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
<제발 누가 좀 도와줘요.>
그러나 아무도 그녀를 돕지는 못했다.
로하나는 단단히 결심을 한 채 다시 제 방으로 달려갔다. 작은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달리는 속도가 지체되지는 않았다.
죽어 보았기에 알 수 있다.
저 소년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다는 것을.
여덟 살의 로하나는 맨발로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거즈랄 게 있을 리가 없으니 베개 시트와 침대 시트를 미친 듯이 걷어 냈다. 작은 손으로 커다란 시트를 겨우 벗겨 냈다.
전력으로 달려 도착한 곳에는 검은 머리의 소년이 더욱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압박에 압박, 누르고 있던 데에서 다시 피가 배어 나오면 다시 천으로 감고, 다시 덧대고, 다시 압박.
뼈밖에 없는 몸에서 왜 이렇게 피가 많이 나는 거야.
얼마나 반복했을까.
별안간, 뭔가가 달라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도무지 소용없어 보이던 그녀의 치료법이 갑자기 효과가 있었는지 기다려도 피가 새어 나오지 않았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상처 부위를 살피려는데.
움찔.
소년이 움직였다.
너무 심하게 붓고 일그러져 알아보기 힘든 얼굴에서 낮고 쉰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침묵이 흘렀다.
<좀…… 괜찮아?>
순간 로하나와 눈이 마주친 소년이 기겁을 하며 몸부림을 쳤다.
로하나에게서 빠져나간 마르디마른 몸이 고통으로 비틀렸다. 몇 번 심호흡을 내뱉은 소년이 마른침을 삼키며 입을 뗐다.
<놔…….>
로하나와 소년의 시선이 얽히는 순간, 기대어 앉은 것도 겨우 지탱하고 있던 소년의 몸이 거꾸러졌다.
“허억!”
로하나는 한참이나 숨을 못 쉬고 있던 사람처럼 숨을 내쉬었다. 온몸에서 배어 나온 땀으로 시트가 축축했다. 길고 새카만 머리카락이 새하얀 잠옷에 달라붙었다.
뭐지.
‘왜 그때 꿈을…….’
두 밤을 연달아 같은 날에 대한 꿈을 꾸다니. 다시 한번 숨을 몰아쉬며 정신을 차리려는데 뭔가 이상했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타닥타닥.
무거워.
로하나는 떠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떴다. 주변은 아까와 비슷해 보였다. 두꺼운 벨벳 커튼 너머에서 달빛이 새어 들어오는 것으로 보아 아직 밤인 것 같았는데.
콜록.
다시 숨을 내쉬려는 찰나, 이번에는 거친 기침이 나왔다. 공기가 탁했다. 직감적으로 뭔가 잘못된 것을 안 로하나는 움직이지 않는 몸을 굴려 침대에서 필사적으로 떨어졌다.
쿵.
몸이 물먹은 솜보다 무거웠다. 뭔가 심각하게 잘못되고 있었다.
달빛이 빠른 속도로 연기에 가려졌다.
불이었다.
뜨겁고 탁한 연기가 폐 깊숙이 치고 들어왔다.
“조디!”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두꺼운 카펫과 커튼들 덕분인지 목소리가 더 묻혔다. 아니면 이미 말을 할 기운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인지도 몰랐다. 침실 문을 겨우 열자 밖에는 이미 연기가 자욱했다.
몸을 최대한 낮춘 후 시녀에게 마련해 준 작은 방의 문을 열자 파인체이서 가문의 시녀 아이 하나가 겨우 벽을 붙잡고 서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마님.”
콜록콜록, 시녀 아이가 기침을 하며 로하나에게로 뛰어왔다.
“괜찮은가.”
“네, 마님도요?”
“조디는?”
“모르겠어요.”
시녀가 울먹였다.
“어서 여기서 나가야 해.”
밖의 상황이 어떤지 알 수 없었다. 로하나는 응접실로 뛰어나가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중간 지붕도 없어서 떨어져서 탈출하기엔 높이가 너무 아찔했다. 창문을 통해서 나가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로하나는 손을 닦을 물이 담겨 있던 물병을 들었다. 물병을 머리 위로 올려 쏟아 버리자 온몸이 젖었다.
“마님!”
로하나는 반쯤 남은 물을 시녀에게 전달했다. 시녀도 주저하다 물을 뒤집어썼다.
“여기.”
서둘러 주위를 둘러보던 로하나는 수건을 집어 들었다. 코와 입을 막으라고 지시하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다행히 아직 불길이 가깝진 않은지 문을 여는 건 어려움이 없었다. 꺾어진 계단 부분을 먼저 통과하는 순간, 기둥 하나가 박살이 나며 부러졌다.
반대편으로 길을 찾기 위해 달리려 했지만 몸이 점점 무거워졌다.
쿵.
이럴 수가 있나?
필사적으로 원작을 생각하던 로하나의 머릿속이 뿌옇게 흐려질 때쯤이었다.
와장창!
유리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뛰어 들어왔다.
케이든?
흐릿한 의식 속에 생각하는데 다른 목소리가 귓등을 울렸다.
이름을 부르는 듯, 호칭을 부르는 듯.
“레이디 델클리프.”
히스가 거의 쓰러진 로하나를 안아 올렸다. 본 적 없는 험악한 표정을 한 그는 로하나를 찾고 안도하는 모습이었다.
“조디가…….”
로하나가 히스의 목을 끌어안은 채 말했다.
“말씀하지 마세요.”
열기가 견딜 수 없을 만큼 뜨거웠다.
히스가 로하나를 데리고 저택 밖으로 뛰어나오자 그제야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델클리프 공작 부인!”
트루디가 물수건으로 얼굴을 닦다가 뛰어왔다. 그녀 역시 자다가 뛰어나왔는지 잠옷에 겨우 담요를 걸친 모양새였다.
“파인체이서 부인.”
로하나는 숨을 몰아쉬고 겨우 대답했다. 히스가 조심스럽게 잔디밭에 로하나를 내려놓았다.
“조디가…… 아직 안에 있어요.”
로하나가 말했다.
“안에 있다고요?”
히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없었어요…… 방에…….”
그때였다.
등 뒤에서 비명 소리가 들렸다. 함께 쫓아온 시녀 아이의 비명이었다. 돌아보는 순간, 히스와 로하나를 향해 복면을 한 자객들이 칼을 든 채 달려오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차가운 금속음을 내며, 히스가 검을 빼 드는 순간이었다.
휙.
달려오던 세 명의 자객이 어디 걸리기라도 한 듯 푹 고꾸라졌다. 화살이었다. 숲속에서 말을 타고 반가운 얼굴이 나타났다.
“로하나.”
케이든이 말에서 뛰어내리더니 로하나에게 달려왔다. 튄 핏자국을 닦은 듯, 날카로운 턱을 따라 선혈이 묻어 있었다.
“괜찮습니까.”
케이든이 로하나의 어깨를 잡고 몸을 살폈다. 로하나는 얼이 빠져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연기를 많이 마신 탓인지 정신이 없었다.
“저는 안 다쳤어요. 괜찮아요.”
로하나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아직 눈앞의 시신들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케이든의 시선이 겨우 로하나를 떠나 불타는 성을 바라보는 순간이었다.
별안간 그녀의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살기가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눈을 질끈 감는 순간이었다.
케이든의 팔이 먼저 움직였다. 끔찍한 비명이 불타는 건물의 소음과 각종 고함 소리가 뒤섞인 아비규환 중에도 선명했다.
로하나는 등 뒤로 느껴지는 뜨거운 액체로 알 수 있었다. 케이든의 칼이 뒤에 있던 사람을 베었음을.
“로하나, 제 뒤에만 계십시오.”
로하나가 케이든의 팔을 붙잡으며 다급하게 말했다.
“조디가 없어요. 아직 성안에 있을지도 몰라요.”
로하나의 다급한 얼굴을 보며 케이든이 미간을 찌푸렸다. 한순간 차이였다. 굵은 팔이 그대로 로하나를 안으며 넓은 몸으로 그녀를 덮었다. 허벅지도 뚫어 버릴 듯한 화살이 잔디밭에 푹 박혔다.
저게 뭐야.
로하나가 엎드려진 채 고개를 들자 제법 가까이 달려오던 히스가 활을 드는 것이 보였다. 이상할 만큼 환한 빛이 화살을 감싸더니 이내 놀라운 속도로 날아가 자객의 머리를 맞혔다.
“케이든 공!”
낯선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검은 갑주를 입은 여자의 짧은 백금발이 바람에 휘날렸다. 케이든은 주위를 서늘한 눈으로 살피더니 로하나를 부축해 일으켰다.
“이즈랑 여기서 멀리 떨어져 계십시오.”
로하나가 뭐라고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이즈라는 여자가 로하나의 손을 잡았다. 체구가 로하나보다 훨씬 작은데도 그녀는 어려움 없이 로하나를 가뿐하게 말 위로 잡아 올렸다.
그때 달려가는 케이든 위 나무에서 사람의 기척이 보였다.
“케이든!”
로하나의 목소리에 케이든의 눈이 날카롭게 위를 향했다. 위를 올려다보자 무언가가 나무 위에서 뛰어내리고 있었다.
차가운 금속 빛이 로하나의 눈에 비쳤다. 빠르고 망설임 없는 움직임이었다.
투둑, 하고 사람 하나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얼굴까지 복면으로 전부 가린 남자는 케이든의 칼에 완전히 베인 채 쓰러져 있었다.
케이든의 움직임은 사람 같지가 않았다. 무엇이든 반사적으로 반응했고, 공격하는 동작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로하나가 보기에도 군더더기가 없었다. 길게 느껴졌지만 찰나의 순간 넋을 놓고 있었을까.
로하나는 순간 저도 모르게 케이든의 이름을 불렀다. 케이든이 곧장 불타오르고 있는 저택으로 달음박질치기 시작한 것이다.
“케이든!”
놀란 로하나가 소리쳤지만, 그는 망설임 없이 불길이 일렁이는 문을 지나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이즈가 말렸지만 로하나는 서둘러 말에서 내렸다. 피와 땀에 젖은 나이트가운이 몸에 달라붙어 움직이기가 버거웠다.
“마님!”
히스가 매서운 눈길로 처리한 자객을 확인하며 성을 등지는 순간, 불이 다시 세차게 일어났다.
그런데 그 순간, 로하나는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었다.
불길이 죽을 듯 바닥으로 내려 꺼지기 시작했다.
케이든이 칼을 움직여 성안으로 들어감과 동시에 불길이 잦아드는 것처럼 보였다.
뭐지?
로하나가 눈을 가늘게 뜨는 순간,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거짓말처럼 까맣고 하얀 연기만이 미친 듯이 뿜어져 올랐다.
붉은 불길이 순식간에 종적을 감추더니 차가운 바람이 성에서 뿜어져 나왔다.
“말도 안 돼…….”
중얼거리는 로하나의 혼잣말에 이즈가 말했다.
“금방 해결하셨네요.”
“해결이라니……. 불을 어떻게?”
그녀는 어안이 벙벙해 잔디밭에 주저앉았다. 주위를 돌아보니 놀란 사람은 로하나 혼자인 것으로 보였다. 심지어 트루디 백작 부인조차도 안도하는 얼굴이었지 의아함은 없었다.
그러고 보니.
로하나는 마력을 다룰 수 있냐는 질문에 노코멘트하던 케이든의 얼굴이 떠올랐다.
빙그레 여유가 있던 냉정하고 태연한 얼굴.
그는 노프탈의 델클리프였다.
세계관 최강의 그가 마력을 다루지 못할 리가 없지 않은가.
얼마나 지났을까.
꽉 찬 연기 속에서 케이든이 다시 걸어 나왔다.
흑안은 늘 그렇듯 로하나에게로 고정되었다. 얼굴은 그을음과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서늘한 검은 눈빛은 형형했다.
순식간에 주위 온도가 낮아져서인지, 그의 눈빛 때문인지 로하나는 저도 모르게 떨리는 몸을 양팔로 감쌌다.
쩡 하며 얼음 깨지는 소리가 났다. 성벽에 얼음이 서려 있었다.
마냥 넋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있던 그 순간, 로하나의 머리에 다시 한 사람이 떠올랐다.
“조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어떻게든 자리에서 일어서는 그녀를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케이든이 붙잡았다.
“조디가!”
케이든의 팔에 붙잡힌 로하나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였다.
“공녀님…….”
얼어붙은 성벽에 기댄 채 엉망이 된 인영이 로하나의 눈에 비쳤다.
조디였다.
“조디!”
로하나가 소리침과 동시에 조디가 폭 하고 고꾸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