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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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든은 당황해 우왕좌왕하며 도망치는 사람들을 거슬러 올랐다.
항만 쪽으로 왕실 군대가 속속 해안가에 집결하는 것이 보였다. 일부 군인이 군복 차림이 아닌 케이든을 알아보고 인사를 했다.
“펠스 중령.”
케이든이 부르자 난리 통의 펠스가 케이든에게 경례를 올렸다.
“하늘에서 마계의 날짐승이 포를 떨어뜨리는 모양입니다. 해안 민가의 피해가 상당합니다.”
마계 짐승이 포를 하늘에서 떨어뜨리다니, 백 년 가까이 나타나지 않던 전략이었다.
케이든도 ‘허가하지 않은’ 수준의 마계 전략이라니, 뭔가 잘못되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는데.
“케이든!”
히스가 어느새 흑마를 타고 나타나 외쳤다. 둘은 곧바로 말없이 중요한 군사 재산인 선함 쪽으로 달렸다.
선함은 오도 가도 못 하고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하늘에서 내리는 공격에 당연히 속수무책일 수밖에.
“제길.”
케이든이 욕을 내뱉으며 검을 꺼내 드는데 흑안에 뭔가가 잡혔다. 폭성이 잦아들고 있었다. 하늘에서 보이던 새도 어느새 사라져 갔다.
“뭐야, 저건.”
히스가 나지막이 내뱉었다.
기껏 나타나서 수도에는 제대로 된 공격을 하지 않고 간다?
케이든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미 빠른 속도로 멀어져 가는 마계의 새는 흰색이라는 것 말고는 특별히 알아볼 수 있는 특징이 없었다.
“무슨 일일까요.”
펠스가 긴장을 놓지 않는 목소리로 물었다.
“알아보지. 우선 서해안 1지구부터 12지구까지 모두 총전투 대비를 지시하십시오.”
케이든이 말했다.
“히스, 넌 종탑으로 가. 밑에 누구라도 있으면 꺼내 주고.”
히스가 조금 의아한 듯 눈썹을 치켜세웠다가 내리더니 고개를 끄덕이곤 말을 돌려 광장으로 향했다.
*
로하나는 서둘러 중앙 황실 홀로 들어섰다.
드레고리도 제 아들은 걱정할 테니, 지원을 요청하는 게 좋다. 그리고 어느 건물이 무너졌는지,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까지 빠르게 보고해야 했다.
탕탕탕.
황제의 집무실을 향해 내달리던 그녀를 급하게 멈춰 세운 건 황제의 목소리였다.
“로하나!”
황제의 붉은 옷과 여우 모피를 두른 바르디였다. 그 뒤에는 귀족 의원들 한 무리가 그를 뒤쫓고 있었다.
“폐하.”
로하나는 저도 모르게 안도한 목소리를 냈다. 어쨌든 그라면 수도의 사람들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주인공이니까.
“다행이다.”
별안간 그가 덥석 로하나를 안았다. 지금은 그럴 사이도, 그럴 때도 더더욱 아니기에 그녀가 예의가 없지 않은 선에서 포옹을 밀어내자 황제도 마지못해 그녀를 놓아주었다.
그래도 바르디는 못내 활짝 미소까지 지으며 로하나를 내려다보았다.
“보고받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수도에…….”
“안 그래도 회의실로 가던 중이야.”
바르디가 손으로 뒤의 귀족 의원들을 가리켰다. 드레고리도 거기 있었다. 그가 조금 불안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그녀의 도망에 대해서는 일절 말이 없던 그는 케이든 델클리프에게 그녀를 넘긴 이상 그녀를 감시하는 것도 그의 역할이라고 생각하는지 예전보다는 관심이 덜해진 눈치였다.
“로하나, 다행이야. 정말 걱정했어.”
바르디는 다시 한번 진심으로 안도했다는 듯 그녀의 손을 쥐어 잡았다가 겨우 놓으며 숨을 내쉬었다. 다급한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행동에 로하나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조금 좁혔다.
“널 찾는다고 사람까지 더 보냈다고.”
그때 마그누스 대공이 다급한 목소리로 황제를 조금 재촉했다.
“폐하, 어서 회의장으로…….”
바르디는 신경질적으로 손을 들어 마그누스 대공의 말을 끊었다. 그러더니 다시 파란 눈이 로하나를 응시했다.
“공작가에서 꼼짝도 하지 마, 로하나.”
일행이 분주히 움직이는 사이, 로하나는 한숨을 쉬며 천천히 발걸음을 뗐다.
그때 별안간 드레고리가 돌아서 가던 로하나의 팔을 거세게 잡아 쥐었다. 일행이 충분히 멀어진 것을 확인한 그가 속삭였다.
“어디에 누구랑 간 거냐.”
로하나가 미간을 찌푸렸다.
“브란드가 위험해요.”
“대답이나 해.”
지나치게 태연한 아버지를 보며 로하나는 새삼스럽게 속으로 혀를 찼다.
“시내에 나갔던 거냐. 누구랑? 황제가 그걸 어떻게 알지?”
델클리프 공작과 있었다고 하면 되겠지만 어쩐지 그 앞에서 케이든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아 로하나는 입을 다물었다. 심지어 보석상에 갔다는 말은 더더욱.
회의장에 마냥 늦을 수는 없었는지 드레고리는 거칠게 그녀를 놓고 발걸음을 빨리했다.
로하나는 멀어져 가는 드레고리를 보다가 그가 잡았던 팔을 툭툭 세게 털었다.
*
“어머나.”
오렐리아가 작은 종잇조각을 손에 든 채 중얼거렸다. 간결한 메시지가 눈에 띄었다. 정교하고 섬세한 필체는 특유의 사인과 함께 마무리되어 있었다.
“그랬구나.”
작은 손이 종잇조각을 양초에 가져다 대자 끝부터 까맣게 그을리더니 곧 타오르기 시작했다.
오렐리아는 손끝까지 종이가 타는 것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손끝에 불길이 닿아 살짝 뜨거웠지만 개의치 않으면서.
재를 후루룩 털어 버리고 밖을 내다보는데, 마침 로하나가 마차에서 내려 중앙 집무실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오늘 아침에 케이든이 그녀와 나간 것을 본 터였는데 혼자 돌아왔다라.
케이든이 어떻게 그녀를 황궁으로 보냈을지 그림이 그려지자 오렐리아는 들떴던 기분이 팍 상했다.
그리고 케이든이 아직 시내라는 점도 공연히 신경이 쓰였다. 물론 그가 이 정도 일에 위험해지진 않겠지만.
‘짜증 나.’
불쾌함을 감추지 않으며 화장대의 서랍을 거칠게 열자 위에 잔뜩 올라가 있던 보석과 장신구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시녀가 계속해서 치워 놓아도 오렐리아가 사들이고 아무렇게나 늘어놓는 속도를 따라가진 못했다.
비스듬히 앉아 종이와 깃펜을 준비하던 그녀가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자 금발이 작은 어깨를 따라 흘러내렸다.
잠시 생각에 잠기던 오렐리아가 깃펜을 잡아 들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런 짓을 저지를 수 있는 것은 ‘그들’밖에 없었다.
샤톤웰의 요르딕 후작을 통해 제안한 그녀의 거래는 무시하고 이런 짓을 굳이 저지르다니.
‘나를 너무 무시하네.’
그러면서도 불타 사라진 쪽지에 담긴 메모를 다시 떠올리자 오렐리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재미있는 일이었다. 역시 대단한 작자들이었고.
오렐리아는 잠시 망설이다가 글을 써 내려갔다.
<친애하는 R. D.에게.>
불길이 번져 가듯 자연스럽게 공백이 채워져 갔다.
*
오후 내내 보고가 이어졌다. 어두운 얼굴의 군인들은 심각한 목소리로 각자의 소임과 피해 상황에 대해 보고했으며, 이 사태의 중심인물을 반드시 발본색원하겠다는 의지를 굳건히 했다.
힉슬리 후작이 목에 핏대를 세웠다.
“카르크족의 소행이 분명합니다. 하늘에서 무언가가 떨어졌다는데…… 그게 카르크족 소행이지 누구겠습니까!”
바르디는 느른한 눈으로 긴 보고를 마친 군대장을 바라보았다.
“그게 무엇인지 정확히 본 자는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군대장이 눈을 내리깔며 고개를 조아렸다.
“하늘에서 무언가가 떨어졌는데…….”
바르디가 비스듬하던 몸을 똑바로 세우며 말했다.
“그게 무엇인지 본 자는 없으나…….”
“예!”
“카르크족 소행은 분명하다? 카르크족의 그 마력이라는 것이 이 정도까지 할 수 있는 것이었나?”
“네.”
이번에 대뜸 냉한 목소리로 대답한 것은 드레고리 하노버였다.
“비록 아주 어릴 때였지만 통일 전쟁을 겪은 자로서 말씀드리자면,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때는 이 정도 공격은 불가능했지만…… 벌써 50년 가까이 지났으니 말입니다.”
바르디는 미간을 좁혔다. 카르크족의 마력은 기껏해야 물건을 좀 옮기거나 어두운 곳을 밝히는 데 쓰이는 정도로만 알았다.
그것조차 기분이 나빠 모두가 몸서리를 쳤지만.
제대로 된 기록은 사악한 힘이 깃들어 있다 하여 제국이 모두 모아 불태워 없앴기에, 그로부터 한참 후에 태어난 바르디가 마력에 대해 아는 것은 전혀 없었다.
‘하긴.’
바르디가 관자놀이를 누르며 생각했다. 고작 그 정도 마력이라면 애초에 아린족에게 그렇게 맞설 수도, 맞설 이유도 없었겠지.
생각이 깊어질수록 너절해지는 기분에 바르디는 욕을 중얼거렸다.
역시 기분 나빴다.
카르크족들을 전부 소탕하지 못한 것은 조부의 실수였다. 진에 빠져 쉽게 포기하고 통일이라는 그럴싸한 이름으로 카르크족까지 품다니.
유리에 공주가 카르크족의 중심 세력이었던 노프탈의 더스틴 델클리프와 결혼한 것은 그런 정략결혼의 일환이라 들었다.
‘나라면 아끼는 딸을 그런 족속에게 인질로 주진 않았을 텐데.’
바르디는 혀를 쯧 찼다. 덕분에 가장 거슬리는 사촌이 생긴 것을 떠올리자 너절하기만 했던 기분이 참을 수 없는 분노로까지 이어졌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돌아온 침실에는 오렐리아가 앉아 있었다. 은빛으로 반짝이는 실내 드레스를 입은 오렐리아는 정말 요정 같았다. 그 모습을 보자 그나마 엉망이었던 뭔가가 억눌러졌다.
바르디는 이미 정해져 있었던 날짜지만 선심 쓰듯 오렐리아에게 말했다. 다음 주에 식을 올리자고.
“정말 당장 다음 주요?”
“어차피 손님들도 전부 와 있고, 더 미룰 이유가 있나?”
오렐리아는 해사하게 웃으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너무 좋아요.”
반짝이는 호박색 눈이 초롱초롱했다. 바르디는 만족한 듯 그런 그녀의 얼굴을 쓸며 생각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