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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침묵 끝에 먼저 입을 연 것은 케이든이었다.
“농담입니다.”
케이든이 낯선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바로 정색하시네요.”
속내를 바로 들킨 것이 민망하여 로하나는 헛기침을 했다.
“저를 가지고 하노버 공작가를 휘두르실 생각이라면, 그렇게 쉽지는 않을 거예요.”
이번에 눈썹을 들어 올린 건 케이든 쪽이었다.
“드레고리 하노버한테는 아들 브란드도 있습니다. 굳이 딸자식인 저를 걱정해 본인의 손해를 감수할 사람은 아니에요.”
진심이고 진실이었다. 눈동자가 마주쳤다. 또 알 수 없는 눈빛이었다. 로하나는 갑자기 이 자리가 불편해졌다.
“그러니, 저를 차라리 아군이라 생각하시고 하노버를 활용하세요. 아버지 말고요. 그 말씀 드리려 어제 그렇게 말씀드린 거예요.”
또다시 진심이고 진실이었다. 잠시 지긋한 눈빛이 제게서 떠나지 않는 것을 느끼며, 로하나는 빠르게 생선 요리를 먹었다.
“너무 심각해졌네요, 대화가.”
로하나가 피식 웃자 케이든도 조금 긴장이 풀린 듯 인상을 풀었다.
“오늘은 군수부에 다녀오는 길입니다.”
“군수부요?”
“무기와 전투 전략을 담당하는 곳이죠. 마력을 연구하기도 합니다. 당신이니까 하는 말이지만.”
“그렇군요.”
“수도 쪽에 서해안 공격이 계속 있는 모양입니다. 저희는 공중 공격이 가능한 무기가 있으니…… 대비를 해야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그런 무기가 있다는 것을 황제가 알면 좋아하진 않을 텐데요.”
“알고 있을 겁니다.”
그 바보처럼 보이던 바르디 렌트워스보다 저 자신이 아는 게 더 없었다는 게 기가 차 로하나는 밭은 한숨을 짧게 내쉬었다.
“도움을 받으려 할까요.”
일전의 둘 사이의 긴장을 떠올리며 로하나가 말했다.
“어쩌겠습니까, 도움이 필요하면 받아야지.”
케이든이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둘 사이의 긴장을 떠올리자 오렐리아의 황금빛 머리카락과 눈동자가 떠올랐다.
“해산물을…….”
짧은 침묵을 깨고 케이든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좋아하신다고 들어서.”
빠르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그답지 않았다.
“아…….”
그러고 보니 노프탈에서 해산물이라니. 흰 생선 레몬 요리를 바라보며 로하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슬며시 미소가 나왔다. 의외로 괜찮은 동업 관계가 될 수 있어. 잘해서, 전쟁도 반역도 모두 피하고 행복하게 독립하자.
“고마워요.”
“별말씀을.”
보드라운 생선 살이 유난히 달았다.
“저 고기도 좋아해요. 걱정하지 마세요.”
케이든의 입술에 보일 듯 말 듯 한 작은 미소가 서렸다.
*
케이든은 로하나를 내실로 먼저 보낸 뒤 집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유난히 긴 다리가 너른 걸음을 내딛자 바닥에 구두 굽 소리가 울렸다.
세 가지 사건이 모두 로하나를 향하고 있었다. 샹들리에, 수도에 대한 공격, 그리고 이번 화재 사건까지.
이기는 전쟁을 해야 할 때였다.
순간, 서재 문 앞에 어린 시녀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가 무슨 일이냐는 듯 눈을 들자 시녀가 고개를 조아리며 손을 쭉 뻗었다.
붉은 튤립에 결혼을 축하한다는 메시지가 매달려 있었다.
“수도?”
“네.”
케이든은 적당히 처리하라는 말을 하고는 문을 열었다. 어제의 선물도 과했고 오늘은 더했다. 그렇게 원하는 것을 이젠 가졌는데도 그녀는 달라진 것이 없어 보였다.
덜컥, 문을 열자 히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별일은 없었고?”
“걱정은. 여기 노프탈성이야. 무슨 일이 있으려고.”
여유를 부리는 히스에게 따가운 눈총이 내리꽂혔다.
“충분히 조심하고 있었지. 당연하지. 도서관에만 있어서 어려운 일도 아니었지만.”
“그래, 부탁할게.”
케이든이 잔뜩 쌓인 서류에서 맨 위에 있던 것을 집어 올리며 말했다.
“케이든.”
연상의 친우의 눈매는 조용하면서 복잡해 보였다.
“정말 하노버 공작가가 필요하다는 이유, 그것뿐이야?”
“샤톤웰 견제도 필요했지.”
“만약…….”
히스의 옅은 눈동자가 두꺼운 가죽 의자에 앉아 등을 깊숙이 기댄 케이든을 내려 보았다.
“샤톤웰에서 다른 제안을 한다면?”
“무슨 이야기지?”
“샤톤웰 이슬라 여왕에게서 온 서신이야, 지금 네가 손에 든 것.”
케이든이 눈을 낮게 깔고 서류를 읽었다. 편지였다.
“전쟁을 불사할 생각은 없어. 그게 어떤 일이더라도.”
“필요한 전쟁도 있는 법이야. 어쩌면 좋은 기회인지도 모르지.”
히스의 딱딱한 목소리에 케이든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저보다 열 살은 더 많은 히스는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였지만 심각한 이야기를 할 때는 그것이 실감 날만큼 엄중한 뭔가가 있었다.
“아직은 필요한 줄 모르겠는데.”
“레이디가 걱정되는 거야?”
“그게 무슨 소리지?”
케이든 역시 자리에서 일어서며 눈을 맞췄다.
“분명 우리가 처음 궁으로 돌아갈 때만 해도 우리는 적시에 카르크족을 위한 전쟁을 할 각오가 되어 있었어.”
둘 사이에 처음 있는 긴장이 흘렀다.
“늘 그러했듯이.”
“히스, 할 얘기를 해.”
케이든의 날카로운 눈이 꿰뚫듯 히스를 바라보았다. 히스는 그 눈 안에 있는 복잡한 감정을 읽었다.
“레이디가 걱정되는 거라면, 경제적으로든 물리적으로든 우리가 지키면 될 일이야.”
케이든이 한숨을 쉬며 편지를 태웠다.
“R. D.가 날뛰는 것도, 내가 모르는 공격이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것도 용납할 수 있는 선을 넘었어.”
“좋은 이용처일 수 있지. 이 기회에 그들이 더 날뛰게 둬.”
히스가 평소의 여유로운 웃음은 싹 거둔 채 쓴웃음을 지었다.
“그 ‘새’에 대해서 우린 아는 게 없어. 그렇게 심각한 존재의 정체도 모르면서 전쟁을 시작할 순 없어. 내버려 두는 거나 시작하거나, 같은 맥락에서 하는 소리다.”
히스는 냉정한 케이든의 말에 기운이 빠졌다.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뭔가 변한 케이든이 신경 쓰였다.
“그래, 그렇겠지.”
케이든이 잠시간 침묵 후에 대답했다.
“기다려, 곧 이길 전쟁을 할 테니까.”
“알아.”
케이든이 다음 서류를 살펴보며 펜대를 들고 있는데 히스가 다시 말을 걸었다.
“난 당신을 믿어. 그래서 여기까지 온 거고.”
케이든은 말없이 제 오랜 친구를 바라보았다. 한때는 원수였던 그를.
“나도 너는 믿어.”
케이든이 서류로 눈을 돌리며 말했다.
“로하나 옆에 둘 수 있는 것도 너뿐이니까.”
“이런 말까지 하면서 지금 결혼이 정치적이라고 나한테까지 우길 생각이야?”
히스가 살포시 웃으며 말했다. 아무리 산전수전을 겪었다 해도, 저보다 어린 공작은 가끔 이런 면에서 서툴렀다.
황당하지만 그럴 수도 있겠지.
그렇게 불길이 치솟던 화재 속에서도 끝까지 제 시녀를 찾던 로하나를 떠올리며 히스는 저답지 않게 물렁한 생각에 스스로 조금 놀랐다.
고작 그 정도에 저도 로하나에게 경계를 내리고 있었다 싶어서 더더욱 놀라웠고.
그래도 그녀는 하노버였다. 아린족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조심하라고 말하긴 늦었나.”
텁텁한 속내를 숨기고 농담을 던지자 케이든의 눈이 단번에 세모꼴이 되었다.
“한가한가 봐? 오늘 야간 훈련 있다고 하지 않았나.”
“뭐야. 난 레이디 경호로 다 빠지는 거 아니었어?”
“아니야.”
“뭐야.”
“…….”
케이든의 검은 눈이 인내심을 꾸역꾸역 누르며 히스를 쳐다보았다.
“아…….”
“밤에는 내가 있으니 괜찮아.”
약간의 헛기침을 섞으며 대답하는 제 주인을 보며 히스는 미소를 지었다. 속이 조금 묘하게 불편했지만, 어쩌겠는가. 그는 케이든을 믿었다.
똑똑.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무거운 문이 열리면서 이즈가 들어왔다.
“전하, 수도에서 온 급한 전갈입니다.”
*
15년 전의 황궁은 지금과 다를 바 없이 화려하고 견고했다.
드레고리 하노버는 어린 황태자를 찾아 중앙 정원을 걸었다. 얼마 가지 않아 익숙한 적갈색 머리카락 소년의 뒷모습을 발견한 드레고리는 냉정한 목소리를 냈다.
“황태자 전하, 공부 시간입니다.”
“그것보다 이것 봐. 신기하게 생긴 풀이지?”
뒤돌아본 새파란 눈동자가 햇빛에 비치고 가는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말씀하신 수준의 장례식은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드레고리가 미끄러질 듯 유려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소년이 태연한 목소리로 물었다.
“돌아가신 렌트워스 ‘공작’께서는.”
소년의 미간이 아무도 모르게 살짝 구겨졌다.
“이제는 ‘공작’인가 봐요.”
“황태자 전하는 이제 바르디 렌트워스 님이시니까요.”
“죽기 직전까지는 황태자였잖아요.”
“그렇지 않습니다. 정식으로 황태자가 되신 적은 없어요.”
바르디의 새파란 눈동자가 동그랗게 드레고리를 바라보았다.
“그렇군요.”
가여운 내 아버지.
제 누이 내외를 죽여 가며 지키려 했던 황태자 자리를 제 아들에게 빼앗겼으니, 그의 삶은 얼마나 기구하고 부족한가.
바르디는 냉정하게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드레고리의 눈을 피해 속으로 웃었다.
그러니 제 아들에게도 또 이렇게 이용당하시죠.
소년은 꽃밭을 둘러보았다. 꽃밭 아래로 개미 떼가 지나가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꾸욱 누르자 개미 떼들이 흔적도 없이 죽어 나갔다.
“아버지의 장례식에는 케이든이 오겠죠?”
드레고리의 눈썹이 움찔했다.
“글쎄요, 노프탈이 워낙 먼 곳이라.”
“자기 삼촌의 장례식에 조카가 오지 않는다고요?”
말갛게 뜨고 올려다보는 눈이 천진한 빛을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아직 황태자 전하께서 어리시고…… 시국이 이렇게 흉흉한데 반역자의 아들이 참석하는 것은 모양새가 좋지 않지요. 제아무리 혈연으로 엮여 있다고 해도요.”
드레고리의 설명에 바르디는 납득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반역자의 아들이라고 해도 저한텐 사촌 형인데…… 가엾게 바다에서 죽은 고모의 유일한 혈육이고요.”
“오지 않는 편이 황태자 전하께도 좋을 겁니다.”
그 정도도 이해하지 못하는 어리고 순진하고 착한 황태자가 그의 역할이었다. 똑똑하게 능력을 보인다면 오히려 케이든에게 비교되기에 십상이었으니까.
그런 손자가 콘스탄스 황제는 못마땅했지만 멍청하고 잔악한 제 아들도, 반역자의 아들인 첫 손자도 좋은 대안은 아니었다.
<마음이라도 따뜻해야지.>
황제의 의중을 안 소년은 영악하게 자신이 어떤 사람으로 살아야 하는지 파악하고 있었다.
“왜?”
끝까지 모르는 척하는 그를 보며 드레고리는 입술을 씰룩였다. 제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아 신이 난 것이 훤하게 보였다.
그를 물리고 혼자 다시 정원에 남은 바르디의 시선에 살아남은 개미 행렬의 끝에 있는 작은 개미집이 들어왔다.
부질없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었다.
조용히 발로 짓밟자 개미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