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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아마 오늘 일도.”
“네, 뭔지 모를 것이 하늘에서 떨어져 건물이고 선함이고 부숴 댔으니 당연히 마력이 개입되어 있겠죠.”
“누가…….”
“그건 저도 모릅니다.”
“그럼 카르크족이 이런 마……력이라는 걸 쓸 수 있다는 이야기인가요?”
“그런 사람이 있다는 거지, 모두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랬다면 이렇게 기록에서 꼭꼭 숨겨 놓기도 쉽진 않았겠죠.”
한쪽 입꼬리를 비릿하게 올린 케이든이 잔을 마저 비우며 대답했다.
“궁 밖이야 사람들이, 광대들이 구전으로 오만 이야기를 다 전하니 그나마 지금까지도 전해지는 거고.”
그답지 않게 길게 말을 잇더니 케이든은 서둘러 입을 닫았다.
“그렇군요.”
약간의 침묵을 지키던 로하나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그리고 제가 마력을 쓸 수 있는지 물으셔야겠지요.”
로하나가 흠칫 어깨를 떨자 케이든은 예상했다는 듯 엷게 웃었다.
그래도 그 전과는 달랐다. 그는 여전히 예의 발랐지만, 훨씬 위험했다. 높은 콧대에 짙은 그림자가 턱을 기울이자 옆으로 움직였다.
“글쎄, 어떨까.”
로하나의 얼굴이 조금 굳는 것을 보며 케이든은 피식 웃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때였다. 로하나가 손을 뻗어 그를 잡자 케이든은 처음으로 놀란 듯 흠칫하는 기색이었다. 입술을 뗐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다음에 뵙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당황스러웠다. 로하나는 원작을 알고 있었다.
이러니저러니 결국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지만, 최소한 전혀 모르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래서 계속 뜻대로 할 수 없었는지도 몰랐다.
어쩌면 원작은…….
“공녀님을 모셔라.”
그때 케이든의 목소리가 로하나를 생각에서 깨웠다. 문을 열어 사용인에게 명령한 그는 로하나는 돌아보지도 않은 채 제 침실로 멀어져 갔다.
*
높은 천장과 무거운 벨벳과 실크 커튼의 화려함은 낮인지 밤인지도 알 수 없을 만큼 어두운 방에선 의미가 없었다. 심지어 오랫동안 환기를 하지 않은 것인지 공기까지 탁했다.
새하얀 옷을 입은 의사가 조용히 열과 맥박을 재고 있었고, 침상에는 늙은 선황제가 조용히 천장을 보고 있었다.
“황제를 불러와.”
의사가 흠칫 놀란 것은 그다음이었다. 말은커녕 며칠째 의식도 거의 없던 선황제의 목소리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사이, 조용히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자신만만한 발걸음 소리에 의사가 깜짝 놀라며 고개를 다시 조아렸다.
“저를 부르실 것 같아서요.”
모두를 물리고 문이 굳게 닫힌 것을 확인한 바르디 렌트워스가 푸른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콘스탄스 렌트워스. 검은 반점이 잔뜩 뒤덮은 마르고 어두운 얼굴에 아무리 훌륭한 진수성찬을 주어도 먹지 못할 것처럼 말라붙은 입술.
거친 숨을 겨우 몰아쉬는 초대 황제 콘스탄스는 제 손자이자 차기 황제인 바르디를 올려보았다. 손자의 형형한 푸른 눈이 그와 똑 닮아 있었다.
“카르크족의…… 만행이…… 있었던 게냐.”
“여기 들어오는 것들에게 아무리 입을 다물고 있으라고 해도 안 듣나 보네.”
바르디는 다정한 목소리를 내며 의자에 비뚜름하게 앉았다.
“황……위를…… 가져간 건…… 그렇다 치자.”
늙은 선황제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어……차피 이 꼴을 보일 수는 없으니 말이다.”
노인은 이어진 거친 기침으로 한참이나 말을 할 수 없었다. 바르디는 그런 제 조부이자 과거의 영광을 냉랭하게 내려다보았다.
이제 조부는 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이렇게까지 최선을 다해 물러서 줬는데도, 그 존재 자체가 바르디에게는 역겹고 부담스러웠다.
“그……렇지만 카르크족이…… 이따위로 날뛰게…… 두는 것은…….”
“할아버님이었다면 어쩌실 셈이었는데요?”
인내심의 한계를 느낀 바르디가 콘스탄스의 말을 잘랐다.
“어떻게 미리 알 것이며, 이미 흔적도 사라진 것을 뭐 어쩌라고.”
“그……래도…… 그러라고…… 젊은…… 너에게…….”
“선대 때 하지도 못한 일을, 치우지도 못한 똥을 나한테 치우라고 하시면 안 되시죠.”
콘스탄스는 푸른 눈을 힘겹게 치켜떴다. 점점 예의를 잃고 부족하고 무서운 아이인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심각해진 것은 최근의 일이었다.
사람들에게 약한 자신의 모습을 보이느니 손자가 황제로 나서는 편이 나을 것이라 생각해 넘겨준 자리였다.
“카르……크족을 없애…… 는 건 불……가능해.”
“왜 그렇지?”
푸른 눈이 어둠에서도 번뜩였다.
“나는 아주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케…… 케이든을 이용해라. 그…… 애만이…… 제국을 위해…… 카르크족을…… 통제할 수…….”
“그런 어쭙잖은 조언을 하려고 애쓰면서 말씀까지 하시려니 얼마나 힘들어.”
바르디가 비꼬며 팔짱을 꼈다. 순간, 참다 참다 노기를 띤 콘스탄스가 고함을 지르려는 듯 마른 입을 뻐끔거렸다.
“너…… 너는 어…… 어떻게 황제가 되자마자!”
“알아요, 그 착하던 손자가 사라져서 당황스러우시다는 거.”
바르디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우리 이제 그런 거 그만하면 좋겠어. 케이든한테 벌벌 떨며 조아리는 것도 그만하고. 살려 준 은혜로 지금까지 살았으면 그 자식도 오래 산 거지, 혼혈 주제에.”
바르디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
“이…… 이럴 줄 알았으면…….”
“이럴 줄 알았으면?”
이제는 분노가 치밀다 못해 숨쉬기조차 버거워 보이는 선황제가 침대에서 일어서려 용을 쓰자 커다란 손이 지그시 그의 어깨를 눌렀다.
“또 케이든 소리 하려고? 그 옛날에도 그랬듯이?”
바르디의 목소리는 달콤한 듯 부드러웠지만 독이 든 듯 무거웠다.
“뭐…… 뭐?”
“내가 모를 줄 알았어요? 내 아버지랑 내가 그걸 몰랐을 줄 알았냐고.”
바르디의 푸른 눈에 콘스탄스는 놀라 떡 벌어진 턱을 다물지 못했다.
“그…… 그럼 혹시 너희가…….”
순간 저가 떠올린 생각에 충격을 받았는지 선황제는 갑자기 숨도 못 쉬며 꺽꺽댔다.
바르디는 혐오가 가득한 눈을 한 채 자리에서 일어서며 종을 울렸다. 사용인이 들어오고, 의사가 이어서 들어왔다.
“앞으로는 너만 여길 드나들어.”
의사는 열심히 고개를 조아렸다.
“예, 폐하.”
“그리고 선황제의 입에서 나온 말을 발설했다간.”
“걱정 마십시오.”
“누구든 너 이외의 인간이 있을 때 선황제가 입을 열거든 깊게 재워 드려.”
“네.”
“약을 많이 써. 설사 죽는다고 하더라도 상관없으니까.”
“네.”
의사가 그 와중에도 가는 눈을 반짝였다. 황제의 편에 서게 된 것이 그에겐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인 것처럼 보였다.
*
“잠깐 노프탈에 다녀와야겠어.”
케이든의 말에 창가에 서 있던 히스가 창문을 닫았다.
“노프탈에?”
“시리율한테 샹들리에 조각 조사를 맡기게. 천천히 알아볼 일이 아니었던 것 같군.”
케이든이 긴 숨을 내쉬며 말했다. 낮의 소란이 거짓말인 듯 밤의 황궁은 고요하기만 했다.
“제아무리 R. D.라도 마물을 다룰 수는 없어. 그건 초대 전쟁 때도 없던 일 아닌가? 우연히 나타난 거라고 해도 뭔가 이상해.”
히스의 해석에 케이든도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인간보다 현명하다는 마물이다. 그런 그것이 굳이 나타나 공격을 했다. 대단한 피해 대신 소란만을 남기며.
“그런데 굳이 지금 다녀와야 하는 이유는?”
“황실에 너무 오래 있었어.”
케이든의 냉한 목소리에 히스가 피식 웃었다.
“네 결혼도 코앞인데 조금만 더 있다가 가지? 황실 결혼은 정말로 내일모레고.”
“가져올 것도 있고.”
아무렇지도 않게 덤덤히 말하긴 했으나, 오랜 지인의 감으로 히스는 케이든이 ‘가져올 것’에 더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가져올 것?”
그런 집요한 질문이 귀찮다는 듯 케이든의 미간이 좁아졌다.
“가서 할 일 하지?”
히스는 어쩐지 복잡해 보이는 케이든을 두고 발걸음을 돌렸다. 아까 낮의 일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결이 조금 달랐다.
싸울 적이 보이면 놀랄 만큼 냉정하고 차가워지는 게 그였다. 한데 늘 냉정했던 그가 조금 달라 보여 히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지금, 차갑다기보단…….
조금 흐트러져 있었다.
“내일 바로 가게?”
케이든은 책으로 향하고 있던 시야를 돌리지 않은 채 짧게 턱을 끄덕였다.
“로하나를 확인해 줘.”
“확인?”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케이든이 입을 열었다.
“혼자 무슨 일을 하려고 할지도 모르니까.”
“무슨 일을?”
히스는 눈을 가늘게 뜨며 저보단 한참 어리지만 어느덧 아주 어른이 되어 버린 케이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잠시 말을 고르는 듯 침묵을 지키던 공작은 탁 소리를 내며 책을 덮었다.
“도망하지 않게.”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히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
시내에서의 소란이 있은 지 며칠이 지났다. 아무도 이렇다 할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제국민들은 자연재해라도 당한 듯 그 일에 대해서 함구했다.
마치 그저 지진 같은 것이 일어났고, 모두가 그에 대해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는 듯이.
시내에서의 소동이 일어난 직후 사라진 케이든에 대한 소식도 그저 잠잠했고 그렇게 시간은 착실하게 흘러 황실 결혼 날 아침이 밝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