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
오렐리아는 공작저에서 나와 천천히 걸었다. 붉은 튤립으로 가득 장식된 벽면과 기둥들이 새로운 황후의 탄생을 기다리는 듯 탐스러웠지만 마음이 복잡했다.
하노버 공작저에서 기어이 맞닥뜨린 케이든 델클리프.
남들은 모를 미묘한 차이였지만, 오래 알고 지낸 오렐리아에게만 보이는 그의 표정 변화가 그녀의 신경을 긁어 댔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의 심기를 거스르는 것은 기어이 응접실까지 행차하는 케이든보다도 로하나였다.
로하나는 태연하게 그녀와 황제와의 안부를 묻기까지 했다.
‘뭘까.’
오렐리아가 입술을 깨물며 걷는 속도를 올리자 화려한 금발이 율동감 있게 흔들렸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것이.’
세상 착한 척 고상 떨던 모습은 도무지 흔들릴 기색이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그녀의 차분한 태도가 오렐리아는 더 거슬렸다.
‘공작님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성이 난 채 문 앞에 도착했는데, 익숙한 얼굴이 기다리고 있었다.
밀짚색 머리카락을 기름지게 빗어 넘긴 그는 늘 그렇듯 미소를 띠고 있었다. 샤톤웰의 요르딕 후작이었다. 오렐리아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영애님, 아니…… 이제는 곧 황후 폐하라고 부르게 되겠군요.”
느끼하고 끈적한 목소리.
“선물을 가져왔습니다.”
온갖 진귀한 물건이랍시고 떠벌리는 소리를 들으며, 오렐리아는 불쾌한 얼굴을 지우지 않은 채 방으로 들어섰다.
응접실의 문이 닫히고 열 명도 더 될 시녀까지 물리자 둘만이 남게 되었다.
밝은 살구색과 로즈골드 샹들리에가 아름답게 반짝였지만, 오렐리아는 그렇게 마음에 들던 그것들에게도 짜증이 났다.
“협박이라도 하려고 오신 건가요?”
오렐리아의 단도직입적인 말에 요르딕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럴 리가요. 뭘 협박하겠습니까, 제가.”
“제가 카르크족 출신이라는 걸 말할 수는 있겠죠.”
“에이…….”
요르딕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고작 그 정도로 이 정도 일을 어그러뜨린답니까.”
“제 입장은 아주 명확히 보여 드린 것 같은데요. 이렇게 찾아오시기까지 하는 걸 보면…….”
조곤조곤 말하며 영리하게 머리를 굴리던 오렐리아의 눈에 아하 하는 빛이 돌았다.
“어머나, 저를 회유라도 하려는 건가요?”
요르딕은 끈적한 목소리로 입을 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조금은 저를 보는 게 반가우실 줄 알았는데…….”
“제가 왜요?”
오렐리아가 어금니를 살짝 깨물었다.
“‘그곳’에서 과연 배신자를 쉽게 내버려 둘까요.”
“배신자요?”
황금빛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지더니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예쁜 입꼬리를 휘며 오렐리아가 하하 웃었다.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감히.”
요르딕은 그런 그녀를 가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마치 후작께선 ‘그곳’과 상관없다는 듯 말씀하시네요. 후작께서 ‘그곳’ 배후인 걸 모르는 자도 흔치 않은데.”
“어허, 전 ‘그곳’과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그럼 샤톤웰이 관계가 있다고 해야 할까요.”
“어허, 큰일 날 말씀 하십니다.”
“됐고요.”
탁 신경질적으로 말을 끊은 오렐리아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곳’이든, 당신이든, 샤톤웰이든, 어디 할 테면 해 봐요.”
오렐리아의 가는 목소리가 간드러졌다.
“나는 이제 황후니까. 힘은 내가 쥐었어.”
“어휴, 무섭습니다.”
“아, 온 김에 ‘그곳’에 전해요. 내가 거래 하나를 생각하고 있다고요. 그쪽도 아주 거저먹을 제안이라고요. 배신자니 뭐니 말도 안 되는 위세는 이제 그만두고, 주제 파악도 좀 하시고.”
화려한 금발이 어깨를 따라 흘렀다. 오렐리아는 손가락으로 머리끝을 말며 요르딕을 쳐다보았다.
한쪽 입꼬리가 비틀린 모습을 한 남자를 내려다보며 작은 승리감에 도취된 오렐리아가 말을 이었다.
“앞으론 조심하시고요. 이렇게 다시 무식하게 나타나면 거래고 뭐고 없다고도 전하세요.”
*
승마를 마치고 돌아온 로하나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차가운 늦가을 바람은 간단히 무시하는 듯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오랜만에 말을 타니 속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해가 짧아 금방 들어올 수밖에 없는 것이 안타까웠을 뿐.
다른 건 몰라도 체력 하나는 좋았던 그녀였다. 다들 매번 처음 보는 모습인 양 걱정의 인사를 건네 왔지만 민망할 만큼 몸은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새하얀 무명천으로 땀을 닦는 사이 새빨간 비트 주스가 차가운 유리잔에 담겨 나왔다.
로하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테이블 위의 꽃을 한번 보고 유리잔으로 손을 뻗었다. 차고 달콤한 비트 주스가 목을 타고 넘어갔다.
똑똑.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로하나 공녀님.”
문을 연 시녀장의 얼굴이 이상할 정도로 밝았다.
“네?”
“지금 방으로 가 보시겠어요?”
로하나가 의아해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쩐지 시녀들의 분위기가 묘하게 들떠 있었다.
“무슨 일인데 그래?”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모습에 로하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멍하니 서 있던 로하나에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공녀님.”
새카만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묶은 여자가 응접실 소파 앞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서 있었다.
도톰한 스웨이드로 만든 앞치마를 걸친 모습은 처음 보는 복장이었지만 여자의 얼굴을 보자마자 로하나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조디.”
로하나의 목소리가 반가운 탄성으로 흘러나왔다.
“공녀님!”
조디가 뛰어오며 덥석 안겼다. 로하나는 떨리는 손으로 조디를 마주 안았다.
“어떻게……?”
“제가 일하고 있는 곳에서 편지를 받았어요.”
조디가 고이 접은 편지를 주머니에서 꺼내 보여 주며 말했다.
“델클리프 공작님께서 저를 고용하셨어요. 고용하시자마자 바로 노프탈에 들렀다가 공녀님께 다시 파견되어 온 거예요.”
로하나가 편지를 빠르게 훑어 내려 읽다가 다시 조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반가운 마음에 부여잡은 팔은 일전보다 훨씬 건강해진 듯 앙상하지 않았다.
“어떻게……. 위험한데, 여긴…….”
“위험하긴요. 공녀님이 계신 곳인데 뭐가 위험해요.”
조디가 씩씩하게 말했다.
“그런데 공녀님! 벌써 날이 이렇게 추운데 말을 타신 거예요? 아무리 해가 뜬 낮이라지만 이러시면 진짜 안 되지요.”
조디가 나머지 시녀들한테 가자미눈을 뜨며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게다가 델클리프 공작님과의 결혼이라니요. 이럴 수가!”
그러다가 순식간에 밝아진 얼굴로 끊임없이 호들갑을 떠는 조디 때문에 귀가 다 멍멍했지만 로하나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오랜만에 마음 편히 지어 본 웃음이었다.
“결혼 준비는 어디까지 되어 있는 거예요?”
결혼 준비랄 것을 전혀 하고 있지 않을 성격임을 아는지라 공녀를 눈빛으로 나무란 조디는 다시 한번 로하나를 덥석 안더니 준비해야 할 사항을 줄줄이 읊으면서 눈을 반짝였다.
“아직 딱히 이야기된 바는 없는 것 같은데…….”
케이든 델클리프라면 아무래도 전혀 상관없어 할 것 같아 로하나는 무심하게 대답했다.
누가 보아도 정략혼인 데다가 공적인 사무, 그것도 특히나 국방밖에 모르는 공작이 결혼 준비를 신경 쓸 리가 있겠는가.
모든 준비는 하노버 측에서 해야 하겠지만, 로하나도 전혀 관심이 없었기에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런데 조디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 공녀님께서 그러실 줄 알았어요.”
너스레를 떨던 조디의 흑안이 또렷해지더니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요, 공녀님.”
“응?”
델클리프 공작의 서명이 남겨져 있는 고용 확인서를 다시 읽다가 로하나가 고개를 들었다.
“델클리프 공작님과는 언제 어떻게 이런 사이가 되신 거예요?”
순간, 어라 싶은 느낌에 로하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물론 로하나라고 이 상황이 이상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케이든이 왜 굳이 이런 행동을 했는지는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알 수가 없었다. 원작에서도 현실에서도 단서가 없을 그의 행동.
그런데 지금 든 이상한 감은 그것 때문만이 아니었다.
“아, 주제넘었다면 죄송해요!”
조디가 화들짝 놀라며 손을 초조하게 마주 잡았다. 주제가 넘는 질문에 제 오랜 주인이 언짢아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로하나는 서둘러 표정을 풀었다. 그렇게 생각하진 않았다.
“아니야, 그런 거.”
다시 편지로 시선을 내렸던 로하나가 고개를 들며 밝게 말했다.
“글쎄, 특별히 대단한 사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는데. 흔하디흔한 정략결혼 아닌가?”
로하나가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태연하게 대답하자 조디가 작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저는 공작님께서 저를 찾아오셔서 이렇게 재고용하시고 직접 하노버 공작가로 보내신 걸 보고 특별히 다른 사이신가 했었어요.”
“그래?”
로하나가 눈썹을 치켜올렸다가 내렸다.
“저를 이렇게 고용해서 보내 주신 걸 보면 모르세요? 진짜 이게 웬일이에요!”
단순히 케이든 델클리프 공작이 로하나 하노버에게 반해서 잘해 준다고 생각하는지 조디의 재잘거림에선 처음 보는 설렘이 쉼 없이 흘러나왔다.
와락, 로하나에게 한 번 더 안긴 후에야 조디는 신나게 다른 이들에게 인사를 하러 나갔다.
로하나는 걸음을 옮겨 금테를 두른 커다란 거울이 달린 화장대 앞에 앉았다. 천천히 보석함을 열자 일전에 넣어 둔 다이아몬드 핀이 보였다.
<걱정하실까 봐.>
오렐리아가 납치되던 날 밤이 어느새 까마득한 옛날 같기도 했다.
핀을 집어 올리자 촛불에 비친 다이아몬드가 화려하게 반짝였다. 그러다 핀을 내려놓고는 서랍을 열어 종이와 펜을 꺼냈다.
몇 번이나 망설이고 고쳐 쓰느라 귀한 종이를 낭비한 로하나는 미간을 조금 찌푸렸다가 목을 가다듬었다.
어떤 편지든 문서든 쉽게 완성하던 그녀치고는 엉뚱한 행동들이었지만, 우여곡절 끝에 편지를 완성한 로하나가 방에서 나와 가장 가까이 있는 시녀를 불렀다.
“델클리프 공작께.”
시녀 아이는 어린 두 뺨을 발그레 물들이고는 신이 나 고개를 끄덕이곤 걸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