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
총 세 차례의 굉음으로 이어진 정체 모를 짧은 공격이 남기고 간 자리는 실제 피해보다도 충격이 더 크게 남았다.
사람들은 눈물과 땀 그리고 피가 묻은 얼굴로 서로 고함을 지르며 거리를 부산스럽게 걸어 다녔고, 먼지는 마치 안개처럼 시야를 뿌옇게 흐렸다.
케이든은 말에서 내리며 거친 한숨을 내쉬었다. 쓸어올린 머리카락 밑으로 어두운 눈이 빛났다.
“공작님, 지시하신 대로 아까 건물 잔해에서 구해 낸 자들입니다.”
히스가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으나, 케이든은 그의 노력이 무색하게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은 채 초조하게 손을 맞잡고 있는 여인 둘과 아이 하나를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 멀어졌다.
“아는 사람이었던 게 아니고?”
히스가 생존자들을 떠나 케이든에게 바짝 붙으며 의아하게 물었다.
“아니.”
“그런데 왜 하필 저 종탑 아래 사람들을 구하라고 날 항만에서까지 보낸 거야, 굳이?”
서늘한 얼굴로 히스가 묻자마자였다. 붉어진 얼굴로 씩씩 열을 내는 남자 서넛이 내뱉는 말이 난리 통에서도 크게 울려 퍼졌다.
“미친 카르크 놈들, 마력을 쓴 것이 분명해.”
“선황제가 단단히 잘못하신 거지.”
사람들의 고성과 비명 속에서 익숙한 비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식의 일이 있고 나면 노프탈에는 인구가 늘었다. 그 춥고 험준한 곳으로 굳이 온다는 것은 수도나 다른 곳에서는 살기가 더 어려워졌다는 뜻이었다.
카르크족의 ‘카’ 자만 들어도 모두 혼비백산했으니.
케이든은 히스의 말에 대답은 하지 않은 채 질문을 던졌다.
“R. D.가 이런 짓까지 할 수 있었나?”
“공작님이 모르시는데 제가 알까요.”
대답하지 않기로 하는 것에는 죽어도 대답하는 법이 없었다. 히스는 간단히 대답을 포기하곤 존댓말로 답했다.
케이든의 심각한 얼굴을 보자 히스 역시 마음이 가라앉았다.
기존의 게릴라식 공격이나 난동과는 달리 처음 보는 공중 폭격이었던 것이 첫 번째, 이상할 정도로 시늉만 낸 공격이었던 것이 두 번째로 이상한 점이었다.
“와, 대단하네. 이 와중에도 곧 죽어도 저건 붙여야 하나 봅니다.”
히스가 가리킨 곳에선 황실에서 어깨를 당당히 펴고 나온 시종들이 다음 주에 있을 황실 결혼 안내문을 붙이고 있었다. 촌극에 가까운 풍경이었다. 그때였다.
“엄마! 이 사람이야, 날 구해 준 사람!”
아까 건물 더미 잔해에서 나온 아이인 듯 새까맣게 먼지를 뒤집어쓴 작은 소녀가 손을 꼭 붙잡은 여인에게 말했다.
히스에서 케이든으로 이어진 여인의 얼굴은 감사의 눈물로 범벅이었다가 금세 당황과 곤혹스러움으로 굳었다.
은발에 누가 보아도 눈에 띄는 미남자. 귀족의 옷차림을 한 그 앞에서 여인은 머리를 조아리면서도 딸을 제 다리 뒤로 급하게 밀었다.
“엄마, 왜 그래!”
“가…… 감사합니다.”
어서 뒷걸음질하려고 하는 여인을 차분하게 내려다보던 케이든은 고개를 끄덕여 가여운 사람이 어서 그 두려운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도왔다.
*
케이든이나 바르디가 이른 대로 공작저에 머물 생각도 없었지만, 나가는 것은 아무래도 어려웠다. 공작저의 마부들조차도 그녀에게 절대 말을 내주려 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응접실에 앉아 초조하게 발을 구르던 로하나는 이러느니 나가 있는 것이 낫겠다 싶어 막연한 심정으로 케이든의 내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려면 그 방법이 가장 빠를 것 같았다.
대외적으로 약혼녀이니, 그의 내실에서 기다리더라도 크게 이상해 보이진 않을 것이다, 하며 안내를 받아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은 지도 시간이 제법 지났을 때였다.
‘아무래도 이건 좀 아닌 것 같다.’
기다리는 모양새라니. 절대 케이든이 걱정되어서는 아니었다. 그가 이 정도 소란에 무슨 일을 겪을 캐릭터는 아니니까. 그럴 사람이 아니니까.
로하나가 몇 번이고 사용인들에게 나간다고 말하고 일어나려다가 그만두기를 반복했을 때였다.
무거운 발소리와 함께 조금 흥분한 사용인들의 인사말이 들렸다. 아무런 대꾸 없이 덜컥 문이 열리고 그와 동시에 사용인의 뒤늦은 설명이 이어졌다.
“로하나 하노버 공녀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역시나 대꾸 없는 그는 조용히 문을 닫더니 예의 태연한 미소를 슬쩍 보였다. 먼지와 약간의 땀에 젖은 것 말고 그는 종전과 똑같아 보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정말 순수하게 무슨 일로 와 있냐고 묻는 목소리에 로하나는 마른침을 삼키고서는 입을 열었다.
“종탑의…….”
“종탑의 사람들은 무사합니다. 내가 히스를 보냈고, 히스가 구해 냈어요. 뭐, 사실 그들의 운이 대단히 좋았던 것이지만.”
리큐어 바로 걸어간 케이든은 생각보다 많은 양을 크리스털 잔에 붓더니 다소 거칠게 병을 세워 놓았다.
“궁금한 건 그게 답니까.”
창가에 기댄 그가 순식간에 한 잔을 비워 내곤 물었다.
“아니요, 그게…….”
“예전부터 느낀 건데, 공녀의 배짱 하나는 알아 드려야겠습니다.”
지나칠 정도로 피로감에 젖은 목소리에 로하나는 한쪽 눈썹을 움찔했다.
“배짱이요?”
“약혼한 사이라곤 하지만 사람들이 뭐라고 할지 걱정하지도 않으시고…….”
그거야 당신이 굳이 결혼을 취소할 것 같지도 않고, 이 수레바퀴가 결혼까진 쉽게 갈 것 같아서 그렇지…… 라는 속마음을 떠올릴 때였다.
쨍하는 소리가 울렸다. 케이든이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크리스털 잔을 내려놓자 대리석 테이블에서 난 소리였다.
잔을 내려놓고 천천히 가까이 다가온 케이든은 소파 앞에 서 있던 로하나 바로 앞에 섰다.
“이런 일이 있었는데도 제 방에서 혼자 이렇게 기다리시기까지 하고.”
가까워진 거리는 아까 길을 함께 걸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는데 그보다 훨씬 위험한 느낌이었다. 로하나는 이상하게 날카로운 그를 올려다보며 미간을 좁혔다.
“제가 남의 눈을 신경 쓰는 사람이 못 되어서요.”
로하나도 물러서지 않고 말했다.
“이런 일이 있다고 오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요?”
“카르크족…….”
낮은 목소리가 로하나를 가로막았다.
“마력으로 공격당한 게 분명한 상황에서 카르크족과 함께 있어도 무섭지 않냐는 말입니다.”
“뭐라고요?”
로하나가 순간 멍해진 얼굴로 물었다. 마력이라니? 원작에선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였다.
둘의 눈동자가 진하게 얽혔다. 그러더니 먼저 입을 연 건 케이든이었다.
“마력이라는 거 정말 몰라서 묻는 겁니까?”
로하나는 재빨리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고 보니 저주받은 자들이라고 해서 사악한 재주를 부렸다는 묘사는 읽은 듯도 했다.
그렇지만 대놓고 마력이라니? 게다가 나름 여자치고는 제일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공녀로 자라면서도 그건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통일 전쟁에 대해서도, 카르크족에 대해서도 알았지만. 마력이라니?
“황실에서 나고 자라서 그런가.”
순간,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이 케이든의 얼굴에 스쳤다. 원작을 읽은 자라면 그가 흑막으로서의 정체를 드러내고 이런 표정을 지었겠다고 알아볼 수 있는 순간이었다.
“진짜 아무것도 모르나 보네.”
도대체 그게 무슨. 미간을 좁히며 한 걸음 정도 떨어져 서는 로하나를 보며 케이든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로하나의 말에 케이든은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를 뱉고는 건너편 소파에 앉았다.
깊숙이 등을 기대고 한쪽 팔을 팔걸이에 걸쳐 올린 모습은 빈틈없이 앉아 옅은 미소를 띠던 이전의 그의 모습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모습이었다.
그것보다 훨씬 자유로웠고. 훨씬 위험했다.
“카르크족에 대해선 아시겠죠?”
“네.”
당신 아버지의 혈통이기도 하죠.
눈을 보고 알겠다는 듯 고개를 조금 끄덕인 케이든은 머리를 쓸어 넘기더니 다시 소파에 몸을 기댔다.
“카르크족에게 아린족이 왜 그렇게까지 배타적인지 궁금하진 않으셨나 봅니다.”
은근 비꼬는 목소리에 로하나의 미간이 깊게 구겨졌다.
빌어먹을 원작은 그녀에게 도움이 되는 법이 거의 없는 것 같았다. 마력의 ‘마’ 자만 나왔어도 이렇게 뒤통수를 맞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로하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도전적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까 말씀하신 대로 전 황실에서 나고 자랐어요. 그런 제가 유난히 모를 뭔가가 뭐죠? 마력이라뇨?”
제법 솔직하다는 듯 케이든을 눈썹을 치켜떴다가 피식 웃었다.
“말 그대롭니다. 사악하고 기이한 힘을 쓸 수 있는 사람이 가끔 나타나죠. 그리고 그 사람은 보통 카르크족이고.”
사악하고 기이한 힘이라, 로하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놓고 마력이 세상 밖으로 나와 눈에 띈 것은 제가 알기론 통일 전쟁 이후 처음일 겁니다. 수도에서는 더더욱.”
“그렇다면 노프탈에선.”
“가끔 있기도 했죠.”
“어떻게 나는 살면서 이런 이야기를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죠?”
기가 막혀 로하나는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했다. 질문이라기보단 탄식에 가까운 어조에 케이든은 서 있던 날을 조금 누그러뜨리는 듯했다.
“워낙 터부시되는 이야기인 데다가…….”
케이든이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말했다.
“이야기할 만큼 대단한 사건이 지난 통일 전쟁 이후론 한 번도 없었으니까, 최소한 수도에서는.”
싸늘한 목소리에 로하나는 잠시 숨을 죽였다.
“원래는 기록이 있기도 했답니다. 통일 전쟁 때 전부 없앴지만.”
“어떤 기록을.”
“카르크족의 마력에 대한 자료.”
무겁고 큰 몸을 아무 힘을 들이지 않고 다시 벌떡 일으켜 세운 그는 리큐어 바로 가 잔에 다시 위스키를 채웠다.
그러더니 그녀에게도 한잔하겠냐는 듯 고개를 까딱했다. 로하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고 케이든은 같은 잔에 같은 양을 담아 로하나 앞에 내려놓았다.
“그래서 제가 한 번도 들은 적도 본 적도 없는 거군요.”
“놀랍게도 궁 밖에선 유명한 이야기랍니다.”
잔을 조금 비운 케이든이 이번에는 조용히 잔을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카르크족의 마력에 대한 이야기 자체를 없애려 제국은 긴 노력을 해 왔습니다.”
로하나는 그 말을 듣고는 눈앞의 잔을 대번에 꺾어 비웠다.
“전혀 몰랐어요.”
“최소한 여기에서는 제법 성공한 것 같군요. 공녀까지 까맣게 모를 정도였다면.”
혼잣말을 하는 그녀를 오묘한 녹색과 푸른빛이 섞인 흑안이 빤히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