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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일 흑막과의 계약결혼-31화 (3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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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그때 히스가 다급하게 다가왔다. 로하나는 여태까지 본 적 없을 만큼 살벌하게 굳은 히스의 얼굴을 보며 흠칫 놀랐다.

“히스.”

“공작님, 잠시 저랑 이야기 좀…….”

“다음에 하지. 오늘 밤이라든가.”

케이든이 냉랭한 목소리로 그를 물렸다. 히스는 더 할 말이 있는 듯했으나 그의 말이 합리적으로 들렸는지 물러났다.

다만, 물러나기 전 그의 연회색 눈동자가 이상할 만큼 오래 로하나에게 머물렀다.

“히스 경?”

저한테도 할 말이 있어서 그런가 싶어 로하나가 입을 열었지만 히스는 차갑게 굳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히스는 빠르게 인파 밖으로 멀어졌다. 무슨 일이지? 하는 의문이 들 때였다.

“이제 사람들의 기대를 더 충족시켜 볼까요?”

케이든이 로하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새로운 황제와 황후의 탄생에 아무리 관심이 쏠려 있어도 둘이 자리에서 일어나 무대의 중앙으로 이동하자 모두가 저도 모르게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단단한 팔이 아무렇지 않게 그녀의 허리를 감았다. 태연하고 여유 있는 미소. 모두의 시선을 알고 있는 눈빛에 로하나는 그와 마찬가지로 웃었다.

“저희 식도 이렇게 요란하게 할까요.”

케이든의 자못 여유 있는 농담에 로하나도 피식 웃었다.

“좋죠.”

그래도 한결 긴장을 풀고 있는, 이제는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는 로하나를 보며 케이든은 아무도 모를 미소를 지었다.

*

“저 케이든 델클리프는 로하나 하노버를 아내로 맞아 평생 사랑하고 아낄 것을 맹세합니다.”

긴 면사포와 흰 드레스가 앉아 있는 로하나의 등 뒤에서 계단 밑까지 가지런히 펼쳐져 있었다.

레이스 드레스는 햇살을 받아 섬세한 무늬를 만들어 냈고, 왼손 약지의 반지는 화려하게 반짝였다.

로하나는 상석에 앉아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황제와 황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관례상 둘이 먼저 인사를 하러 가야 하는 게 맞았지만 케이든은 어째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공작님.”

로하나가 몸을 숙이자 케이든이 턱을 돌려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수려한 콧대와 짙은 눈매가 유난히 화려한 예복과 잘 어울렸다.

“폐하 내외께 인사를 드리러 갈까요?”

오렐리아는 최대한 몸을 꼿꼿이 세운 채 앉아 있는 것이 제법 황후 티가 났다. 케이든은 잠시 건너간 시선을 돌려 고개를 기울이더니 로하나에게 귓속말을 했다.

“꼭 그래야 합니까? 제가 법도를 잘 몰라서.”

로하나는 그가 이런 실없는 농담도 하는 이였나 싶어 케이든을 동그란 눈으로 올려다봤다.

“농담도 잘하시네요.”

농담이 아니었는데……. 케이든이 중얼거리는 사이 로하나가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레스 자락이 길어 움직이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황제 폐하, 황후 폐하, 자리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우리 결혼이 바로 얼마 전이었는데, 어쩜 이렇게 급하게도 식을 올렸을까.”

식이 있고 난 뒤에 두 명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네, 제가 우겼습니다.”

케이든이 정중하게 말했다. 바르디가 의자에 몸을 한번 기대더니 로하나를 바라보며 입을 뗐다.

“그럼, 두 사람은 내일 노프탈로 떠나는 건가?”

“네.”

“난 둘 다 여기 있으면 했는데. 그 춥고 험한 데로 로하나를 데려가게?”

로하나는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아직도 그런 소리를 할 기운과 이유가 남아 있다니 놀라웠다.

“네, 이제 돌아가야지요. 노프탈을 오래 비웠습니다.”

케이든이 서늘하게 대답했다.

“로하나만이라도…… 좀 이따가 가면 안 되나?”

바르디가 스스럼없는 손길로 아무렇지도 않게 로하나의 왼손을 잡아 올렸다. 결혼반지에 고정된 커다란 다이아몬드가 샹들리에 빛에 반짝거렸다.

로하나는 천천히 잡힌 손을 빼내면서 생글 미소를 지었다.

“저도 남편 따라 바로 가야죠, 노프탈로.”

바르디는 그런 로하나를 길게 바라보더니 마치 다음에 얘기하자는 듯 눈웃음으로 둘을 물렸다.

*

건너편 귀빈석에 앉은 오렐리아가 로하나를 바라보았다.

바닥까지 깨끗하게 떨어진 면사포가 우아했다.

그중에도 유독 눈에 들어오는 것은 움직일 때마다 반짝이는 결혼반지였다.

‘저 반지를 줬단 말이지…….’

오렐리아의 예쁜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 딱딱한 얼굴로 와인을 다시 들이켜는데 기름 냄새가 가득한 사람이 가까이 다가왔다.

“오렐리아 영애…… 아니 황후 폐하, 오랜만에 뵙는군요.”

요르딕 후작을 보고 오렐리아는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오랜만이네.”

호박색 눈이 매섭게 반짝였다.

“그리고 앞으론 호칭을 굳이 헷갈리지 않았으면 좋겠네.”

예쁘게 눈을 접어 웃으며 오렐리아가 뼈 있는 말을 했다.

“죄송합니다. 그간 안녕하셨는지요?”

“그 하늘 건은.”

오렐리아가 사위를 주의 깊게 주시하며 목소리를 내었다. 수도와 해안가에 있었던 정체불명의 공습을 떠올렸다.

“대단한 작전이었네.”

“황후 폐하, 그건 저희가 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정말로.”

요르딕이 평소의 능글능글한 표정을 지우고 자못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다급한 목소리에 둥근 눈빛, 거짓말은 아니었다. 순간, 오렐리아의 얼굴이 잠시 굳어졌다.

“나한테까지 숨길 것 없네.”

그래도 혹시 몰라 다시 한번 떠보았지만.

“설령 그럴 능력이 있다 해도 제가 어찌 제국에 그런 의미 없는 공격을 하겠습니까.”

“나는 자네가 내 말을 굳이 무시하고 그런 대단한 작전을 펼친 줄 알았네.”

비꼬는 목소리에 요르딕은 고개를 세차게 젓고는 절대 아님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오렐리아는 이를 물며 헛기침을 했다.

“그나저나, 정말 황후 폐하가 되셨군요.”

가까이 다가오며 요르딕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오렐리아가 그런 요르딕을 흘깃 올려다보았다.

“그럼.”

보석 같은 황금빛 눈동자가 반짝였다.

“수차례 그럴 거라고 말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녀가 고개를 까딱하자 요르딕도 피식하고 웃었다.

“황후 폐하께서 하신 제안은 저희에게도 나쁘지 않아서…….”

흥미를 잃은 듯 다시 로하나를 좇던 시선이 요르딕에게 돌아와 박혔다.

“진행하게 할까 합니다, 그 친구를 이용해서.”

오렐리아의 붉은 입술이 예쁜 호선을 그렸다.

*

케이든과 히스의 크고 번쩍이는 북부의 흑마를 필두로 마차와 짐마차가 끝도 없이 길게 늘어섰다.

긴 여정에 대비해 로하나의 머리는 단단하게 땋아 올려 있었다.

로하나는 고개를 들어 하노버 공작저를 바라보았다. 새하얀 대리석과 보석으로 장식한 높고 좁은 창문들이 빈틈없이 이어지며 반짝였다.

“공녀님, 피곤하진 않으세요?”

기척 없이 가까워진 히스가 밝은 목소리로 아침 인사를 했다. 어젯밤 보였던 기묘한 적대감은 사라지고, 비비안이나 다른 여인을 대하듯 상냥하고 나긋하게 인사를 건넸다.

파란 머리는 막 감고 나왔는지 차분하게 찰랑거렸고, 오랜만에 갑주까지 단단하게 입은 모습이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리게 했다.

“네, 히스 경도요?”

“그러고 보니 호칭이 틀렸네요. 오늘부터는 공작 부인이신데…….”

“그렇네요.”

로하나가 싱긋 미소를 짓자 히스가 마주 웃었다.

“무슨 얘길 그렇게 해.”

히스를 툭 치면서 케이든이 지나갔다. 새카만 갑주에 검은 망토. 처음 마주친 것과 똑같은 모습에 로하나는 공연히 가슴이 다시 뛰었다.

샹들리에 사건이 파블로프의 개처럼 각인이라도 된 것인지, 로하나는 나대는 가슴을 눌렀다.

케이든은 능숙하게 방패를 말 옆에 고정시켰다. 아침 햇살에 은발이 반짝였다.

“호칭을 틀려서요.”

히스가 능글맞게 대답했다.

“날씨가 좋네요.”

별달리 할 말이 없어 로하나가 던진 말에, 케이든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케이든의 시선에는 마음 안쪽을 간질이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때였다.

나팔이 울렸다.

뒤를 돌아보자 오렐리아의 금발과 바르디의 푸른 눈이 보였다. 근위대에게 호위를 받으며 걸어오는 모습이 지나쳐 보였다.

“황제 폐하.”

무릎을 굽혀 인사를 올리자 바르디가 여느 때의 천진난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로하나.”

케이든도 늘 그렇듯 마지못해, 그러나 선을 벗어나지 않게 예의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하지만 바르디는 케이든의 말은 무시하고 로하나를 향해 말을 이어 나갔다.

“보고 싶을 거야.”

바르디의 말에 로하나는 지난 15년을 반추하며 지금의 왕을 쳐다보았다.

애틋하게 굴던 소년은 어디 가고 대번에 얼굴을 바꿔 버린 그. 이제 와서 그는 다시 그때의 소년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네, 폐하.”

그녀가 예의상 맞장구를 치자 케이든이 곁눈질로 로하나를 날카롭게 내려 보았다.

“자주 와야 해. 공작도.”

케이든은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했다.

“델클리프 공작님, 아니 공작, 조심해서 가셔야 해…… 해요.”

오렐리아가 말했다.

“공작 부인도, 먼 길 고생스러우실 텐데 가서 푹 쉬시고요.”

지난 결혼식 때와는 달리 다시 어설퍼진 존대에 로하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네.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

살며시 웃던 오렐리아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잠시…… 델클리프 공작과 이야기 나눌 수 있을까?”

애교 있고 당당한 목소리였다.

나머지 셋이 잠시 멍하게 있는 사이, 오렐리아가 두 손을 모으더니 이내 총총걸음으로 저 멀리 뛰어갔다.

케이든은 로하나를 한번 쳐다보고는 하는 수 없다는 얼굴로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조금 멀어진 그 둘을 바르디가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오렐리아의 뒷모습과 케이든이 미간을 찌푸린 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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