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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일 흑막과의 계약결혼-30화 (30/125)

30

하노버 공작저에는 불필요한 긴장감이 돌았다.

같은 날 신부의 자리에 서야 했을 여인이 손님으로 참석하게 된 것도 모자라, 갑작스럽게 발표한 새로운 약혼자가 나타나지도 않아서일까.

조디는 거울을 통해 로하나를 바라보며 과장되게 호들갑을 떨었다. 아마 로하나가 불안해하거나 불편해하고 있지 않을까 걱정하는 눈치였다.

“세상에! 공녀님, 너무 예쁘신 거 아니에요?”

“칭찬이 과하다.”

진한 청회색 섬세한 레이스 위로 곧은 쇄골이 드러났다.

조디가 드레스에 어울릴 귀걸이를 귀에 가져다 대보며 말했다.

“그나저나 델클리프 공작님께선 어딜 가신 걸까요. 역시 그때 있었던 일을 알아보려 어딘가로 가신 거겠죠.”

선망이 담긴 목소리에 로하나는 아주 옅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고는 조디가 추천한 진주 귀걸이를 고개를 저어 사양했다. 그보단 훨씬 화려한 것이 나을 것 같았다.

그때였다. 노크 소리가 들렸다.

“히스…… 경께서 오셨습니다.”

어쩔 줄 몰라 하며 시녀 아이가 말을 하고, 로하나는 새하얀 다이아몬드가 길게 떨어지는 귀걸이를 골라 착용하곤 그를 맞이하러 응접실로 나갔다.

“공작께선 아직이신가 봅니다.”

로하나는 순간, 장갑을 잊은 것을 떠올리며 조디에게 손짓을 했다.

“저도 별 소식을 아직 전해 듣지 못해서요. 아시지 않습니까. 마물이 갑자기 어떻게 나타났고 왜 그랬는지 혼자서라도 머리 터지게 조사하고 있을 겁니다.”

사무적으로 말한다고 하긴 했으나 짙은 신뢰가 배어난 목소리였다.

무슨 사이일까. 로하나는 고민했다.

“조사요?”

“마력에 관련된 일이라면 아무래도 저희가 가장 잘 아니까요.”

고개를 끄덕이는데 조디가 헐레벌떡 장갑을 가져왔다.

레이스 장갑을 집어 들며 로하나는 시내의 소란 직후 케이든이 자리를 비웠다는 소식을 히스로부터 전해 듣던 날을 떠올렸다.

바르디의 약혼녀로 살았던 15년보다 최근 몇 주가 훨씬 더 길게 느껴졌다.

아침마다 당신을 대놓고 감시해도 되겠습니까, 하고 묻는 말에 로하나는 잠시 서늘한 눈으로 히스를 바라보았다.

하늘색에 가까운 새파란 머리카락에 옅은 회색 눈, 카르크족 특유의 채도 낮은 색감에 키가 크지만 유연하게 낭창한 몸매의 그는 저들보다 나이가 제법 위로 보인다는 것 말고는 알 수 있는 게 없었다.

알 수 없는 일이 너무 많이 일어난다. 알 수 없는 사람도 있고.

“그렇군요.”

로하나가 장갑의 손목께에 있는 진주 단추 채우는 것을 내려다보며 히스는 조용히 팔을 내밀었다.

“이것도 부탁하고 갔었나요?”

감시하는 것 말고, 황실 결혼 에스코트까지?

“그런 말은 없었습니다.”

이미 비비안을 포함해 황궁 내 여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그다운 눈웃음을 지으면서도 가히 냉정하게 딱 자르는 히스의 말에 로하나는 피식 웃었다.

“그렇군요.”

두 사람이 이동하자 드레고리와 브란드가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각자의 복잡한 표정으로 히스를 바라보았다.

어디서 굴러왔는지도 모를 남자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딸이 황실의 결혼식에 참석하는 모양을 보고 싶지 않았는지 드레고리의 얼굴은 노골적으로 불쾌해 보였고, 브란드는 늘 그렇듯 쩔쩔맸다.

“자네는 누구지?”

드레고리는 굳이 예의를 갖추려고도 하지 않으며 물었다.

“아, 공작의 호위 기사라는 식의 소개 말고.”

로하나는 히스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놀랄 만큼 무표정하게 굳은 그의 얼굴은 이내 다시 생글한 미소로 가려졌다.

“히스 노슈아입니다.”

“들어 본 적 없는 이름인데.”

“네, 못 들어 보셨을 겁니다.”

“공작께서 어디에 계시는지도 모른다고 들었습니다.”

“제국을 위해 지나칠 만큼 성실하게 일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생글생글한 얼굴에선 굳이 가리지 않는 혐오의 빛이 내보였다. 둘의 대화가 불필요하다고 느낀 로하나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델클리프 공작께서 친히 부탁하셨다고 합니다.”

그녀가 아까 들은 사실과 정반대의 말을 하며 제 부친을 냉랭하게 바라보는 순간이었다. 익숙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네, 제가 부탁했던 건데…….”

넓고 곧은 어깨가 오랜만이었다. 긴 목의 절반 정도 올라오는 하이 네크라인의 검은 예복을 입은 케이든은 화려한 은사로 만든 장식에 델클리프 문장의 핀까지 꽂은 모습이었다.

“대단히 불만이 많아 보이십니다.”

“없을 수가 있습니까.”

드레고리의 말에 케이든은 한숨을 숨기지 않더니 시선을 돌려 로하나를 향했다.

“로하나 공녀.”

케이든이 무릎을 굽히며 정식 인사를 했다.

“공작님.”

“가실까요.”

드레고리는 더 못마땅한 얼굴을 하다가 이내 브란드에게 따라오라는 듯 손가락으로 손짓을 하고는 먼저 빠르게 황궁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히스는 그런 두 남자와 로하나를 찬찬히 번갈아 보다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조금 더 바짝 당겨 세웠다.

케이든의 눈썹이 올라가자 그제야 미소를 지은 그는 로하나를 놓아 주었다.

연회장까지 걷는 중앙 복도 길이 붉은 튤립으로 화려했다. 뒤로는 다른 귀족들이 넓은 간격으로 사용인들을 두고 걸으며 로하나와 케이든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사건으로 바쁘셨나 봐요.”

“네.”

케이든이 잠시 고민하다 입을 뗐다.

“걱정하실 건 없습니다. 어디에서든 당신이 위험할 일은 없습니다.”

“아뇨, 그게 아니라…….”

케이든은 그럼 뭐냐는 듯 로하나를 내려다보았다.

“아니에요.”

어디를 다녀온 것이냐, 가서 무엇이라도 알게 된 것이냐, 나 사실 그날 이상한 새 모양의 무언가를 보았는데 그건 뭐였는지 혹시 아느냐.

“저…….”

머릿속에 여러 질문이 떠올랐지만 쉽사리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케이든이 무슨 일인지 묻는 눈을 했다.

“아니에요.”

케이든에게 솔직하게 모든 것을 터놓고 물어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딱히 연대할 다른 누군가가 있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지만.

잠시 생각을 반추하던 케이든의 미간이 조금 좁아졌다.

“오늘 이상하십니다.”

“제가요?”

“혹시 아직도 안 괜찮으신 겁니까?”

로하나는 자신을 뚫어지게 내려다보는 검은 눈이 암시하는 것이 무엇인지, 잠시 생각한 후에야 이해한 듯 되물었다.

“아……. 설마…… 황제 폐하의 결혼이요?”

케이든이 그럼 무엇이겠냐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당연히 괜찮죠.”

진심이었다.

“그럼 됐습니다.”

케이든은 여전히 사무적으로 말했다.

“공작님께선 괜찮으세요?”

떨어뜨려 놓았던 바르디까지 뒤늦게 만난 그녀를 기어코 사랑하는데, 오렐리아와 10년을 함께 지낸 서브 남주인 그가 그야말로 그녀의 결혼식에서 괜찮을까.

기왕 주제가 나왔으니 로하나 역시 짐짓 아무렇지도 않게 질문을 던졌다.

“제가 뭘요?”

시치미를 떼는 것인지, 워낙에 표정 변화가 없는 그인지라 로하나는 알 수가 없었다.

동그랗게 눈을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으나 그는 진정 모르겠다는 듯 그녀를 가만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러더니 이내 뭔가 결심한 듯 케이든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참 그전에.”

익숙하게 장갑을 벗자 유난히 손마디가 굵고 긴 손가락이 안주머니를 향했다. 그러더니 이윽고 꺼내 든 무언가가 햇살에 오색으로 반짝였다.

빛이 영롱했다.

“이것부터.”

로하나는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그녀 특유의 판에 박힌 예의 어린 추임새가 나올 새도 없었다.

다이아몬드였다. 반지는 아름다웠다. 새하얀 백금에 사뿐히 앉은 다이아몬드가 육각의 다리에 꽉 잡혀 있었다.

“지…… 지금이요?”

“제가 늦어 버리는 바람에 이렇게 드릴 수밖에 없네요.”

태연하게 미소를 짓는 케이든은 반지를 들고 있지 않은 반대 손을 내밀어 로하나의 손을 잡아 올렸다.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접촉에 다시 그때처럼 그녀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더니 조여들었다.

아무리 부정해도 몸이 긴장해.

로하나의 가는 손가락에 다이아몬드 반지가 반짝였다.

“가시죠.”

어깨에서 좀 벗어난 숄을 여며 주며 케이든이 말했다. 로하나는 처음 마주친 샹들리에 잔해 밑에서의 손길을 떠올렸다. 조심하지만, 단호한 손길이었다.

*

성혼 선포가 있고 대주교의 주관 아래 공식적인 식이 끝났다. 거대한 얼음 조각과 초겨울이라 어렵게 공수해 온 붉은 튤립이 아름다웠다.

천장에서부터 금비가 내리듯 꾸며진 긴 금장식들이 샹들리에 불빛에 반짝였고, 테이블마다 놓인 센터피스는 사람의 키만큼 높았다.

피로연은 밤을 잊은 듯 화려하게 계속되었다.

이윽고 귀족들이 차례로 인사를 하러 황제 황후의 단상에 올라가는 순서가 되었다.

모두의 시선에 로하나는 온몸이 따가웠다. 케이든은 유난히 아까보다 바짝 붙어 팔짱을 꼈다.

“축하드립니다, 황제 폐하, 황후 폐하.”

케이든이 먼저 말을 꺼내고, 이어서 로하나도 반복했다.

오렐리아는 정말 예뻤다. 처음으로 올려 묶은 금발 위에서 다양한 보석들로 빈틈없이 짜인 반짝이는 티아라가 빛나고 있었다.

그때 오렐리아의 아름다운 눈웃음이 별안간 어색하게 굳었다.

“어?”

오렐리아는 늘 갑자기 움직였다. 로하나의 왼손이 그녀에게 덥석 잡혔다.

“아…….”

로하나가 잡힌 손을 내려다보며 어정쩡하게 입을 뗐다.

오렐리아가 케이든을 올려다보자 그의 검은 눈이 역력히 불편한 티를 내고 있었다.

“왜 그래, 오렐리아? 아니…… 황후?”

미심쩍은 목소리.

“이건…….”

오렐리아는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다시 표정을 바꾸었다.

“아, 아니에요. 두 분 약혼 축하드려요. 정말 기뻐요. 반지가 너무 예뻐서 그만…….”

로하나는 손을 빼며 고개를 까닥했다. 이미 약혼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서 반지를 보고 놀라다니. 유난스러운 성격인 건지.

케이든은 다시 로하나에게 팔을 내어 주며 빠르게 계단을 내려갔다. 황제와 황후에게 인사할 다른 귀족들이 그들의 뒤로 줄을 길게 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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