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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제 세월이 흘러 그 소년은 황제가 되었고, 문제의 노프탈로 가게 되었습니다.’
바르디는 저 스스로 오랜만에 떠올린 과거를 비릿하게 기억하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아르드골드 제국의 황가를 상징하는 붉은 벨벳이 가득한 방 안에서 황제는 금테를 두른 새까만 대리석 테이블 위에 다리를 올리고 앉아 있었다.
‘이제 연극을 그만할 때인가.’
그때 저 멀리서 발소리가 들렸다.
“황제 폐하, 확인해 주셔야 할 서류가 많습니다.”
바르디는 심드렁한 얼굴로 드레고리를 쳐다보았다.
“저거 말하는 거야?”
이어서 들어온 부디에르가 깍듯이 인사를 하더니 초조한 얼굴을 했다.
“폐하, 군사 보고서 확인하셨는지요.”
벽안이 나른하게 둘을 바라보았다.
“글쎄……. 했을까요?”
“폐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이제 황태자가 아니시…….”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얇은 보고서가 날아왔다.
“확인해요.”
“예?”
부디에르가 당황한 목소리를 내며 떨리는 손으로 보고서를 집어 들었다.
황제가 전한 보고서에는 노프탈로 황전을 임시 이전하기 위한 로드맵이 완벽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아니…… 이게 무슨.”
자리에서 일어난 바르디가 파란 눈을 빛냈다. 넓고 두툼한 어깨는 그 위에 걸쳐진 하얀 여우 목도리를 작아 보이게 했다.
황제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부디에르는 늘 나던 땀을 몇 배로 더 흘렸다.
“이제 애 취급은 그만합시다.”
바르디가 찌뿌둥한 듯 팔을 돌렸다.
“그래도 오랜만에 일했다고 조금 피곤하긴 하네요?”
드레고리가 눈을 내리깔았다.
“그럼…… 폐하께서 이걸 직접……?”
“일단 거기로 가 봅시다.”
황제는 시큰둥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과연 도대체 무슨 꿍꿍이가 있어서 이런 일들을 벌이고 있는지 알아야겠으니까.”
“그럼 폐하께서는 이게 노프탈의…….”
아니, 그렇게 단순할 리는 없지.
케이든의 얼굴을 떠올리며 바르디는 표정을 굳혔다.
사실 그런 것보다야 가고 싶은 이유는 따로 있었지만, 누가 그 사실을 알 필요는 없었다.
*
아직 깜깜한 이른 새벽녘.
높은 탑에 있는 두 사람 밑으로 넓은 작업장이 보였다. 대부분 마력 능력자로서, 아침부터 일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하늘을 나는 새라고 하셨죠.”
“포탄을 떨어뜨릴 수 있는.”
케이든이 이어서 대답했다.
“크기는 못 해도 너만큼은 되었을 거야.”
케이든이 이즈에게 말했다. 이즈의 밝은 백금발 머리카락이 끄덕이는 고개에 흔들렸다.
“그래도 포탄 무게를 견디려면 그렇게 빠르게 움직일 수는 없을 텐데요.”
“네가 시도해 본 결과는.”
“실패입니다, 아직까진. 그런데 저도 무리라는 게 정말 이상합니다.”
그 ‘마물’이 이즈 같은 마력자가 아니라면, 짐작하는 것은 단 하나. 그 사실은 이즈조차도 알기 어려운 극비였다.
케이든이 심각한 얼굴을 하자 이즈가 덧붙였다.
“R. D.라고 해도 그 정도는 무리겠죠?”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둬야지.”
케이든은 짧게 대답했다.
“네.”
어쨌든 그들과 이야기를 할 필요는 있었다. 그들의 리더를 특히나 만나야 했다.
“R. D.에게 연락을 넣어라.”
“전하, 그건…….”
“원하는 게 있을 거다. 애초에 어설픈 공격을 하고 간 것도 메시지였을지도 모르지.”
케이든의 말에 이즈의 회색 눈에 걱정이 스쳤다.
“알겠습니다.”
벌써 동이 터오고 있었다. 둘은 조용히 첨탑을 걸어 내려갔다.
“마님께선 어떠신가요? 시리율 말을 들으니 트루디 백작 부인도 여전히 연기 때문에 고생하는 것 같던데요.”
탑을 거의 다 내려왔을 때쯤 이즈가 물었다. 케이든은 로하나를 떠올렸다.
“글쎄.”
아프다고 해도 쉽게 티를 낼 것 같지는 않았다.
“잘 모르겠네.”
“공작님께서 모르는 것도 있으시네요.”
“히스를 붙여 놓았으니 당분간 크게 걱정할 일은 없을 거야.”
그래서 히스가 없었던 거로구먼. 이즈는 무심코 중얼거리다가 떠오른 생각에 잠시 망설였다.
“오렐리아…… 아니 황후 폐하도 걱정입니다. 심지어 원래는 카르크 출신이라는 것을 들키면 어떨지. R. D.나 노프탈에선 이미 배신자라고 난리가 났고요.”
케이든이 낮게 신음을 냈다. 그 반대의 분노로는 하노버 딸이라는 죄로 로하나를 없애겠다고 불까지 난 판이었다.
“무려 렌트워스 황가의 황후가 되어서 돌아오는 것 아닙니까.”
“오렐리아와 친했던가?”
케이든이 묻자 이즈가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친한 사람이 그나마 있었다면 전하일 겁니다.”
케이든이 눈을 가늘게 떴다.
“다른 사람하고는 좀처럼 가까워지질 못했죠.”
이즈가 오렐리아를 회상하며 말했다.
*
“벌써 일어나셨습니까.”
로하나는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연기 때문인지 잠을 계속 설쳐 오늘도 새벽에 눈을 뜬 참이었다. 추웠지만 기분 좋게 추운 공기, 겨울 냄새였다.
그때, 순간 기침이 나서 로하나는 입을 가렸다. 낮게 아래로 묶은 로하나의 머리가 바람결에 흔들렸다.
“기침까지 하면서 이렇게 찬 공기를 쐬십니까.”
벌컥 화를 내는 수준의 타박이 이어져 로하나는 민망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수도는 겨울에도 제법 따뜻해서 이런 느낌이 잘 안 났는데. 오랜만에 전생을 떠올리게 하는 분위기였다.
“괜찮아요.”
케이든이 화가 난 듯 그녀를 내려 보았다.
“아침부터 어딜 다녀오시나 봐요.”
로하나가 슬며시 화제를 돌리자 케이든은 못마땅한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탑에 좀 다녀왔습니다. 군수부에.”
말을 하던 케이든은 두꺼운 제 망토를 벗어 이미 망토를 두르고 있는 그녀에게 덮었다.
“시리율에게 들었습니다. 궁금한 게 많으시다고. 그냥 책을 보는 것 말고 상황을 알고 싶어 하시는 것 같다고요.”
“아, 그게. 수도에서는 아버지 일을 도우며 이래저래 돌아가는 상황에 빠삭했다고 생각했는데…….”
로하나가 설명했다.
“여기 오니 깜깜하네요. 하노버를 죽이려고 무장 단체가 움직이다니, 수도에선 상상도 못 할걸요. 뭐라도 읽으면 도움이 될까 해서.”
말은 그렇게 했지만 로하나는 사실 케이든의 과거가 궁금한 것이 더 컸다.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소년의 눈동자는 분명 케이든의 것이었다. 케이든은 로하나가 저를 알아보았다는 걸 모르는 눈치였지만.
로하나는 다시 생각했다. 만약 그에게 그녀를 향한 조금의 호의가 있다면, 그걸 활용할 수 있을까.
그냥 도망치는 것 말고 어떻게 해야 안전하게 미드 서머에 예정되어 있는 죽음을 피할 수 있을까.
“궁금한 게 있으면 저한테 물어보셔도 되는데.”
하하, 낮게 웃은 로하나가 케이든을 올려다보았다.
“하노버한테 원하는 걸 말씀해 주세요. 계약에 있던 대로요.”
케이든이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하노버 공작가의 무기 수출·수입 내역이 필요합니다만…… 그게 여기서 당신이 가능하겠습니까.”
“그게 가능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으면, 저랑 결혼하신 거 진짜 너무 불리한 계약인 거 아니에요?”
로하나가 싱긋 웃으며 케이든을 올려보았다.
“당연히 가능하죠, 돈이 좀 필요하겠지만.”
“얼마든지.”
그녀가 웃으며 다시 시선을 돌리는데 케이든의 시선이 머무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전혀 불리하지 않습니다.”
의아한 눈빛이 흑안과 마주쳤다.
“네?”
새된 작은 반문의 소리.
케이든이 가깝게 다가오더니 대충 둘렀던 망토를 단단히 여몄다. 무거웠지만 따뜻했다.
“들어가시죠. 춥습니다.”
로하나는 공연히 가슴이 뛰었다. 가까워지기만 하면 이랬다.
“그리고…….”
그런데 이어지는 목소리가 아주 어두웠다. 순식간에 어두워지는 분위기에 로하나는 다시 케이든을 올려보았다.
태연한 미소. 꼭 어두운 분위기가 그에게 내려앉으면 케이든은 저런 미소를 지었다.
가까이 다가온 케이든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 로하나는 한껏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봤다.
“안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의아해하는 보랏빛 눈동자에 케이든이 짙은 눈을 마주쳤다.
“손님이 오게 생겼습니다.”
그녀가 무슨 손님이냐는 질문을 하려는 찰나, 히스의 목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왔다.
“전하, 급한 일입니다.”
히스의 목소리를 들은 케이든은 태연한 얼굴로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뭐지?”
“미안하지만, 정말 한시가 급한 일이라서.”
히스의 목소리는 여유로웠지만, 표정은 그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잠시 숨을 삼킨 히스가 입을 열었다.
“황제, 황후 폐하께서 노프탈로 오신답니다.”
“그래, 그게 뭐.”
로하나는 저도 모르게 경악해 두 남자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게…… 경호상의 문제로 저희에게 알린 것보다 훨씬 빠르게 이미 출발했다고 합니다. 예상 도착 시간은 내일 정오.”
마지막 말을 덧붙이며 히스도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중앙 황실 군부대까지 대동하고 있다는 보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