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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아침이 밝았다. 로하나는 기침 때문에 잠들지도 못하는 김에 밤새 한잠도 자지 않고 정리한 원작의 타임 라인을 오전 내내 노려보았다.
<1. 어린 시절 아름다운 남부 초원에서 만난 바르디와 오렐리아는 오랜 교제 끝에 결혼식을 올리지만, 결혼식을 앞두고 케이든이 오렐리아에게 반함.
2. 케이든(노프탈)의 위협에 드레고리 하노버가 결혼을 통한 친선 정책으로 딸 로하나를 보냄. 노프탈에 알 수 없는 위협이 있다는 이유로 두 내외는 황궁으로 금방 다시 이동해 옴.
3. 그러나 둘 사이는 오렐리아를 두고 악화되고, 카르크족이 결국 노프탈의 세력을 등에 업고 수도를 습격하면서 바르디는 전쟁을 시작.
4. 크고 작은 전투 끝에 바르디가 승리.>
그리고 원작의 로하나는 3단계쯤 죽는다. 정확히는 인질로 잡힌 로하나를 케이든이 죽인다. 바르디가 케이든과의 본격적인 전쟁을 결심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는 소꿉친구의 죽음.
계약 결혼도 그렇고, 이렇게 군대를 가지고 노프탈에서 마주치는 것도 그렇고.
생각해 보면 원작과는 달라도 서해안에 계속되고 있다던 정체 불명의 폭격이나 이번 화재 사건까지, 장소와 주체가 바뀌었을 뿐 어떻게 보면 큰 줄기는 좀체 바뀌지가 않았다.
‘대피해서 오는 주제에 군대까지 끌고 오다니.’
그 와중에 치사하고 교묘했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로하나가 메모를 계약서가 든 금고에 넣고 보니 해가 하늘의 중앙에 다 와 가고 있었다.
그때 조디가 노래하듯 사뿐사뿐 걸어왔다. 손에는 찻주전자와 찻잔을 올린 쟁반이 들린 채였다.
“여기 내주신 약차예요.”
“응.”
꽤 시간이 흘렀는데도 아직 약이 내려왔다. 로하나는 약을 마신 뒤 조디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조디, 조디도 약 잘 먹고 있지?”
“네?”
“조디가 우리 중에 연기를 제일 많이 마셨을 텐데, 처방은 받고 있는 거지?”
정신이 없어 한동안 친구를 챙기지 못했다.
“그럼요, 물론이죠. 걱정하지 마세요, 마님.”
조디의 명랑한 답에 로하나가 덧붙였다.
“혹시 너무 피곤하면 나한테 말하고. 며칠이라도 좀 쉬어.”
“그럴 리가요. 그리고 전 쉬면 오히려 좀이 쑤셔서.”
명랑한 분위기에 로하나는 겨우 엷게 웃었다.
“곧 도착하신답니다.”
다른 시녀의 말에 로하나는 후딱 약차를 따라 내 마셨다. 제 눈동자 빛깔과 어울리는 보랏빛 자수정 보석으로 치장한 화려한 귀걸이가 거울에 비쳤다.
곧 그 둘을 만날 생각을 하니 안 좋은 쪽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
‘여기가 그 문제의 노프탈이군.’
바르디가 붉은 예복을 입은 채 말에서 내렸다.
‘이래서 이렇게 당당했던 모양이네.’
으리으리한 성과 궁의 모습을 보며 바르디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황제 폐하, 황후 폐하 드십니다.”
우렁찬 경호인의 목소리와 요란한 나팔 소리에 맞춰 미리 나와 기다리고 있던 노프탈의 사람들이 고개를 숙였다.
“우리의 고마운 형, 케이든 델클리프 공작.”
“폐하.”
케이든은 평상시와 다를 바 없는 새카만 갑주와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걱정 마. 원칙대로 내 군대는 성 바로 앞에 있어. 여기 안에는 없어. 아, 경호 부대는 데려왔어. 그들이야 내가 어딜 가든 붙어 다녀야 해서.”
바르디의 말에 그게 그거 아니겠냐는 뜻을 담은 케이든의 눈빛을 보며 바르디는 피식 웃었다.
그때 마차 문이 열리고 여린 손이 나왔다. 바르디가 그 손을 맞잡아 주자 오렐리아가 내렸다.
“공작님.”
밝은 그녀의 목소리가 울렸다. 아이보리색 드레스를 차려입은 그녀는 아르드골드 황궁에 처음 나타날 때만큼 생기발랄해 보였다.
“이젠 편히 호칭하십시오, 황후 폐하.”
케이든이 깍듯하게 말했다. 섭섭하다는 듯 입을 삐죽 내미는 오렐리아를 보던 바르디의 시선이 오렐리아에게 잡혔다가 로하나를 향했다.
“오랜만이야, 로하나.”
“폐하.”
로하나가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몸에 꼭 맞는 청록색 자카르 드레스 자락이 길게 뒤로 늘어뜨려져 있었다. 노프탈의 복식이었다.
조금 낯설어진 그녀의 모습에 바르디는 잠시 동요했다.
그때였다. 콜록 하는 기침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놀랍게도 로하나였다. 케이든이 대번에 몸을 돌리더니 로하나를 향했다.
뭐라뭐라 귓속말을 하는 모습이 황제의 눈에 들어왔다. 케이든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로하나는 눈을 조금 휘면서 미소를 지었다.
‘이대로 이렇게 멀어질 수야 없지.’
황실에서 데려온 사용인이 새로 깐 새빨간 카펫 위를 걸으며 바르디는 생각했다.
‘정말 이상해.’
최정예 경호 부대가 따라붙으며 철통같은 방어를 했다.
‘로하나, 넌 나와 인연이 참 깊어.’
바르디가 다시 그녀를 쳐다보자 이제는 로하나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예쁜 얼굴이 못 본 사이에 너무 수척해져 있었다.
‘어떻게든 결국 다시 가지고 싶어지는 걸 보면.’
쓴웃음이 나왔다.
수많은 사용인이 최고의 예를 갖추며 바르디를 노프탈성 별관으로 안내했다.
바르디는 망토를 아무렇게나 벗어 던졌다. 뒤이어 따라온 오렐리아의 얼굴에 생기가 넘쳤다. 바르디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별관에서 중앙관 현관이 내다보였다.
“나는 노프탈로 대피한 것이 아니다.”
로하나와 케이든이 함께 실내로 들어가는 것을 눈에 담으며 바르디는 생각했다.
“노프탈로 잡으러 온 것이지.”
성가신 저 ‘하얀 새’는 노프탈과 카르크족을 박살 낼 좋은 기회였고, 로하나는 나와 함께할 것이다.
그 모양이 어떻든 간에.
*
“마님, 저녁 식사 메뉴를 선정해 주실 수 있을까요?”
가장 중요한 메인과 디저트는 명목상이라도 ‘안주인’이 선정하는 것이 관례라 했다.
로하나는 고민하다 앙트레로는 노프탈의 자랑인 소고기를 활용한 웰링턴을, 디저트로는 체리를 곁들인 머랭 갈레트를 제안했다.
“좋은 생각이야.”
그때 익숙하고도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로하나가 뒤를 돌아보자 모두를 일부러 조용히 시킨 황제가 서 있었다.
“폐하.”
로하나 옆에 있던 주변 사용인까지 모두 깜짝 놀라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로하나도 못지않게 놀랐다.
“물러나.”
황제가 손을 휘이 젓자 모두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여기까진 어쩐 일로…….”
“잘 지냈어?”
로하나는 못마땅한 마음으로 자리에 다시 앉았다. 황제 내외가 도착하고 한 시간. 온다는 소리를 들은 지 만 하루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온몸이 피곤했다.
“네, 그럼요.”
“아직 화가 많이 난 거야?”
“아니요.”
시선이 집요하고 무거웠다. 로하나는 인상을 썼다.
“폐하, 갑자기 방문하시는 바람에 저희 준비가 조금 바빠서…….”
“알아. 그래도 그냥 있어. 그런 예법 같은 거 알 게 뭐야. 우리 늘 그런 거 싫어했잖아.”
바르디가 로하나에게로 몸을 깊이 숙였다.
“상황상 로하나가 케이든과 결혼하게 된 건 안타깝게 생각해. 그래도 걱정하지 마.”
목소리가 자못 진지했다. 처음 듣는 목소리일 정도로.
“네가 위험에 처하게 두지 않아, 절대로.”
누가 보면 아직도 정혼자 사이인 줄 알 것이었다. 로하나의 얼굴은 싸늘했다.
“기억나? 전에 로하나가 말 타다가 넘어졌을 때…….”
로하나가 가만히 바르디를 바라보았다.
“폐하께서 눈이 빠지게 눈물 흘리셨던 거요?”
“그게 아니라…….”
그녀의 침착한 목소리에 바르디가 잠시 멈칫했다.
“내가 너를 태우고 황궁까지 달렸잖아. 그러고 보니, 그때가 우리가 처음으로 같이 말을 탔을 때 같은데.”
로하나는 어이없는 미소를 지었다. 과거는 어쩜 그리도 순식간에 아무 의미가 없어지는지.
“로하나, 정말로 미안해.”
로하나의 보랏빛 눈이 다시 바르디에게로 고정되었다.
“일이 이렇게 되어서 정말 유감이야, 진심으로.”
짙은 푸른 눈이 진득하게 따라붙었다.
똑똑.
로하나가 입을 열려는 순간, 노크 소리가 들렸다.
“마님, 약차 다시 한번 드실 시간……. 폐하!”
황제를 발견한 조디가 납작 엎드리며 놀란 목소리를 냈다.
“약차라니?”
바르디가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로하나, 어디 아파?”
“아무것도 아닙니다.”
로하나가 재빠르게 대답했지만 바르디는 뭔가 석연치 않음을 느꼈다. 아까의 기침 소리도.
“너.”
서늘한 목소리가 응접실을 울렸다.
“똑바로 말해.”
서슬 퍼런 목소리에 놀랐는지 조디의 큰 눈이 불안하게 깜빡였다.
“그…… 그게 불이 나서…… 마님께서 연기를…… 저는…….”
당황한 목소리가 울먹이기 시작했다. 로하나가 안 되겠다 싶어 말을 가로챘다.
“화재가 있었습니다.”
바르디의 눈썹이 움찔하더니 미간이 좁아졌다. 푸른 눈이 불길하게 번뜩였다.
“화재라니?”
“오는 길에 들른 중간 지점에서요.”
“그게 어딘데.”
로하나가 대답하지 않자 바르디가 다시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로하나 바로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로하나…….”
올려다보는 눈이 새파랗게 빛났다.
“정확히 ‘어디’에서 ‘어떻게’ 불이 난 건데?”
크고 두꺼운 어깨가 딱딱하게 긴장하며 올라서 있었다. 두 눈이 당장에라도 누구든 잡을 듯 이글거렸다.
“황궁을 떠난 지 하루도 안 되어서 위험했었다고, 지금 그렇게 말하는 거야?”
“폐하.”
로하나는 차가운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델클리프 공작이 알아서 할 일입니다. 그의 영지였으니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어떻게 신경을 안 써!”
별안간 버럭, 내지르는 소리가 쩌렁쩌렁 응접실을 울렸다. 일그러진 얼굴이 분노에 찼다.
있는 대로 일갈한 목소리에 로하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미간이 절로 좁혀졌다.
“카르크 짓이야?”
“아직 몰라요.”
로하나는 태연하게 거짓말을 했다.
“아직도?”
“그만하시죠.”
팽팽한 긴장이 흘렀다.
“폐하까지 걱정하실 일이 아닙니다.”
아무 감정 없는 담담한 로하나의 얼굴을 보며 바르디의 표정이 조금 일그러졌다.
“로하나.”
황제는 큰 숨을 내쉬며 적갈색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커다란 손은 목 뒤를 지나 로하나의 무릎에 머물렀다.
“내가 그 자식들 전부 죽여줄게.”
파란 눈이 번뜩였다.
“샹들리에 때 그놈들보다 훨씬 고통스럽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