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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일 흑막과의 계약결혼-42화 (4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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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든은 집무실에서 생각에 잠겼다. 이즈가 가져온 보고서를 보며 앞에 앉은 히스도 한숨을 쉬었다.

성 바로 앞에 황궁 군이 진을 치고 있다는 것도, 제 침실 코앞에서 바르디가 잠든다는 것도 평소였다면 신경 쓰여서 미쳐 버릴 노릇이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황제고, 황후고, 문제의 하얀 새고 간에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로하나.

무엇이 되었든 관련자는 모두 없앨 생각이었다. 그게 아린이든 카르크든 R. D.든 뭐든.

‘이 사실’을 알기 전까진.

케이든은 화재 암살 사건의 자객 중 한 명의 신원을 밝힌 보고서를 탁하고 내려놓았다.

“하노버 공작가 사용인이라니.”

히스가 혀를 찼다.

“딸을 인질로 잡히느니 차라리 죽이겠다는 거야?”

“카르크족 혐오자 드레고리가 R. D.를 사용해 일을 처리하지는 않을 거다.”

케이든의 말에 히스가 낮게 신음을 냈다.

“그보다는 R. D.가 하노버 공작가에 잠입해 있었다고 보는 게 더 자연스러워.”

만약 샹들리에 사건이 오렐리아가 카르크족이라는 사실을 아는 R. D.가 그녀에게 날리는 경고성 복수였고, 그것에 ‘우연히’ 로하나가 말려든 것이라 생각하면 어느 정도 앞뒤가 맞아떨어진다.

그때는 R. D.가 굳이 로하나를 노릴 필요는 없었으니까.

무엇보다 그래서 더더욱 그가 황궁으로 급하게 가게 되었던 이유와도 맞아떨어진다.

‘그 예언’ 때문이었으니까.

그러나 암살 능력도 있는 자였다면…… 굳이 그때 로하나를 다치게 하는 사태를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아린족의 귀한 공녀가 죽었을 터인데…… R. D.가 그런 어설픈 일을 한다고?

역시 뭔가 석연치가 않았다.

“문제는 그날도 이 자식이 공작가에 있었는지는 확실치가 않아. 번거롭게 샹들리에를 떨어뜨린다는 것도 어째 앞뒤가 맞지 않고…….”

히스도 중얼거리며 말했다.

“샹들리에는 다른 치가 했다고 봐야 맞겠어.”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가 한숨과 함께 흩어졌다. 잠깐의 침묵 끝에 히스가 말했다.

“그 일이 벌어질 줄 알았어?”

케이든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지만 히스라면 조금 눈치챌 정도의 동요가 일었다.

벌써 옛날 같은 가을날, 오렐리아가 바르디와 떠나던 날 케이든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황궁으로 간다고 했었다. R. D.의 수장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 기분 나쁜 예언자에게 어떤 말을 들었냐는 히스의 질문에 케이든은 이렇게 대답했었다.

<황궁으로 가지.>

케이든은 분명 다른 것을 숨기고 있었다.

“카르크족이 쓸데없는 일을 하는 걸 막으러 간 것뿐이야.”

케이든이 대답했다. 여전히 R.D.의 수장이 정확히 무슨 짓을 할 거라고 했다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함구한 채.

히스는 그런 케이든을 조금 오래 쳐다보았다.

“그렇게 대놓고 마력까지 써 가며 멍청한 짓을 할 거라고 생각하진 못했지만.”

케이든의 거친 중얼거림에 히스가 쯧, 하고 혀를 차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런 일을 일일이 다 막을 순 없다고.”

히스의 첨언에도 케이든은 말없이 서류만 들여다볼 뿐이었다.

히스는 가만히 그런 공작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는 분명 황궁에 도착해서 ‘로하나’를 찾았었다. ‘오렐리아’가 아니라.

나중에 물었을 때 그는 오렐리아가 있을 곳을 그녀로 특정했다고만 대답했지만 뭔가 석연치가 않았다.

케이든은 그때 왜 그렇게 급하게 그곳으로 돌아간 것일까.

그 다급함과 걱정은 로하나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지금이야 그렇다 쳐도, 왜 그때?’

“그럼 샹들리에는 누굴까.”

케이든은 암살단 중 하나였던, 이제는 고인이 된 평범하디 평범해 보이는 남자의 몽타주를 쳐다보았다.

직감적으로 이 남자는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돌던 생각은 천천히 북쪽을 가리키는 나침반처럼 한 사람을 향했다.

“히스.”

히스가 케이든을 바라봤다.

“잠깐 사람을 붙여야겠어.”

“누구한테?”

그때였다. 노크 소리가 울렸다.

“전하.”

시종장이 고개를 깊게 숙이며 문을 열었다.

“황후 폐하이십니다.”

*

*

“아, 의원님.”

로하나가 의무실에 노크를 하며 들어왔다. 나이 지긋한 사람 좋은 얼굴을 한 남자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예, 마님. 몸은 좀 어떠십니까. 어디 불편하신 데라도.”

“아뇨, 아뇨.”

로하나가 손사래를 쳤다.

“다른 게 아니라 약차는 얼마나 더 먹어야 하나 해서요.”

“내일 정도까지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전하께서 얼마나 으름장을 놓으시는지, 제가 무서워서 혼났습니다. 그래도 약간의 기침은 어쩔 수 없을 겁니다.”

느릿하지만 또렷한 목소리가 너스레를 떨었다.

로하나는 빙그레 웃었다.

“그런가요. 아무튼 내일이라도 제가 그냥 받으러 올 테니 보내진 마세요. 보는 눈이 많아져서. 굳이 제가 약 마시는 게 입을 타면 좋을 것 같지 않네요.”

의원이 알겠다고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서 나가려던 순간, 로하나가 마침 생각이 나 물었다.

“아, 의원님. 혹시 조디라고, 그때 뒤늦게 발견되어서 치료받았던 제 시녀요. 그 친구에게도 약이 제대로 처방되고 있나요?”

의원은 의아한 듯 눈썹을 치켜뜨며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더니 아하 하는 소리를 냈다.

“아, 그 아가씨라면 기억하죠. 마님하고 비슷한 검은 머리에 새하얀 얼굴을 가진.”

“네, 맞아요.”

“그 아이는 이상이 별로 없어서 약차를 따로 처방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네?”

느릿한 목소리가 천천히 그녀의 귀에 들어왔다.

“사실 아예 먹지 않아도 될 수준이었어요. 다행이죠.”

로하나의 표정이 굳었다.

싸늘한 기운이 몸을 휘감았다.

*

히스는 익숙한 발걸음 소리에 인상을 썼다. 덜컥, 문이 열렸다.

오렐리아였다. 환한 얼굴을 하며 들어오는 그녀가 눈을 반짝였다.

“오랜만.”

“황후 폐하.”

케이든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건조하게 말하자 오렐리아가 예의 삐치는 얼굴을 했다.

“여긴 제 집무실이라 황후 폐하를 대접할 만한…….”

“여기가 좋아.”

케이든은 말없이 테이블에서 나와 오렐리아 앞에 마주 섰다. 오렐리아는 동그랗게 뜬 눈으로 여기저기를 둘러보다가 가장 상석에 앉아 히스를 빤히 쳐다보았다.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하는 수 없는 한숨을 쉬며 히스까지 물러나자 오렐리아가 추억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엄청 오랜만에 오는 것 같네. 그렇게 오랜만도 아닌데.”

케이든은 눈을 가늘게 뜨고 앞에 앉은 오렐리아를 바라봤다.

“좀 어때요, 결혼하니까?”

“황후 폐하, 외람되지만 저희가 보시다시피 바빠서.”

케이든이 한숨을 쉬고 입을 열었다.

“공녀님은 잘 지내요? 만찬 때문에 바쁘신가 안 보이시더라고요.”

“공녀님이 아니라 공작 부인입니다.”

철벽같은 반응에 오렐리아는 피식 쓴웃음을 흘렸다.

“그냥 물어볼 게 있어서 왔어요.”

“그리고 말씀 편하게 하십시오. 이제 황후 폐하이십니다.”

오렐리아가 잠시 멈췄다 다시 입을 뗐다.

“이 결혼.”

평상시의 통통 튀는 목소리가 아닌 나지막한 목소리였다.

“R. D.와 샤톤웰 모두를 견제하기 위함인가? 노프탈의 입지를 아르드골드 제국의 일부로 확실히 하려는.”

케이든이 천천히 대답했다.

“네, 그렇습니다만.”

“아르드골드 제국의 안정과 평화, 그로 인한 노프탈의 안전, 이게 공작님…… 아니 당신의 최우선 가치잖아, 그렇지?”

오렐리아가 중얼거렸다.

“다른 건 관심 없었잖아, 단 한 번도.”

마주친 그녀의 눈동자에 배신감 같은 것이 일렁였다. 미간을 조금 좁힌 케이든이 그녀를 똑바로 응시했다.

“달리 하고 싶으신 말씀이 더 있으신 겁니까?”

오렐리아는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입술을 달싹였지만, 더 이상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아냐.”

늘 이런 식이었다. 오렐리아는 분한 마음을 부여잡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히스가 불쑥 나오는 오렐리아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어휴, 깜짝아. 세상에.”

오렐리아는 그런 히스를 조용히 노려보고는 말없이 빠른 발걸음을 옮겼다. 알 수 없는 불쾌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로하나가 바르디에게 파혼을 선언하던 그 순간의 케이든 얼굴이 선연했다.

단단히 화가 나고 굳어 있던 얼굴.

‘사실 기대했었어.’

케이든의 얼굴이 순식간에 험악하게 굳었을 때 혹시 그 표정이 저가 바르디에게로 떠나게 되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하고.

아주아주 짧은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기대를 했었다.

그런데 오늘의 모습을 보니 역시나 그건 지난 평생 반복되어 온 저만의 착각이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오렐리아 속에서 천불이 일었다.

그때 저 멀리서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아직도 이따위 고민을 하고 있어야 하는 결정적 원인이 바로 복도 한중간에 서 있었다.

샹들리에 때는 엉뚱하게 그녀를 위험하게 만들지를 않나. 이번에는 위험하게 했어야 하는 여자를 멀쩡하게 숨 쉬고 걸어 다니게 두지 않나.

일 처리를 그렇게밖에 못 하다니,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눈짓을 하자 복도에 서 있는 자가 오렐리아를 따라 방으로 들어왔다.

“오랜만이야.”

오렐리아가 문을 뒤에서 탁 닫았다. 새카만 머리카락을 한 여자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조디.”

금발이 찰랑이며 어깨를 따라 흘렀다. 조디가 어두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황후 폐하.”

“잘 지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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