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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일 흑막과의 계약결혼-35화 (35/125)

35

“잠깐만요.”

케이든은 로하나가 붙잡은 손을 낯설게 내려다보았다.

“어디 가세요.”

“저는 밖에…….”

“밖에서 더 처리할 일이 있나요.”

“……아니요. 응접실에 있을 겁니다. 바로 문 앞에.”

“공작님 내실로 가시는 건 아니고요?”

“응접실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는 건 아직 위험합니다.”

“그 둘이 많이 다른가요?”

“뭐…… 그냥 제 선호입니다.”

로하나는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똑똑히 말했다.

“그럼 여기서 쉬세요.”

케이든의 여유롭던 눈이 천천히 깜빡였다.

“여기서 쉬라는 게…….”

“여기서 쉬세요.”

“그럼 로하나 당신은.”

“저는 뭐요?”

로하나가 문을 탁하고 닫자 밝던 바깥 빛이 차단되고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아무 이야기도 해 주지 않겠다면 자신이 직접 알아내면 될 일이었다.

로하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계약을 위해서라도 저희 둘 다 건강하게 잘 살아 있어야죠.”

로하나가 케이든의 손을 잡아끌자 뿌리치지 못한 케이든이 천천히 따라왔다.

케이든을 침대에 앉힌 후, 로하나는 건너편에 먼저 누웠다. 유리창 너머 바람 소리만이 적막을 채웠다.

로하나가 조심히 뒤를 돌아보자 케이든이 그대로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날카로운 콧대와 턱의 그림자만이 달빛에 비쳐 보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약 때문인지 몽롱한 기운이 로하나를 덮쳤다. 저도 모르게 잠이 들었던 로하나는 깜짝 놀라 눈을 떴다.

다시 숨을 못 쉴 것처럼 숨이 막혔다. 반사적으로 놀란 몸은 또다시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때였다.

케이든이 보였다.

로하나는 천천히 다시 눈을 감았다 떴다. 불규칙하게 뛰던 심장 박동이 규칙성을 찾아갔다. 떨리던 손도 멈췄다.

안심이 되었다.

곱게 감은 날카로운 눈매에 은회색 머리가 흐트러져 있었다.

로하나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사그락대는 시트 소리가 너무 커 다가가던 손을 다급히 멈췄다.

약 기운에 몽롱해 다시 잠이 들려는 의식의 끝에서 가만히 누워 잠든 케이든의 얼굴을 쳐다볼 때였다.

기묘한 익숙함이 이상했다.

달빛에 비친 얼굴.

순간, 발끝에서부터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이럴 수가.’

그녀가 양손으로 다급하게 입을 막았지만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

케이든은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나왔다.

어떻게 잠깐 잠이 들 수 있었는지 본인의 태연자약함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도 모르게 긴장이 풀어지고 말았다.

‘기가 막히는군.’

커다란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며 칼을 다시 찼다. 새파란 금속의 날이 섬뜩하게 번뜩였다.

아직 깜깜한 밤, 바깥에는 히스를 중심으로 두 명의 전투원인 이즈와 갈레드가 서 있었다.

다른 수하들은 몸을 숙여 조아리고 있다가 케이든이 눈빛으로 그들을 물리자 다행이라는 듯 재빠르게 사라졌다.

“자객 확인은.”

검은 눈빛이 서늘하고 살벌했다. 고요한 목소리였지만 오래된 동료라면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케이든의 화난 모습에 히스까지도 마음이 움찔했다.

“들고 난 사람은 절대, 저얼대 없었습니다요. 모두 신원 확인 불가의 사람들이어요.”

갈색 곱슬머리의 청년 갈레드가 대답했다. 정말 없었다는 듯 억울함이 배어 나왔다.

“원래 계획은 암살이었던 걸로 보입니다. 아마 전하께서 메인 히트 맨을 사살하자 남은 백업 대원 중 누군가가 방화를 한 것 같아요.”

이즈가 똑똑하게 보고했다.

“시발점은?”

케이든의 질문에 이번에는 히스가 대답했다.

“레이디의 방 바로 앞 시종 침실입니다.”

히스의 손이 3층 서쪽 맨 끝 방을 가리켰다.

“충동적이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뭔가 서툽니다.”

케이든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방화 같은 건 저희에게 별 소용이 없죠. 물론, 조금 늦었다면 좋지는 않았겠지만.”

이즈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백금색 칼단발이 흔들렸다.

“R. D.는 특히 공작님의 능력을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 불로 공격한다는 건 이상하죠.”

히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도대체 왜 그랬다는 거야.”

갈레드가 답답한 듯 머리를 벅벅 긁었다. 곱슬머리가 한층 더 흐트러졌다.

“칼로 살해하는 게 불가능해지자 불이라도 지른 거지, 뭐긴 뭐야.”

이즈가 핀잔을 주었다.

“전하, 이 시점에서 뭐 하나만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갈레드가 인상을 쓰며 덧붙였다.

“노프탈 독립 이야기까지 나오는 마당에 애초에 왜 굳이 하노버랑 결혼 같은 걸 하셔서…….”

쾅 하는 소리와 함께 갈레드의 말이 멈춰졌다. 테이블을 내리친 이즈가 경고의 눈길을 보냈다.

케이든은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갈레드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

‘앞으로 어떻게 한다.’

“정리하고 들어가지.”

사람들을 물리면서 케이든은 다시 제 침소로 돌아갔다.

로하나는 약 기운 때문인지 깊게 잠들어 있었다.

케이든은 누워 있을 때 그녀가 제게 손을 뻗으려 했던 것을 떠올렸다.

한참을 그렇게 자신을 바라보던 것도.

케이든은 로하나의 옆에 앉아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도자기 같은 볼에 거친 손이 닿았다.

케이든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녀는 꼭 그때처럼 잠들어 있었다.

천사인가 했었다.

죽었으니 데리러 온.

케이든은 조심스럽게 옆에 누웠다.

닿을 듯 닿지 않는 거리의 그녀를 눈에 담았다.

사람을 죽이는 모습을 보인 것보다 피투성이가 된 자신을 다시 본 그녀가 혹여 그를 알아볼까 봐.

기억해 낼까 봐 괴로웠다.

*

달이 지고 새벽빛이 파르스름해져 갈 때였다. 차가운 이슬이 이파리와 두 소년 소녀의 어깨에도 내려앉았다.

번쩍, 엄청나게 긴장한 채 눈을 뜬 소년이 화들짝 놀라 주위를 돌아보니 웬 소녀가 앞에 앉아 있었다. 그제야 어젯밤의 조우가 사진첩을 보듯 잇따라 떠올랐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소녀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열렸다.

보랏빛 눈동자가 소년을 향했다.

“좀…….”

새벽이라 목이 잠겼다.

“어때?”

“너, 뭐야?”

소년은 몸을 최대한 로하나에게서 떨어뜨리며 물었다. 화들짝 놀란 눈은 금방 적대심으로 가득 찼다.

“움직일 수 있겠어?”

로하나의 말에 소년의 눈이 그녀의 머리카락과 눈을 빠르게 훑었다. 로하나는 그런 소년을 가만히 기다렸다.

순간, 제 몸에서 쏟아지던 피가 멈춘 것을 눈치챈 소년이 미간을 깊게 구겨졌다.

“어떻게 상처를…….”

로하나의 얼굴이 환해졌다.

“……괜찮아진 거 맞지? 다행이다.”

어쨌든 너무나 다행이었다.

“뭐?”

“여덟 살 꼬맹이 힘도 쓸모가 있네.”

어린아이의 지압으론 어림도 없을 상처였는데 정말 다행이었다.

“너 뭐야.”

경계가 가득한 소년이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그건 중요하지 않을 것 같고.”

로하나는 숨소리만 겨우 내며 소년에게 조용히 하라고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 댔다.

“어떻게 할 셈이야? 도망치던 중이야?”

소년의 새카만 머리카락 밑으로 날카로운 눈이 번뜩였다. 흑안이 달빛에 차갑게 빛났다.

“나가야 해.”

소년이 억지로 몸을 일으키자 입술 사이에서 절로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작고 마른 몸이 휘청거리자 로하나가 놀라 손을 뻗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소스라치는 뿌리침이었다. 그럼에도 그의 시선은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곧 추격대가 올 걸 기대해야 하나?”

소년의 말에 로하나는 고개를 저었다.

굳이 그럴 생각이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보던 소년은 제 옆구리를 다시 한번 살피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다시 로하나를 바라보았다.

가쁜 숨을 고르면서 심호흡을 한 소년이 허리를 펴며 이해 못 할 소리를 남겼다.

“들키지 마, 절대. 아무한테도.”

“뭘 들키지 마?”

들키지 말라니?

무엇을?

“네가 지나갔다는 거?”

아무 말 없이 그렇게 한번 돌아본 소년은 그길로 절뚝이며 도망쳤다. 달빛이 밝은 날이었다.

*

아침에 일어나 보니 케이든이 없었다.

로하나는 어쩐지 가슴이 휑한 걸 무시하며 일어났다. 어젯밤의 충격이 다시 거세게 머리를 강타했다.

분명 그 아이였다.

‘그렇지만…….’

로하나는 머리를 감쌌다.

‘분명 머리 색도 다르고……. 어떻게 누가 델클리프를…….’

혹시 약에 취해 단단히 착각을 한 게 아닐까. 준비를 마치고 문밖을 나서는데 히스가 서 있었다.

“레이디, 좀 어떠십니까.”

어젯밤 화재 속에서 히스가 저를 붙잡아 주었던 걸 떠올라 로하나는 저도 모르게 반색을 했다. 히스도 이상하게 그녀에게만 냉랭하던 얼굴이 조금 풀어진 듯도 했다.

“히스 경은요?”

“이제는 하대하셔야 합니다.”

로하나는 별말 없이 짧게 미소를 지었다.

“이쪽으로.”

밖은 잔뜩 가라앉아 있었다. 자객 외에도 저택에서 한 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고 했다. 로하나는 마음이 납처럼 무거워졌다.

“저…… 공작님은…….”

“공은 지금 본관 화재 현장에 가 계십니다.”

그렇겠지.

로하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떠오른 생각이 거짓말 같기도 했다. 너무 놀라서, 약 기운에 취해서 착각한 것 아닐까.

“이제 제가 옆에서 계속 같이 있을 겁니다. 공께서 어제 화가 많이 나셨어서…….”

히스가 설명했다.

“화가 많이 났다고요?”

“설마 불이 날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거든요.”

“그렇군요.”

잠시 망설이던 로하나가 이번엔 히스에게 물었다.

“어제 일은…….”

로하나가 미간을 찌푸렸다.

“자세한 이야기는 전하께 들으시면 될 것 같습니다.”

히스가 조금 난처해하며 부드럽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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