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그녀가 본관에 도착하자 트루디 백작 부인은 깊은 내공의 소유자답게 침착한 얼굴로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있었다.
“백작 부인.”
로하나가 인사를 하자 트루디가 조금 놀라는 눈치였다.
“저 사람인가요?”
“부인!”
트루디가 황급히 저지했지만, 한 여인이 로하나를 향해 걸어왔다.
“댁입니까, 그 하노버가?”
눈물로 범벅이 된 여인은 누가 보아도 유족으로 보였다.
“패트리시아!”
“그래, 그렇소만…….”
“하! 그렇소만?”
뒤이어 눈물짓던 모든 사람들의 눈이 칼처럼 로하나에게 고정되었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나 때문에 났구나, 이 사건.’
케이든이 그래서 경위를 설명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하자 머리가 지끈했다.
“공작 부인, 저와 이야기 좀 하시죠.”
하다 하다 자기 아들까지 잡아갔다는 말이 트루디의 말을 덮으며 귀에 꽂히는 순간, 트루디는 로하나에게 다급한 눈짓을 해 그녀를 옆방으로 안내했다.
그녀가 서둘러 두꺼운 문을 닫았지만 밖의 소란은 계속 들렸다.
“공작 부인, 몸은 좀 어떠세요?”
트루디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그녀에게 질문했다.
“어제 불…… 저 때문인가요. 그 습격도?”
트루디의 충혈된 눈이 곤란한 빛을 띠었다. 그녀가 손에 들고 있던 종이에 사람의 얼굴과 이름이 보였다. 젊다 못해 어린 남자였다.
마음이 바닥까지 툭 떨어졌다. 로하나는 어린 시절 잃었던, 이제는 얼굴조차 어쩐지 아득한 유모가 떠올랐다.
그때 반대편 복도를 통해 너르고 강한 발걸음이 들렸다. 케이든은 어둡고, 피곤해 보였다.
“델클리프 공작님.”
트루디가 깊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케이든은 트루디의 인사를 받으며 로하나에게 눈인사를 했다.
햇빛 아래에서 보니 더더욱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그 아이야.
“어젯밤에도 거의 주무시지 않고 고생하셨는데…… 지금이라도 좀 쉬시는 게 어떠세요?”
케이든은 크루디가 건넨 명단에 시선을 고정했다.
“아니, 재산 피해 및 인명 피해는 내가 모두 처리하도록 하지. 미안하게 되었네.”
트루디가 공손히 인사를 하고 나가자 넓은 방에는 둘만 남았다.
로하나는 겨우 말을 골랐다.
“밤에 계속 바쁘셨나 봐요.”
로하나가 입을 떼자 케이든이 대답했다.
“아주 잠깐이었습니다. 걱정하실 것 없…….”
“그런 게 아니라…….”
그런 게 아니었다.
로하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뗐다. 그때의 소년은 곧 죽어 가는 새 같았다. 지금의 모습과는 너무 달라.
같은 사람이라면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로하나.”
말 없는 그의 시선에 로하나가 말을 멈추었다. 로하나는 차라리 좀 더 쉬운 질문을 먼저 하기로 했다.
“이 사건…… 저 때문에 난 건가요?”
로하나의 질문에 케이든은 난처한 듯 미간을 좁혔다.
“당신 때문이 아닙니다.”
“…….”
믿지 않는 로하나의 눈을 보며 케이든은 한숨을 내쉬었다.
“왜…… 요? 누가?”
누가, 왜?
아까 울부짖던 여인의 목소리가 떠나질 않았다.
로하나의 복잡한 얼굴을 본 케이든은 이내 결심한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마, 이런 일이 또 있을 수도 있습니다.”
케이든이 주머니에서 검은 금속 조각을 꺼내 로하나에게 건넸다.
“이게 뭔가요?”
“Rangers of the Damned. 저주받은 레인저들입니다.”
로하나가 시선을 들었다.
“극단적 친마력 단체죠. 마력자들을 위한 무력 단체입니다.”
보라색 눈동자가 커졌다.
“그렇다면…….”
“수도에서는 아직 세를 불리고 있지 못한 점조직 단체입니다. 저와는 적이자 동지이죠.”
“황궁에선…… 폐하는 알고 있습니까.”
“바르디, 현 황제가 아는지 저도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아마 알고 있을 겁니다.”
로하나는 그제야 이해가 갔다. 로하나는 하노버였다. 할아버지 때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카르크족 소탕’의 우두머리. 대부분의 차별법도 그들이 제정한 것이 많았다.
“그렇군요.”
알고는 있었지만, 들은 적도 본 적도 없어 잊고 살았다.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하노버라서, 제가.”
“당신 잘못이 아닙니다. 앞으론 보안을 훨씬 더 강화할 테니까.”
그렇다면 더더욱 이 결혼 계약은 불공정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빚을 갚으려는 것일까, 그때의?
그때 케이든이 갑자기 거리를 좁혔다. 조심스럽게 팔을 들자 망토 속에 가려져 있던 넓은 어깨와 가슴이 드러났다.
검은 가죽 장갑을 낀 크고 긴 손이 천천히 다가오더니 로하나에게 걸쳐진 진한 먹색 망토를 여몄다.
“여긴 날이 훨씬 춥습니다.”
로하나가 돌아보았을 땐 케이든은 이미 현장으로 발걸음을 옮긴 후였다. 로하나는 깔끔하게 걷는 그의 뒷모습을 끝까지 바라보았다.
*
콰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해상에서 다시 큰 바다 물결이 몰려왔다. 수도에서 어쩌지 못하는 공중 공격이라니, 기가 찼다.
브란드 하노버는 매번 저 멀리 있는 공격을 보고하는 데 학을 뗐다.
그때마다 젊은 황제는 분노하며 어쩔 줄을 몰랐다.
서부 담당 부디에르와 남부 담당 프란츠까지 모여 있는 회의실로 향하는 길을 걸으며, 브란드는 생각했다.
“브란드 하노버.”
뒤에서 부르는 소리에 브란드가 돌아보았다. 부디에르가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다가왔다. 브란드의 낯빛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폐하께 일단 대피를 말씀드려야겠네.”
“대피라뇨?”
브란드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서부 담당 부디에르가 연신 초조한 듯 입술을 뜯었다.
“델클리프가 노프탈로 떠나자마자 공격이 다시 시작됐어. 그리고 알다시피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지 않은가.”
브란드는 용기를 내 말을 이었다.
“할 수 있는 게 없으면 지금이라도 어서 델클리프 공작에게…….”
“지금 델클리프에게 도움을 요청하자는 건가?”
부디에르가 눈을 번쩍거리며 물었다.
“델클리프가 있는 노프탈도 아르드골드입니다. 가능하다면 거기의 힘이라도 빌려야지요. 이건 누가 보아도…….”
브란드는 한층 목소리를 낮췄다.
“마력의 소행이지 않습니까.”
제 누이는 상상도 못 할 비밀. 제 아버지가 저에게만 은밀히 말로써 전했던 마력의 존재를 이렇게 눈으로 보게 된 것이 여전히 현실 같지가 않았다.
“자네 누나가 거기와 결혼한 건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만, 그쪽 족속은 믿을 게 못 되네.”
“언제까지 그런 말도 안 되는…….”
발끈하는 브란드를 펠스가 가로막았다.
“폐하는 아직 어리고 경험도 없네. 이렇게 불안한 상황인 걸 곧이곧대로 보고했다간 우리 목이 안전하지 못해.”
부디에르의 말에 프란츠도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래서 어쩌자는 겁니까.”
“자네가 있는 남쪽으로 모시려고 하네. 우선 수도를 비우고, 그사이 전략을 도모하지. 이대로는 너무 위험해.”
“저 빼고 제 거취를 이야기하시는 겁니까.”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모두가 펄쩍 뛰었다. 뒤를 돌아보자 황제가 서 있었다. 새파란 눈이 어느 때보다 빛났다.
“폐하!”
부디에르가 놀라 엎드렸고, 나머지들도 고개를 허리까지 숙여 굽혔다.
“수도가 위험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계신 겁니까.”
“송구합니다.”
부디에르에 이어 프란츠가 말을 이었다.
“폐하, 이유를 알 수 없는 공격이 계속되고, 사실상 저희는 영공을 수비할 능력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당신 영지로 가면 영공을 보호할 수 있고?”
차가운 질문에 프란츠도 입술을 깨물었다. 답이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노프탈로 가시죠.”
그때 여리디여린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황후 폐하.”
브란드가 고개를 다시 한번 숙였다. 반짝이는 금발을 허리까지 늘어뜨린 황후, 오렐리아가 바르디 뒤에서 나타났다.
“여기에서 영공 수호가 가능한 건 노프탈밖에 없지 않나요?”
사실이었다. 델클리프가 마력으로 하늘을 어느 정도 다스린다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쉬쉬하는 전설 같은 이야기였지만 진짜 관계자들은 그것이 뜬소문이 아님을 알았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곳은…….”
“부디에르, 당신이 오렐리아보다 생각이 부족할 줄은 몰랐네.”
바르디가 비아냥 섞인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노프탈로 간다.”
모두가 엎드려 다시 인사를 했다. 오렐리아는 바르디의 팔짱을 끼며 다소 놀란 장군들을 돌아보았다.
노프탈로 이렇게 일찍 가게 될 줄이야. 초조하면서도 흥분되는 마음에 오렐리아는 작은 손을 꼭 쥐었다 폈다.
*
노프탈의 델클리프성을 보고 로하나는 말문이 막혔다.
끝도 없이 넓게 펼쳐진 높다란 성벽의 요새에 군인들이 성실하게 배치되어 있었고, 성주 부부가 지나가는 자리에는 함성이 가득했다.
영지 내의 시내는 거의 아르드골드 수도만큼 붐볐고, 뾰족한 첨탑 형식의 건축이 돋보였다. 원작에서 말하던 살벌하고 음습한 분위기와는 너무 달랐다.
다만 같았던 것은 한 가지, 새카만 흑요석으로 두른 외벽이 공작저를 블랙 캐슬이라는 이름대로 보이게 했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빛나고 있는 길고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는 보석같이 눈이 부셨다.
“피곤하실 거다. 어서 방으로 모시어라.”
케이든의 명령에 수십 명의 시녀들이 칼같이 움직여 로하나 주위를 둘러쌌다. 늘 그렇듯 주위를 살피는 눈매가 날카로웠지만 그래도 성에 도착해서인지 긴장을 조금 놓은 눈치였다.
“감사합니다.”
로하나가 대답했다. 물이 비치듯 매끈한 석조 계단을 따라 올라간 로하나는 자신이 지낼 방으로 안내되었다. 어마어마한 도서관으로 보이는 내실이 중앙 계단 중심에 보였다.
내실은 짙은 원목 가구에 연한 크림색과 짙은 네이비색 벨벳으로 마무리된 가구와 커튼이 조화를 이루었고, 높고 긴 창문 유리 사이로 따뜻한 햇볕이 밀고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