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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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하나가 아침 식사를 하러 내려갔을 때, 이미 케이든은 나가고 없다는 소식만 들렸다. 보통의 공작은 별일 없으면 자택이 있는 것 아니었나.
어제 불편하게 끝난 대화가 생각나 신경 쓰였다.
그때 그의 몸 상태는 단순한 학대가 아니었다.
누가, 왜.
로하나가 사과를 씹는 둥 마는 둥 하는데 익숙한 얼굴이 문가에서 나타났다.
“조디!”
노프탈 시녀 복장을 한 조디가 총총걸음으로 다가왔다.
“몸은 좀 어때? 오늘은 좀 나아?”
누구보다 연기를 가장 많이 마셨던 그녀였다. 로하나는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앞가림하려면 열심히 돌아다녀야 한다.
“이제 마님이라고 불러야 되겠지요?”
조디가 씩씩하게 말했다. 누구보다 연기를 많이 마셨을 텐데도 그녀는 명랑함을 잃지 않고 있었다.
“아, 조디. 혹시 도서관이 어디 있는지 아니?”
도서관이라는 낯선 단어에 조디는 조금 희한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바로 둘러볼 수 있는지 알아봐 줘.”
그때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말을 걸었다.
“레이디 델클리프.”
히스가 여느 때의 잘생긴 얼굴을 빛내며 미소 지었다.
“히스.”
로하나는 어젯밤 케이든이 낮에는 히스가 그녀를 돌볼 거라고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화재 사건 이후로 케이든은 철저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어떤 관심이든 부담스러워하는 로하나에게는 노프탈에서의 시작이 쉽지 않았다.
“공작님 부탁으로 오신 건가요?”
“제가 원해서 온 것이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오히려 그에게서는 묘한 적대감이 없어져 이상했다. 이미 저에게 차를 따르는 시녀조차 찻물이 채 떨어지기 전에 주전자를 아슬아슬하게 치우는 것을 보며 모두가 저를 싫어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기에 더욱.
“도서관에는 무슨 일로 가시려는 겁니까?”
“제가 이 근방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없어서…….”
히스가 흥미롭다는 듯 한쪽 입술을 올리며 웃었다.
“노프탈에 대해 공부하려 하시는 건가요?”
“공부일 것까지야……. 그냥 심심해서요.”
로하나는 자신의 무지에 다시 한번 감탄했다. 애초에 마력이라는 것도 몰랐고, 하노버 공작가가 이 정도로 미움받고 있는지도 몰랐고, R. D.라는 단체가 있는 줄도 몰랐다.
‘도대체 원작은 누가 쓴 거야.’
여기도 그곳의 평행 세계 같은 건가, 하는 생각에 빠져 있는데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녀를 생각에서 끄집어냈다.
“제가 모시고 가죠. 시리율은 늘 연구실에 있으니 가서 보면 됩니다.”
히스가 여유롭게 말했다.
“시리율이요?”
“도서관장입니다. 그렇지만 그 전에 식사하셔야죠.”
거의 비워지지 않은 접시를 보며 히스가 입을 열었다.
“아…….”
히스는 별말 없이 눈으로 빵을 가리켰다.
로하나가 하는 수 없이 제대로 음식을 먹기 시작하자 히스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턱을 괴었다.
‘역시 인기가 있는 사람은 다르네.’
로하나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
“마님, 피곤하진 않으시고요?”
이제 겨우 저녁 시간이었는데 피곤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로하나는 미소만 짓고 말았다. 시리율은 해맑은 얼굴로 은발의 머리를 아무렇게나 올려 묶고 있었다.
“내가 돌아가야 시리율이 쉬나?”
“아, 아니요! 그건 아니지만.”
한편 히스는 문간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저 때문에 지루한 곳에 갇힌 것 같아 로하나는 마음이 쓰였다.
“히스, 이제 돌아갈까요?”
여기 제법 오래 있었다. 책을 덮으면서 로하나가 묻자 히스가 여느 때처럼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씀 놓으십시오, 레이디.”
“맞아요, 마님 되게 특이하시네요.”
시리율이 경쾌하게 덧붙였다.
수도에 비해 전체적으로 사람들이 솔직하고 직선적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대부분의 사용인이 로하나에 대한 불쾌감을 그리 어렵지 않게 표현했다.
다행히 시리율은 처음부터 그런 적대감이 강하진 않았다.
“예전부터 그게 잘 안 되더라고요. 원래 알던 사람이면 모를까.”
읽던 책의 표지를 쓸며 로하나가 말했다. 어려서부터 익히 읽었던 역사서 말고는 다른 것을 찾지 못했다.
조금 더 제대로 된 정보를 어떻게 찾아야 할까. 이런 궁금증을 어디까지, 누구에게 드러내도 괜찮을까.
머리 아픈 고민을 하며 로하나는 책을 돌려놓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꽂아야 할 책의 위치를 확인하니 사다리를 타기도 애매하고, 그냥 넣자니 조금 높은 곳이었다.
사다리까지 가져올 일은 아니다. 귀찮아. 까치발을 하고 조금만 더, 하는 사이였다. 인기척이 느껴졌다. 히스가 어느덧 뒤에 있었다.
“제가…….”
로하나를 앞세운 채 뒤에서 책을 넣으며 히스가 미소를 지었다. 가까이 붙어 다니긴 했지만, 이렇게 붙어 있자니 낯설었다.
이 사람은 누구일까.
원작에는 없었는데. 어쩌다 케이든하고 이렇게 친한 사람이 나타난 거지.
오랫동안 저를 괴롭힌 의문에 그녀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자 히스는 왜 그러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히스.”
로하나가 복잡한 얼굴로 올려다보자 히스가 새물새물한 눈웃음으로 보답했다.
“네?”
“혹시 케이든과는 언제부터 알았죠?”
히스가 한쪽 눈썹을 올리더니 가만히 그녀를 쳐다보았다. 미소와 함께 눈빛이 복잡했다.
“그건…….”
그때였다. 벌컥 도서관 문이 열린 것은.
“여기 있다고…….”
아직 망토도 벗지 않은 채 도서관으로 들어오던 케이든이 말을 멈췄다. 짙은 눈이 당황한 듯 흔들렸다.
“아…….”
히스가 훌쩍 발걸음을 떼며 로하나 뒤에 바짝 다가섰던 몸을 떨어뜨렸다.
“오셨습니까.”
“로하나하고 시리율 앞인데…… 늘 하듯 반말 해.”
케이든의 눈이 로하나와 히스를 번갈아 보더니 서늘한 목소리로 입을 뗐다.
“어디 다녀오시나 봐요.”
로하나가 말을 꺼내자 흠, 하는 대답인지 아닌지 모를 소리를 낸 케이든이 다시 들어온 걸음 그대로 몸을 돌렸다.
휑하니 침묵이 내려앉았다. 시리율은 어깨를 살짝 움츠리더니 총총걸음으로 연구실 안으로 들어갔다.
“왜……?”
로하나가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히스가 난처하면서도 흥미롭다는 듯 눈썹을 찡긋했다.
“아직 애 같을 때가 있죠?”
애라니. 설마 방금 들어왔다 나간 케이든을 보고 하는 소리인가 싶어 로하나는 입을 살짝 벌렸다.
*
“어딜 다녀오셨어요?”
로하나는 긴 식탁 너머에 있는 케이든에게 어색한 침묵을 깨고 말했다. 로하나조차 처음 보는 고급스러운 음식이 가득했다. 램 스테이크부터 노프탈에서는 귀하다는 해산물까지.
“네.”
케이든은 짧게 대답하더니 스테이크를 썰어 입에 넣었다. 단답형으로 대답하라고 던진 말이 아니었는데. 로하나는 속으로 끙 소리를 내고 다시 말을 꺼냈다.
“전 도서관에 있었어요.”
역시 어제 일로 아직 기분이 풀리지 않은 건지 좀체 신경이 쓰여 로하나는 다시 어색한 말을 이어 나갔다.
“네.”
로하나는 작은 한숨을 쉬었다. 아무 말도 안 할 모양이었다.
“케이든.”
대놓고는 처음 불리는 이름에 그제야 스테이크에 하던 칼질을 멈춘 그가 눈을 들었다.
“어제 일 때문에 마음 상했다면 미안해요. 솔직하게 터놓고 이야기하자는 거였어요.”
눈을 지그시 맞추던 케이든은 다시 고개를 숙이며 칼질을 마저 했다.
“알겠습니다. 웬만하면 정보를 공유하도록 하죠. 그리고 저도 진심으로 전쟁은 원치 않습니다.”
“네, 알아요.”
그 모습을 보다 보니 왜 히스가 그를 ‘애’ 같다고 했는지 알 것도 같아 로하나는 엷은 미소를 지었다. 어쩌면 지금의 그에게는 이게 진심인지도 몰랐다.
“케이든?”
“네.”
“무슨 안 좋은 일 있으세요?”
“있었죠.”
“있었다는 게…….”
케이든이 고기 조각을 입에 넣는 것을 보며 로하나는 말을 머뭇거렸다. 무슨 일이었는지는 너무 뻔했으니까. 아마 R. D.라는 사람들과 할 일이 있었겠구나.
마주친 눈에서 메시지를 읽어 낸 로하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서관은 무슨 일로 가신 겁니까?”
처음으로 케이든이 말을 시작하자 로하나는 드디어 숨통이 트인 것 같았다.
“아……. 그게 제가 너무 여기 상식이 부족한 것 같아서…….”
“상식이요?”
“R. D.에 대해서도 그렇고, 하노버에 대한 평가도 그렇고…… 모두 수도에서는 들어 본 적도 없는 금시초문의 이야기들이니까.”
로하나가 답답한 마음에 말을 늘어놓았다.
“보아하니 공작님은 많이 아시는 것 같은데…… 저보다는. 저도 이제 수도를 벗어난 이야기도 좀 알아야 뭐라도 도움이 되지요.”
“독립을 원하신다고 했죠.”
케이든의 낮은 목소리가 물었다.
“네.”
눈을 내리깔며 대답하자 와인 잔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이유요?”
그런 당연한 것을 여기에서는 특이하게 보는 모양이었다.
하긴, 애초에 혼자 사는 여자 같은 건 존재하지도 않는 세상이니까. 이혼이든 사별이든, 혼자가 되면 어떻게든 재혼하거나 자식이 있다면 아들과 사는 것이 이 세상에 사는 여자들의 상식이었다.
“여기저기 휘둘리면서 오래 살았어요.”
오래 살았다는 말에 케이든이 한쪽 눈썹을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저보다도 몇 살 어린 여자가 할 소리는 아니라고 생각했겠지.
“아무튼…… 이제 더 이상 휘둘리고 싶지 않아요. 줄 것이 있는 힘 있는 사람이 되면 좀 덜 휘둘리겠죠.”
어차피 케이든은 여차하면 저를 죽일 원작의 흑막. 쓸모 있어지고, 쓸모 있어 보이는 게 나을 터였다.
“저를 쓰실 만큼 쓰시고, 쓸모 있는 사람이 되게 보내 주시면, 도움이 될 거예요.”
사실, 반역 전쟁이 일어난다고 해도 그에게 특별히 도움이 될 생각도, 그럴 수 있는 방법도 마땅히 떠오르지 않았지만…… 이렇게라도 말해 놓고 싶었다.
“그냥 제 옆에 머무는 게 저한테 더 도움이 된다면요?”
짙은 눈매가 태연하게 로하나를 또렷이 쳐다보았다. 알 수 없는 긴장이 그녀의 등허리를 타고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