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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일 흑막과의 계약결혼-26화 (26/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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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이지 엉뚱하다. 로하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옆의 케이든을 슬쩍 올려 봤다. 그는 늘 그러하듯 유난히 로하나 옆에 나란히 붙어 선 채 길을 걷고 있었다.

어딜 가냐는 질문에는 따라오라는 태연한 눈빛이 대답을 대신했다.

깨끗하게 닦인 시내의 돌길에 구두 굽 소리가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어딜 가나 눈에 띄는 케이든과 나름대로 수도에 얼굴을 익힌 자가 많은 로하나가 약혼한 채로 돌아다니자 사람들의 시선이 내리꽂혔다.

황태자의 약혼녀였던 그녀가 이제는 공작의 정혼자라니. 호사가들이 얼마나 다양한 이야기를 떠들고 있는지 그는 모르는 걸까.

보통 공녀라면 수치심에 기절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물론 로하나는 일절 신경 쓰지 않았지만.

“그 건은…….”

로하나가 겨우 먼저 입을 뗐다. 케이든이 무슨 일인지 눈으로 물었다.

“정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고마워요.”

“아닙니다.”

은발이 햇살에 반짝였다. 얼굴은 이상하게도 조금 굳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냉랭하게 말하지 않으면 않을수록 그의 얼굴은 역으로 굳어 갔다. 의아한 일이었다.

“왜 굳이…….”

시선을 돌렸던 케이든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동업 선물이라고 해 두죠.”

“그렇군요.”

로하나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정말 고마워질 것만 같아 서둘러 다른 생각을 하려 해도 고마운 것은 고마운 것이었다.

“오랜만에 나오니까 좋네요.”

로하나가 눈을 가늘게 뜨고 햇살이 내리쬐는 거리를 바라보았다.

“그렇군요.”

“그러고 보니 왜 안 물어보세요?”

로하나의 질문에 케이든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혼자 도망치려고 했는지 안 물어보세요?”

케이든의 미간이 조금 좁아졌다.

“철모르는 사람이 별 행동을 다 한다 싶진 않으셨고요?”

다시 한번 떠보는 말에도 그는 반응이 없다.

“그렇게 생각한 적 없습니다.”

케이든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공녀님 나름대로 생각이 있으셨겠죠.”

여전히 석연치 않은 표정을 하던 로하나는 저도 모르게 솔직한 목소리로 털어놓았다. 작은 웃음소리와 함께.

“공작님 속을 정말 모르겠네요.”

“제 속이요?”

“네.”

케이든은 뭐가 궁금하냐고 굳이 묻지는 않은 채 태연한 미소를 지었다. 다만 미소가 어렸던 그녀의 입술과 얼굴에 시선이 더 오래 머문 느낌이 들었을 뿐.

“저와 이혼하고 나면 그다음은 어떻게 되시는 거예요? 그때쯤이면 괜찮을까요, 노프탈이나 아르드골드의 안전이?”

“그렇게 되도록 해야죠. 결국 공녀님께는 죄송한 일이 되어 버리겠지만.”

케이든이 능숙하게 대답했다.

“그렇지 않다는 것 아시면서.”

제 친정을 쉬이 배신하는 여자를 보면서 공작은 무슨 생각을 할까. 흑막은 어떤 생각이 들까.

어쩌면 죽일 필요까진 없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아니면 믿지 못할 자라고 생각해 더 일찍 처단하려 할까.

그때 케이든의 발걸음이 우뚝 멈추는 바람에 로하나도 가까스로 멈춰 그와 부딪치는 걸 겨우 피했다. 멈춰 선 두 사람 앞에 있는 상점을 보고 로하나는 의아한 눈을 했다.

<브리스영>

상점은 제국의 황궁 안의 귀족과 황족에게만 보석을 내보이는 보석상이었다.

모든 것이 기묘하고 이상했다.

첫째, 보석상을 부르면 그만인 것을 그는 왜 굳이 온 사람들 눈에 띄도록 이렇게 요란하게 이곳에 온 것일까.

둘째, 애초에 보석을 굳이 왜 ‘그’가 본단 말인가?

“이런 거 안 하기로 한 것 아닌가요.”

농담과 진담을 섞으며 자못 당황한 모습을 보이는 로하나를 내려다보던 케이든은 흔들림 없이 미소를 지었다.

“그런 내용은 계약 사항에 없었는데요? 역시 서류를 검토하실 시간이 필요하셨던 것 같군요.”

그의 제법 장난스러운 미소와 농담은 로하나를 당황시키기에 충분했다.

“네?”

“들어가시죠.”

로하나가 그를 올려다보자 케이든이 덧붙였다.

“공녀께선 희한하게도 저한테 긴장을 많이 하시더군요.”

미소를 조금 거둔 그가 고개를 숙이고는 거리를 살짝 좁혀 오며 말했다.

“제가 두렵기라도 하신 것처럼.”

로하나는 농담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그의 눈빛을 피하고 싶었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다.

팔로 붙잡는 것보다 강하게 옭아매는 짙은 눈매에, 그보다 오묘한 눈동자에 숨이 가빠지는 것 같을 때였다.

순간 중심이 흔들리며 휘청했다. 별안간 케이든의 팔이 로하나를 감쌌고, 커다란 몸이 순식간에 그녀를 덮었다.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워지는 찰나, 케이든의 눈이 로하나를 지나 하늘에 고정되었다.

로하나가 놀란 눈으로 그와 하늘을 번갈아 올려다보던 그때.

콰콰콰아아앙.

굉음이 울렸다.

평화로운 풍경이 일순간에 바뀌었다. 다시 한번 울리는 굉음에 이어서 사람들의 비명이 도시를 채웠다.

이명과 함께 중심을 잃은 몸이 휘청였다. 아름답고 소름 끼치는 소리가 날카롭게 귓가를 울렸다. 모든 소란을 뚫고 또렷하게 들리는 소리는 노랫소리 같기도 했다.

이명치고는 특이하다고 생각하며, 넘어졌어야 할 것 같은 몸이 아직 멀쩡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로하나!”

낮은 목소리가 치고 들어왔다. 현실감이 순식간에 그녀를 에워쌌다.

그녀를 한 팔로 감싸 끌어안다시피 하고 있던 케이든은 로하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시선을 하늘로 다시 돌렸다.

로하나는 그제야 그 굉음이 바로 옆 건물의 탑과 위층 부분이 붕괴되는 소리였다는 것을 알았다.

건물 안에 있던 사람들이 놀란 사슴처럼 우왕좌왕 뛰어나오고, 온갖 욕지거리와 비명이 공기까지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그때였다. 다시 굉음이 울렸다. 건물이 무너지는 소리였다. 로하나는 저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뜨고는 제 몸을 여전히 단단히 안고 있는 케이든을 올려다보았다.

케이든의 시선은 날카롭게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하늘에 뭐가 있어?’

로하나 역시 하늘로 시선을 돌렸을 때였다. 그녀를 안고 있던 단단한 팔이 풀리더니 순식간에 먼지바람이 일었다.

“아니, 이 미친놈이! 위험하게 뭐 하는 짓이야?”

달려 나가려는 말을 그대로 막아 세우다 못해 느슨했던 고삐를 낚아챈 케이든이 표정 변화 없이 건조하게 말했다. 시선은 여전히 하늘에 고정된 채였다.

“좀 빌리지.”

“뭐라고? 아니, 은발 머리가 어…….”

그 순간이었다. 들어 본 적 있는 익숙한 소리가 날카롭게 허공을 갈랐다.

아비규환 속에서도 선뜩한 금속의 소리가 날카로웠다. 새파란 칼날이 칼집에서 나왔을 뿐인데도 존재가 주는 압도감이 엄청났다.

“내려.”

로하나로선 처음 본 모습이었다. 최소한 제 삶에서는 더더욱. 로하나는 낯선 사람을 보듯 케이든을 바라보았다.

침착한 얼굴과 눈빛에서 뿜어 나오는 살기에 가까운 명령에 사내는 이내 모욕적인 언사를 내뱉으려던 입을 다물더니 엉거주춤 말에서 내려 뛰다시피 도망쳤다.

노프탈에서 카르크족을 진압한 피의 군주.

원작에서만 보았던 모습을 엿본 것 같아 순간 로하나는 가슴이 덜컹했다.

로하나에게 다가온 케이든은 아무 말 없이 시선을 하늘로 향했다.

“다친 덴?”

소란을 뚫고 타고 왔던 마차가 급히 그들 앞에 멈춰 섰다.

“건물 잔해에 사람들이 있을 거예요.”

샹들리에가 박살 나며 떨어졌을 때 저를 초인적으로 보호해 낸 그를 기억해 내며 로하나는 저도 모르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케이든은 그녀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아무 말 없이 거칠게 마차 문을 열었다.

“먼저 가십시오.”

케이든의 시선은 날카롭게 항만 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다시 굉음이 울렸는데 이번엔 건물이 아니라 가까운 바닷가에서 물보라가 일었다.

“케이든, 저 사람들은.”

“황궁에서 나오지 마십시오, 절대.”

공손한 말투와는 달리 케이든은 거칠게 로하나를 밀어 넣었다.

“아니, 잠깐…….”

뭐라 말릴 새도 없이 문이 닫히자마자 마차는 미친 듯이 황궁으로 달렸다.

로하나는 제대로 앉지 못하고 휘청였던 몸을 일으켜 창밖으로 몸을 내밀고 뒤를 돌아보았다. 케이든은 말을 타고 무너진 건물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 순간, 갑자기 날카로운 두통과 함께 소름 끼치는 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울렸다. 아까 이명인 줄 알았던 그 소리였다. 이명치곤 소름 끼치게 아름다운 노랫소리 같기도 했다.

그때 로하나의 시야에 뭔가가 들어왔다. 하늘에 구름의 그림자처럼 뭔가가 있었다.

찰나인 데다가 너무 흐려 정확히 짚을 수 없었지만.

‘새?’

천천히 뇌리에 떠오른 그 황당한 모양새에 로하나가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했다.

“말도 안 돼.”

마차가 거칠게 해안가 도로를 따라 달리다가 급격하게 꺾이는 순간 다시 몸이 휘청였다.

순간 시야를 놓치자 소리도, 그 그림자도 순식간에 종적을 감추었다. 더 이상의 굉음이 이어지지 않고 패닉에 빠진 시내의 아비규환을 벗어나면서 해안 도로 너머 저 멀리서 함선이 보였다.

순간 세 번째 굉음이 울렸다. 이제는 함선에서도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로하나는 창을 열고 고개를 꺾어 하늘을 보았다. 위에서 뭔가가 떨어지고 있었다.

해안가에 떨어진 폭탄이 민가와 주변을 박살 냈는지 먼지가 일었다. 마차는 전속력으로 황궁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부탁하죠.”

로하나가 마부에게 외쳤다.

“공작가 말고, 중앙 황실로 바로 가 주세요.”

마부가 어쩔 줄 몰라 했지만 로하나는 단호했다. 걸어갈 수 있을 만큼 짧은 거리라곤 하지만 그 시간이라도 아껴야 할 것 같았다.

재난 상황이라니.

로하나는 황당해 멍해진 정신을 차리려 제 뺨을 가볍게 찰싹 때렸다.

이런 일이 왜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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