얼굴을 한 조디가 눈을 크게 떴다.
로하나는 조용히 등 뒤로 문을 닫았다. 조디의 방이었다. 작고 깨끗하고 아무것도 없는.
로하나는 가만히 기억을 되짚었다.
샹들리에가 떨어졌을 때.
그날도 조디는 파티에 참석하지 못했었다. 아버지 드레고리가 그녀를 다치게 했기 때문이었다.
파인체이서, 노프탈로 출발하던 날 아침도 멀쩡히 있던 그녀가 사라졌다가 뜬금없이 과자 바구니를 가지고 뒤늦게 나타났었다.
그러고 보면 그때가 막 행선지가 밝혀진 직후였었어.
그리고 마지막으로 화재가 났던 날 밤에도 그녀는 없었다. 파인체이서의 시녀들만이 그들의 내실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어.
왜 약을 먹어도 되지 않을 정도로 괜찮았던 거야?
조디는 아무 말이 없는 로하나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했다. 정말 여느 때와 다름이 없었다.
침묵이 흘렀다.
“조디.”
의외로 목소리는 침착하게 나왔다.
“네, 마님.”
조디가 천천히 대답했다. 무슨 일인지 궁금하다는 듯 입술이 뾰족 나왔다.
“내가 지금부터 질문을 할 거야.”
로하나는 찬찬히 생각했다. 설령 조디가 연루되어 있다고 해도, 그녀를 통해 핵심부로 가야 했다.
암살 괴한까지 나타난 일을 그녀 혼자 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조디가 R. D. 소속이라면 그 심장부까지 갈 수 있는 단서를 잡아야 했다.
그런데, 정말로? 진짜?
빠르게 돌아가는 머리와 달리 그녀의 가슴은 아직도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정말이야?
냉정한 머리의 속도를 따라잡으며 로하나는 조디와 작은 커피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았다.
“내가 하는 말에 똑바로 솔직하게 대답해.”
로하나의 보랏빛 눈동자가 냉정하게 조디를 응시했다.
“마님, 왜 그러세요. 만찬에서 무슨 일 있으셨어요?”
조디가 걱정 가득한 얼굴을 했다.
“샹들리에부터 파인체이서까지.”
로하나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네가 한 거라는 거 알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