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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은 조용했다. 조디는 다행히 별다른 외상은 없다고 했다.
“고맙습니다.”
로하나는 한참을 조용히 조디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로하나를 닮은 흑갈색 머리카락이 창백한 얼굴과 대비되었다.
처음 만난 날부터 이상하게 마음이 더 쓰였던 동갑내기 친구였다. 조디는 항상 밝고 긍정적이었다. 넉살도 좋았고.
알고 나면 얼굴을 마주하지 못할 것 같아 겁이 나, 아버지가 무슨 짓을 했는지 다 묻지도 못했었다. 로하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델클리프 공작 부인.”
트루디 파인체이서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이제 들어가서 쉬시지요.”
트루디의 얼굴은 아까보다 많이 흐트러져 있었지만, 그래도 주인으로서의 침착함을 놓지 않고 있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난감하고 미안한 기색이 역력한 그녀를 보며 로하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본관은 화재로 쓸 수가 없게 되어 조금 떨어져 있는 별채로 옮긴 차였다. 화마가 이쪽까지 미치지 않은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짐이 다 옮겨진 모양이었다. 건질 수 있는 것도 거의 없었겠지만 그거야 아무래도 좋았다.
얇은 잠옷에 튄 피가 말라붙어서인지 움직이자 느껴지는 옷의 감촉이 소름 끼쳤다.
파인체이서의 시녀들에게 조디를 맡기고 방 밖으로 나왔다. 문 앞에서는 한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백작 부인은 조용히 목례를 올리고는 먼저 자리를 떴다.
“로하나.”
검은 망토까지 두르고 있어서인지 평소보다도 케이든의 어깨가 더 넓어 보였다. 남부에서는 셔츠 한 장만 달랑 걸쳤던 것에 비해 지금은 단단한 갑주를 두른 모습이었다.
“공작님.”
로하나가 작게 대답했다. 케이든은 더 이상은 아무 말 없이 한쪽으로 그녀를 안내했다. 케이든의 뒷모습을 보며 로하나는 급격히 긴장이 풀리는 걸 느꼈다.
“이쪽으로…….”
케이든이 방문을 열더니 따라 들어오며 문을 닫았다. 앞서 걸어 들어간 시녀들이 차분하게 물을 준비해 주고 나갔다.
“저…….”
응접실 소파에 앉아 바닥에 칼을 내려놓는 케이든을 보며 로하나도 힘없이 따라 앉았다.
시녀들이 따라 들어왔다.
“먼저 씻으십시오.”
케이든이 망토와 갑주를 잇따라 벗더니 아무렇지 않게 옆으로 내려놓았다. 넓은 가슴에 땀과 피에 젖은 셔츠가 달라붙어 있었다.
“이제는 제가 옆에 있을 겁니다.”
평소답지 않게 행동이 조금 느려진 로하나가 욕실로 들어간 후에야 케이든은 참고 있던 한숨을 내쉬었다. 손에는 작고 검은 금속판으로 만든 펜던트가 쥐어져 있었다.
아름다운 글씨체로 새겨진 펜던트를 바라보며 케이든은 파인체이서 백작저의 화재를 눈치채기 직전의 상황을 다시 떠올렸다.
*
<배후.>
케이든이 서늘한 눈으로 칼을 들이대며 말했다. 복면을 한 여자 뒤에는 남자 둘이 이미 목숨이 끊어진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여자는 케이든의 칼 앞에서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알면서 또 물으시네.>
케이든이 인상을 썼다.
<대세를 거스르지 마시게, 젊은 왕. 뭘 망설이십니까.>
그 순간이었다. 무언가가 갑자기 불편한 듯 여자의 입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다.
케이든이 망토로 시야를 가리자마자 여자의 몸이 순식간에 폭발했다. 무거운 망토에 무거운 피가 튀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검은 눈이 매섭게 주위를 훑었다. 그때 잔해 속에서 검은 금속이 눈에 띄었다.
케이든은 장갑을 낀 손으로 그 금속 조각을 집어 들었다.
혹시 몰라 저녁도 거르고 주변을 순찰하다가 발각된 인간들이었다. 집요하게 최선을 다해서 도망치는 그들을 붙잡고 나서야 불현듯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R. D.의 공격이야 늘 있는 일이었다. 카르크족이 아닌 자들은 모두 죽이겠다는 마력자들의 모임.
케이든은 그들을 가끔은 막아 가며, 가끔은 손을 잡아 가며, 그렇게 노프탈을 안정화시켜 갔다.
그러면서 어떻게 카르크족을 섞여 살게 할 수 있을지 고민하며 ‘적절한 때’를 찾은 지 15년이었다.
R. D.에게 그런 케이든의 고민이 마음에 들 리 없었다. 특히 하노버 공작가와의 결혼은 아린족과 타협하는 것처럼 보였을지도 몰랐다. 그의 의중과는 상관없이.
이런저런 상황을 다 고려한다고 해도 석연치가 않았다.
그들이 파인체이서 백작가에서 머문다는 것은 극비였다. 마부조차 그를 따라오면서야 겨우 정확한 목적지를 알았는데.
이들은 파인체이서 백작가에 생각보다 빨리 접근했다.
이렇게 빨리 자객을 마주한다는 건…….
케이든이 남은 위스키를 털어 마셨다.
‘중간 기착지가 생각보다 일찍 노출되었을 수도 있다는 것.’
큰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자 얼굴에 달라붙은 피 조각이 기분 나쁘게 떨어졌다.
“공작님, 목욕 준비되었습니다. 상처도 있으실 텐데 도와드릴까요?”
“아니, 괜찮아.”
“도와드리지 않아도…….”
“나가라고.”
케이든이 미간을 누르며 낮은 목소리로 으름장을 놓자 시종들은 서둘러 몸을 내뺐다.
지금은 제국의 예의를 지킬 기운이 남아 있지 않았다. 어차피 수도도 아니었으니 서서히 그럴 필요가 없어지고 있기도 했고.
*
로하나가 욕실에서 나오자 케이든은 이미 흰 실내복을 입은 채 창가에 서 있었다. 이렇게 보니 좀 전까지 갑옷 차림의 피투성이 모습이 상상이 안 되었다.
그때 인기척을 느낀 케이든이 로하나 쪽을 쳐다보았다. 깊고 서늘한 눈에 로하나는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좀 괜찮으십니까.”
케이든이 긴 다리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낯설 만큼 거리가 가까웠다.
“네.”
로하나의 담백한 대답이 못 미더운 듯 케이든이 찬찬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맥박이 빨라지는 것만 같았다.
그때 차갑고 긴 손가락이 조심스럽게 로하나의 손을 잡았다. 반지를 끼고 있는 손이었다.
“혹시 정신없어서 잃어버릴까 봐…….”
로하나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뺄까 말까 망설이다가, 어쩐지 반지를 빼기에는 뭔가가 불안해서 그만둔 참이었다. 케이든은 그녀의 왼손을 잡고는 놓지 않았다.
“그…….”
로하나가 손을 슬그머니 빼며 시선을 피했다.
“괜찮으십니까.”
케이든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네……. 공은요?”
로하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을 했다.
“전 괜찮습니다. 앉으시죠.”
믿지 않는 듯 가만히 내려다보던 케이든이 자리를 권했다. 그의 손에 들린 크리스털 잔에는 호박색 액체가 담겨 있었다. 마주 보고 앉은 둘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리고 시녀장이 조심스럽게 찻잔과 주전자를 가지고 들어와 내려놓았다.
“의원이 내온 약차입니다. 다 드시고 주무셔야 합니다.”
케이든이 설명을 덧붙였다.
“네.”
로하나는 찻잔을 잠깐 보고 다시 케이든을 쳐다보았다.
“그…….”
그리고 해야 할 질문을 했다.
“어떻게 된 거죠?”
내내 생각을 정리했지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단순히 불이 ‘난 것’이 아니었다. 그 자객들은 정말로 로하나와 모든 일행을 해칠 생각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마음에 걸리던 것이 있었다. 저녁 식사 시간에 말했던 파인체이서 부인의 한마디. 많이 걱정되지 않냐고 했었다.
무엇을 걱정해야 했던 걸까.
“……앉으시죠.”
조금 망설이는 듯하던 케이든이 입을 뗐다. 자리에 앉고도 케이든은 말이 없었다.
로하나의 눈에 길고 곧은 케이든의 손가락이 들어왔다. 자세히 보니 상처 자국이 가득했다. 오래된 상처 자국이었다.
“아까 보신 것은…….”
케이든의 깊은 눈이 로하나와 마주쳤다.
“마력입니다, 당연히.”
로하나는 마른 입술을 저도 모르게 꾹 눌렀다.
“물론 비밀입니다. 제가 이런 능력을 쓴다는 것은…… 공식적으론. 애초에 마력의 존재를 수도에서는 전설처럼 쉬쉬하고 있으니 당연한 얘기겠죠.”
케이든이 긴 손가락을 들어 찻잔을 기울였다. 따라진 따뜻한 차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이제 노프탈에 다 오셨으니 이 정도는 언젠간 아실 일이었죠.”
“수도에서는…….”
“수도에서도 물론 알고 있을 겁니다. 굳이 아는 척하지 않는 것일 뿐.”
케이든은 따뜻한 차는 내버려 두고 들고 있던 크리스털 잔을 기울였다.
“인정하게 되면 저와 싸워야 하는데 그쪽은 아직 그럴 필요는 못 느끼는 거겠죠.”
로하나는 그가 원작대로 술을 많이 마신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럴 자신이 없거나.”
케이든이 입술의 한쪽 끝만 올리며 쓰게 웃었다.
“이 정도로 마력을 많이 사용한 것은 저도 오랜만입니다.”
로하나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럼 도대체 누가 왜 여기에서 저희를…… 공격한 거죠?”
침묵이 흘렀다.
“도대체 누가, 왜 불을…….”
로하나의 질문에 케이든이 술잔을 살짝 흔들었다.
“아니…… 불뿐이 아니라…….”
로하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사람이 죽는 것을 처음 보았다. 엄밀히 말하자면 저 자신을 제외한 다른 사람이 죽는 것을 처음 보았다.
타인의 피가 등에 쏟아지던 그 느낌이 다시 떠올랐다. 등이 오싹해졌다.
“오늘 꼭 이야기하지 않아도 됩니다.”
“아니요.”
로하나가 다시 눈을 바로 떴다.
“알려 주세요. 저도 알아야죠.”
케이든은 단호한 로하나를 조금 곤란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하노버 공작가에 대한 분노가 생각보다 큰 것 같습니다. 아린족의 머리 같은 가문이니까.’
그러나 케이든은 이 말을 삼켰다. 제아무리 제 친정과 척진 그녀라고 해도 이 정도의 현실을 감당할 수 있을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오늘은 쉬시죠.”
침묵 후에 케이든이 입을 뗐다.
“지금은 쉬셔야 합니다. 사람 죽는 것은 처음 보지 않으셨습니까. 그거 생각보다 별로일 겁니다.”
로하나가 입을 떼기도 전에, 케이든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로하나의 침실로 들어섰다. 로하나가 뒤를 따르려는 찰나, 케이든이 다시 침실 밖으로 빠져나왔다.
“안에는 이상 없습니다. 저는 밖에서 쉴 테니 침실을 사용하시면 되겠습니다.”
케이든이 말을 끝마치고 로하나를 지나쳐 스치는 순간에, 그녀가 강하게 케이든을 붙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