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죽일 흑막과의 계약결혼-32화 (32/125)

32

“로하나.”

로하나가 고개를 들자 바르디가 좀 우울한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미안해.”

로하나는 잠시 어안이 벙벙했다가, 다시 예의상 짓는 미소로 표정을 고쳐 잡았다.

“별말씀을요.”

이제는 알 바가 아니니 정말 진심이었다.

“그때 무섭게 한 것도…… 괜찮다고, 안 변한다고 한동안 거짓말했던 것도…… 전부 다.”

계속되는 말에 로하나는 한숨을 겨우 삼켰다.

“우린…… 처음부터 정해진 사이였잖아. 그래서 나도 내 감정을 잘 몰랐어. 변할 수 있는 줄 몰랐어.”

로하나가 바르디를 올려다보았다. 헤어지는 판에 굳이 얼굴을 붉힐 필요는 없겠지.

“네.”

할 수 있는 말은 이뿐.

“잘 지내세요.”

바르디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역시 주인공이라 그런가, 쓰레기 같은 짓을 해도 어째서 혼자 마무리가 아름답게 되는 거지.

케이든도 이렇게 오렐리아에 대한 마음이 식어서 굳이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정말 그럴 사람 같아 보이진 않았지만 사람의 속마음을 누가 어떻게 알겠는가.

“로하나도 꼭 잘 지내.”

“네.”

로하나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때 오렐리아와 케이든이 돌아왔다. 케이든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막상 오렐리아와 정말 헤어지자니 마음이 아픈 걸까. 로하나가 공연히 목을 가다듬자, 케이든의 얼굴이 살짝 더 굳어졌다.

“그럼 갈까.”

바르디의 말에 오렐리아가 턱 끝을 당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멀어지는 황제 부부를 바라보던 중 케이든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럼 출발해도 되겠습니까?”

로하나는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순간 아차 했다. 그때 등 뒤에서 덤벙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디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케이든의 얼굴이 차가운 것에 비해 히스는 역시나 친절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조디!”

놓고 온 짐이 있었다며 조디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럼 출발하지.”

케이든이 말에 올라타며 명령하자 수많은 말이 발굽을 치며 요란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오후 내내 달려 저녁은 중간 마을 ‘리프’에 들른 후, 이틀을 더 달려 그다음 날 노프탈에 도착하는 일정이라고 히스가 설명해 주었다.

긴장인지 후련함일지 부담일지 모를 감정을 안고 마차가 출발했다. 말머리를 돌려 마차 앞에 선 케이든이 허리를 숙여 마차 안을 들여다보았다.

“공녀님이 힘들어하시면 언제든지 마부에게 일러라. 샘, 말을 들으면 바로 멈춰라. 서두를 것 없다.”

조디는 목숨을 걸고 그렇게 하겠다는 듯 크고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고, 샘은 깍듯이 대답했다.

“네.”

“피곤하겠지만 너무 걱정 마십시오. 쉬엄쉬엄 가면 되니 무리할 것 없습니다.”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는 건데 뭐가 특별히 피곤할 거라는 건지, 로하나는 민망한 웃음을 지었다.

“네.”

케이든은 대답하는 로하나가 잘 앉았는지 확인하곤 마차 문을 닫았다. 차가운 바람이 겨울을 알렸다.

케이든이 말의 속도를 높이자 긴 행렬이 뒤를 따랐다. 로하나는 밖을 내다보았다. 궁은 생각보다 빠르게 멀어졌다.

*

어스름하게 땅거미가 진 참나무 숲속.

검은 새가 작은 날개를 파닥이며 날다가 망토를 둘러쓴 여자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새의 다리에는 작은 금속 통이 매여 있었다.

<금일 저녁 파인체이서 도착 예정>

여자가 손을 작게 움직이자 손끝에서 불꽃이 일었다. 메모는 순식간에 재가 되어 바람을 타고 흩날렸다.

“가지.”

여자의 낮은 목소리에 뒤이어 검은 말이 여러 마리 움직였다.

*

보름달이 밝던 밤, 유모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닷새 넘게 공작가로 돌아오지 못하더니, 그렇게 부고만이 돌아왔다.

백 일, 이 세계에 적응하는 동안 로하나 대신 대가를 치러야 했던 젊은 여자가 그렇게 갔다. 아무도 모르게, 아무의 관심도 받지 못한 채.

여덟 살의 로하나는 정원으로 뛰었다. 그 방에 누워 있다가는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아서.

살인자들.

차가운 달빛에도 온몸에 타는 듯한 작열감이 느껴졌다. 그때였다. 정원수 사이, 아무도 모르는 구석에서 뭔가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숨을 멈추고 천천히 다가가자 놀라운 것이 눈에 들어왔다.

소년이었다.

아주 작고, 아주 마른.

겨우 여덟 살인 로하나보다도 어려 보이는 새까만 머리의 소년은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정원에 죽은 듯 기대앉아 있었다.

그때 저 멀리, 웬 남자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원을 수색한다.”

지시하는 목소리였다.

“여긴 하노버 공작가 소유입니다. 괜찮…….”

“당연하잖아, 멍청아. 닥치고 찾기나 해.”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소년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불을 보듯 뻔했다.

로하나는 조심스럽게 소년의 입가로 손을 가져다 대었다.

아주 작게, 숨결이 느껴졌다. 그때 피투성이에 마른 입술이 달싹였다.

“당장 꺼져…….”

“쉿.”

로하나는 소년의 입을 틀어막았다. 머리를 재빨리 굴렸다.

이어지는 정원수 사이로는 성인은 겨우 지나갈 통로가 있었고, 그 너머엔 바깥 숲으로 통하는 길이 있었다. 넓은 정원에서 실수인 것처럼 비워져 있는 공간.

주저하는 사이 바로 옆 정원수까지 다가온 남자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로하나는 소년의 몸통을 뒤에서 잡아끌었다. 소년의 몸이 통로 안쪽으로 끌어당겨지자마자 우악스러운 남자들의 발걸음이 빽빽한 정원수 바로 건너편에서 소란스럽게 돌아다녔다.

간발의 차이였다.

‘군복?’

군인들의 발소리와 욕지거리가 멀어질 때까지 로하나는 숨도 쉬지 않은 채 소년을 끌어안고서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조용해진 지 얼마나 되었을까.

“놔.”

소년이 숨을 가쁘게 몰아쉬면서 몸을 빼냈다. 바닥에 검붉은 액체가 흘렀다. 흙이 뭉쳤다. 피가 너무 많이 흐르고 있었다.

어떻게 하지.

로하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도움을 요청할 데가 없어. 누가 봐도 이미 얻어맞은 시종이거나 노예인 도망자를 누가 돕겠는가.

새카만 머리카락은 땀과 피에 절어 이마에 붙어 있었고, 손목과 발목에는 수갑 자국이 새빨갛게 부어 있었다.

“아파, 많이?”

소년의 왼쪽 옆구리에 큰 상처가 있었다. 칼에 찔리기라도 했는지 그곳에서의 출혈이 꽤 심각했다.

로하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벌벌 떨리는 손으로 일단 피를 멈춰야겠다는 생각에 끔찍한 상처 부위를 누르자 소년이 들릴 듯 말 듯 욕을 내뱉었다.

그러나 무리였다. 피는 멈추지 않았다.

심장이 두방망이질 쳤다. 로하나도 그 심정을 알았다.

정말 너무 잘 알았다.

차가운 아스팔트에 누워 있는데 멀어지는 흰빛과 차의 엔진 소리. 꺾인 목의 시선 끝에 자신의 피가 웅덩이를 만들고 있는 것이 보이는 막막함.

<제발 누가 좀 도와줘요.>

그러나 아무도 그녀를 돕지는 못했었다.

<미안해, 네가 필요했어.>

미성의 소년 목소리가 꺼져 가는 의식 속에서 점점이 들려왔을 뿐. 로하나는 그때를 떠올리며 단단히 결심을 한 채 다시 제 방으로 달려갔다.

이 미친 세상에 들어와 유모를 죽게 했다면…… 이번에 이 사람은 다르게 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작은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달리는 속도가 지체되지는 않았다.

죽어 보았기에 알 수 있었다.

저 소년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안 된다는 것을.

*

로하나는 옅은 졸음에서 깨어났다.

‘별일이네.’

15년 전 일을 꿈으로 꾸다니, 오랜만에 희한한 일이었다. 밖을 내다보자 마차는 한창 숲을 따라 긴 길을 달리고 있었다. 먼 길은 먼 길이었다.

해가 기울고 얼마나 더 가야 하는가, 할 때가 되어서야 마차는 중간 지점이라는 ‘리프’에 도착했다.

로하나도 먼 소문으로만 듣던 가문, 파인체이서 백작 가문이 영주로 있는 곳이기도 했다.

“델클리프 전하 내외 드십니다.”

리프에 오자 순식간에 호칭이 전하로 바뀌었다.

리프는 제법 추웠다. 동쪽으로 이동 중이라는 게 티가 났다.

로하나는 마차에서 내리면서 한기를 느꼈다. 길고 빽빽한 상록수가 가득했다. 리프의 상징인 삼나무 숲이었다.

그때 케이든이 다가왔다.

“추우실 거다.”

조디에게 두꺼운 모피 망토를 전달하며 케이든이 말했다. 로하나는 케이든의 뒷모습을 보며 조디가 입혀 주는 망토를 받았다. 짙은 먹색이 자연스럽게 풍경에 녹아들었다.

“리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특이하고도 아름다운 옅은 초록빛 머리카락을 우아하게 올린 부인이 부드러운 숄을 두른 채 나와 인사를 올렸다.

“트루디 파인체이서입니다.”

우아하고 강단 있는 목소리였다.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로하나가 인사를 하자 트루디는 조금 뻣뻣한 미소를 지으며 팔을 안으로 뻗었다.

“먼 길 힘드셨지요?”

응접실로 이동하며 로하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수도보다는 천장이 훨씬 낮았지만, 나무로 지은 건물 내음이 향긋했다. 방은 로하나의 것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훨씬 두꺼운 천으로 새로 맞춘 드레스로 갈아입고 나오니 정갈한 저녁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오래되었지만 잘 정비된 식기가 촛불 아래 빛났다.

“감사합니다, 백작 부인.”

로하나가 말했다.

“꼭 뵙고 싶었는데, 저희가 영광입니다.”

트루디가 예의는 바르지만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로하나는 이 익숙하지만 낯선 느낌을 어디에서 받았는지 생각하다가, 이내 그녀가 히스의 모습과 비슷하다는 것을 떠올렸다.

“공작께서는 저희끼리 먼저 식사하라고 하셨습니다.”

“아, 그런가요?”

식사는 같이할 줄 알았는데……. 로하나는 어색한 마음에 일부러 더 활짝 웃었다.

“하노버 공작 가문의 영애가 노프탈의 안주인이 된다고 하셔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답니다.”

앙트레가 나올 즈음 백작 부인이 말했다.

“놀라셨군요.”

하긴, 그럴 만도 하겠지. 로하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하노버 공작가가 황후 가문이 된다는 것이 지난 15년의 기정사실이었으니.

“네, 조금 걱정되는 것도 있으시겠어요.”

걱정되는 것?

“걱정되는 것이요?”

로하나의 반문에 트루디 백작 부인의 미간이 살짝 움찔했다.

“아…….”

유난히 폭이 넓은 와인 잔을 돌리며 트루디가 잠시 망설이더니 입을 뗐다.

“아닙니다. 제가 괜한 소리를 했군요.”

로하나는 트루디의 어색한 미소를 잠시 바라보았다. 잠시 커틀러리가 그릇에 부딪치는 소리만이 적막을 감쌌다.

로하나는 그 적막 속에서 제가 어디로 들어왔는지 드디어 알 것도 같았다.

모두가 그녀를 불편해하고 있었다.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그녀도 카르크족일까.

로하나는 저도 모르게 떠올린 생각을 지우려 고개를 살짝 젓곤 열심히 식사를 마쳤다.

그 후로 조용히 제자리로 돌아가는 부인과 저녁 인사를 나눈 뒤 공연히 응접실에서 시간을 좀 보내기도 했지만 히스도, 케이든도 들어올 기색은 없었다.

시녀들도 일찍 쉬어야 좋을 테니 로하나는 곧 잠자리에 들었다.

리프는 적막했다. 숲속 나무 사이로 바람이 스치는 소리만 겨우 들릴 뿐이었다.

늘 이래저래 군인이나 시종들의 소리가 들리던 궁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에 로하나는 몸을 좀 뒤척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