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조금 숨을 돌렸을까, 노프탈의 다른 시녀들이 분주하고 들뜬 얼굴을 하고 들어왔다.
로하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축하연 같은 건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케이든은 듣는 척만 했을 뿐 별말이 없었다.
“안녕하십니까, 마님. 긴 여정에 피곤하셨지요?”
인상이 푸근하고 편안한 중년의 여인이 말했다. 가슴에 꽂은 핀이 그녀가 시녀장임을 보이고 있었다.
“괜찮네.”
“엘로이라고 합니다. 노프탈성 전체의 살림을 맡고 있습니다.”
빛이 바랬지만 고운 머리칼을 깔끔하게 올린 모양새가 우아했다.
“앞으로 필요한 것은 무슨 일이든 저한테 말씀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나도 잘 부탁하오.”
“그럼, 피곤하시겠지만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오늘 저녁에 결혼 축하 연회가 있는 것은 로하나도 알고 있었다. 이미 공작저는 주변의 모든 귀족들이 모인 듯 소란스러웠고 실내 공기는 차가운 초겨울이 무색하게 더울 지경이었다.
어제의 대화로 ‘하노버’가 환영받지 못한다고 알고 있었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들어오는 시녀들은 하나같이 엄청난 물건들을 끌고 왔다.
첫 번째 시녀가 드레스가 걸린 길고 높은 옷걸이를 하나씩 밀고 들어온 것에 이어서 눈앞에 드레스 행렬이 이어졌다.
각종 보석, 액세서리, 구두까지 들어오자 넓어만 보였던 응접실이 좁아 보였다.
“아…….”
“저희가 전하의 취향을 몰라서요…….”
엘로이 부인이 첫 번째 드레스 자락을 펼쳐 보이며 말했다. 보라색 벨벳에 갑옷같이 단단해 보이는 드레스 상의가 반짝이는 보석으로 은은하게 반짝였다.
“골라 보실까요?”
어제의 일로 무거워진 로하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화려한 드레스는 속없는 행렬을 계속했다. 은근히 냉랭한 시녀들의 얼굴이 빛깔 고운 실크에 비쳤다.
*
높은 피리 소리와 함께 웅장한 관악이 울려 퍼졌다. 아르드골드가 현악 위주의 음악이 발전한 것에 비해, 여기는 관악기까지 쓰는 교향악이 웅장했다.
대연회장의 높은 스테인드글라스는 실내의 불빛에 아름답게 일렁여 낮과는 다른 아름다움을 뽐냈다.
새로운 부부는 구름같이 푹신하고 따뜻한 모피로 덮은 의자에 앉아 반 층 아래의 홀을 내려다보았다.
히스의 인기는 여기에서도 여전해서 이렇게 저렇게 팔을 두른 채 귀족 영애들과 함께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로하나는 이상하게도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당장 칼이라도 내뽑을 듯 차가운 사람들의 눈길에 둘러싸여 있던 로하나는 히스와 눈이 마주쳤다. 히스는 조금 냉랭했던 태도를 희한하게 내려놓고 밝게 웃어 보였다.
“뭐가 마음에 걸리십니까.”
그사이 케이든의 낮은 목소리가 불쑥 들어왔다.
“아니요, 음식이 정말 맛있네요.”
로하나는 앞에 펼쳐져 있는 음식을 다시 둘러보았다. 주로 육고기 위주의 다양한 요리, 과일보다는 크림과 초콜릿 위주의 디저트들이 높다랗게 쌓여 있었다.
케이든의 미심쩍어하는 시선에 로하나는 일부러 웃어 보였다.
“공작님.”
“이제는, 케이든이라고 부르시죠.”
그는 무뚝뚝하게 말하면서 시선을 다시 무도회장으로 돌렸다. 로하나는 그런 케이든의 옆모습을 잠시 바라보았다.
“케이든.”
짙은 눈매가 다시 로하나를 향했다.
“앞으로 필요한 사항이나 하실 이야기가 있으면 저한테 직접 부담 없이 하세요. 못 미더우실 수도 있겠지만…….”
큰 보랏빛 눈동자가 케이든을 똑바로 응시했다.
“생각보다는 말이 통하실 거예요.”
로하나가 말을 이어 갔다. 빚을 갚기 위해서라고 차라리 말해 주었으면 우리의 불공정 계약을 내가 이해하기 더 좋았을 것을요, 하는 생각은 머릿속에만 우선 담아 두었다.
“저번 일도 저한테 굳이 덜 설명하실 것 없었습니다.”
케이든의 표정이 묘하게 굳더니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처음 보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죠.”
길고 곧은 손가락이 앞의 술잔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못 미덥지 않습니다.”
술잔을 살짝 기울이며 케이든이 답했다.
“당신이니까 제안한 겁니다, 이 모든 쇼를.”
둘의 시선이 복잡하게 얽혔다. 빚을 갚는 자의 깔끔한 매너인 건가. 로하나는 순간, 다른 마음을 가지려 했던 것에 고삐를 쥐어 잡으며 미소를 지었다.
“델클리프 공작님.”
그때 히스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이게 왔어.”
“뭔데.”
“다시 한번 축하한다며.”
케이든이 로하나에게서 눈을 떼지 않자 히스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이 선물들 받아 달라고.”
천장까지 닿을 듯한 선물을 가져온 시종 둘이 단상 아래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오렐리아 황후께서 보내신 물건들입니다.”
갑자기 등장한 이름에 케이든의 얼굴이 굳었다. 로하나 역시 지나친 행동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고작 며칠 전에 봐 놓고, 왜 굳이 선물을 다시 여기까지 따로 보내나.
이게 이 세계의 어장 관리 같은 건가. 옛말을 떠올리며 로하나는 싸늘한 눈으로 선물들을 바라보았다.
수도에서 흔히 귀한 선물을 할 때 사용하는 각종 집안 장식품과 정교하게 짠 레이스, 그리고 알 수 없게 포장된 물건들이 한가득이었다.
“그런데 이걸 어쩌라는 거지?”
태연한 미소를 짓는 케이든을 보며 히스 역시 가장된 살랑살랑한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받은 것을 확인을 해야, 저 두 사람이 집으로 돌아갈 거 아니겠습니까.”
선물을 가져온 시종 둘이 머리를 조아렸다. 케이든은 작은 한숨을 내쉬고, 알겠다며 두 사람을 물렸다.
로하나의 시선이 다시 먼 곳을 향했을 때였다. 케이든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손을 내밀었다.
“이제 그만 들어가시죠.”
연회에서 끝까지 자리를 지키는 것이 원래 법도였는데, 케이든은 수도에서의 깍듯한 예의는 버려둔 것인지 태연한 소리를 했다.
“아니에요, 피곤하지 않아요.”
케이든이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며 재차 손을 흔들었다. 로하나가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그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귓속말을 하듯 의외의 말을 귓가에 덧붙였다.
“아, 오늘은 제 방으로 가실 겁니다.”
*
케이든의 성격인 건지, 노프탈의 풍습인 건지 바르디와는 달리 케이든은 스킨십을 극도로 자제했다.
여태까지도 에스코트용으로 손을 잡거나 팔을 붙잡은 것 말고 특별한 표현은 없었다.
시녀들까지 시중드는데, 이렇게 방까지 함께 들어올 필요가 있었을까.
누가 봐도 계약인 결혼인 데다가 어제 있었던 화재 사건으로 로하나는 지금 모두의 혐오 대상이 되어 있었다.
굳이 인기 있는 영주가 그런 계약뿐인 아내와 같은 방에 들어가는 모습이 남에게 보기 좋을 리가 없었다.
‘무슨 생각이람.’
로하나는 얼떨결에 들어온 케이든의 내실을 둘러보며 생각했다.
내실은 생각보다 케이든다웠다. 화려하기보단 단정하고 고급스러웠다.
긴 원목 테이블과 깔끔하게 떨어진 모양새의 가구들은 오래되었지만 조금도 낡지 않은 모습이었다.
“긴 날 보내셨습니다.”
케이든이 예복 재킷을 벗은 채 응접실에 앉았다. 또다시 겨우 셔츠 차림이었다.
로하나는 그가 그 엄청났던 열기를 순식간에 꺼뜨렸던 순간을 떠올렸다. 사람 자체가 얼음인 듯 보였다.
“네…….”
로하나도 동의하며 마주 앉았다.
“저번 화재 사건도 있고…… 여러모로 신경 쓰이는 점이 많아서.”
조금 뜸을 들인 케이든이 입을 열었다.
“네……?”
“며칠은 여기서 함께 지내시죠. 이래저래 여기저기서 손님이랍시고 출입이 많은데……. 만전의 대비를 한다고 해도 불안하군요. 낮에 내가 없을 땐 히스가 붙어 있을 겁니다.”
케이든의 날카롭고 깊은 눈매에 음영이 도드라졌다.
“히스 님이요.”
“네.”
“여기서 침소를 사용하라 하면…….”
“걱정 마십시오. 여기도 침실은 여러 개 있습니다.”
“……네.”
로하나는 잠시 쉬다가 다시 말을 꺼냈다.
“하노버 공작가와 결혼하시는 게, 생각보다 위험 부담이 크신 거였나 봐요.”
케이든 델클리프가 굳이 하노버 공작가와 정략결혼을 한 것이 정치적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의 이득이 있을지, 빚을 갚고 싶었던 것인지.
대놓고 묻고 싶은 심경이었지만, 로하나는 말을 아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으로 무엇을 받을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런가요.”
“화재 사건도 그렇고…… 주변 분위기가 좋지 않던데……. 폐하나 제국 입장에서는 원치 않겠지만 차라리 샤톤웰과 결혼하시는 것이 공작님께는 더 유리했을 것 같은데요.”
그럼에도 주저리주저리 말이 길어졌다.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고 싶어.’
로하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던 케이든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로하나 당신한테 정치적 충고까지 부탁한 적 없습니다.”
순식간에 냉랭해진 눈빛과 차가운 미소가 그녀를 향했다. 얼어붙은 분위기에 로하나도 흠칫했다. 태연한 얼굴은 그가 황제 앞에서 짓던 것과 비슷했다.
“네.”
순간 긴장을 하자 마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무튼, 하노버 공작가에 원하시는 게 있다면 가급적 저에게 직접 말씀해 주세요.”
결국 로하나도 다시 우회하고 말았다.
“계약대로요.”
로하나의 눈이 남자의 흑안과 마주쳤다.
“저도 계약대로 독립하는 게 가장 큰 목표고, 전쟁이라도 나는 것은 공작님과 마찬가지로 절대 원치 않아요.”
원작에서는 왕좌를 노리지만, 지금의 그는 그래 보이지 않았다. 로하나는 속을 가늠할 수 없는 계약 남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제가 계약대로 하지 않을까 봐 걱정하는 사람의 말처럼 들리는군요.”
순간, 로하나는 아차 했다. ‘공작님과 마찬가지로.’라는 말이 저도 모르게 강조되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비꼬는 것처럼.
“그게 아니라…….”
“당신까지 내가 반역할 것을 걱정하는 줄 몰랐네요.”
냉정한 목소리가 말을 끊었다.
“네? 아니, 전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
“계약은 간단합니다. 당신은 미드 서머까지 그저 내가 하라는 대로 하면 되는 것이고, 그 후엔 내가 약속대로 보내 줍니다. 원하는 자금도 드리면서.”
몸을 깊숙이 로하나 쪽으로 기울였던 케이든이 여유 있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제국의 평화를 위해서인 것도 맞아. 당신 부친이라는 작자를 믿을 수가 있었어야지.”
그의 입장에서 그 이야기도 영 틀린 소리는 아니었지만. 로하나는 지금이라도 저가 아는 진실의 일부를 털어놓을까 고민했다.
말을 할 듯 하지 않는 로하나를 쳐다보던 케이든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리큐어 테이블로 가 크리스털 잔에 술을 채웠다.
“쉬십시오. 내일 낮부터는 히스가 옆에 있을 겁니다.”
로하나가 뭐라고 더 말을 하기도 전에 공작은 술잔을 든 채 옆 침실 문을 닫고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