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죽일 흑막과의 계약결혼-24화 (24/125)

24

“축하드려요.”

생글생글한 미소가 반짝였다. 잠시 보였던 틈까지 사라진 그녀는 정말 책에서의 묘사 그대로 다시 햇살 같기만 했다.

꼬일 대로 꼬여 있는 저 스스로를 투사했나 싶어서 로하나는 고개를 갸웃하곤 작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고마워요.”

“제가 케이든 공작님과 오래 친구로 지내 와 알지만…… 정말 좋은 분이시거든요.”

로하나로선 들은 적 없는 차분한 목소리였다.

“제국을 위해서는 못 할 게 없을 분이죠. 다들 칭송하곤 있지만 저는 더 잘 알아요…….”

오렐리아의 눈빛에 쓸쓸한 빛이 어렸다.

“본인에게 카르크족의 피가 흐르고 있음에도 공명정대하게 해야 할 일을 하셨어요. 악스톤을 처단할 때도, 그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으니까.”

로하나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오렐리아도 원작과 마찬가지로 케이든 델클리프를 철석같이 믿고 있는 모양이었다.

황제와 오렐리아의 만남이 뒤늦게 이루어진 것처럼, 어쩌면 정말 모두가 믿고 있듯이 케이든 델클리프가 배신을 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문득 든 순진한 생각에 로하나는 저 스스로 어이가 없어 피식 웃었다.

그러나 입술로는 일단 그녀에게 맞장구를 쳐 주어야 했다. 그의 배신을 누군가에게 선뜻 미리 알리기엔, 아직 정보도 퇴로도 확실치가 않았으니까.

“알아요.”

“네?”

“알아요, 델클리프 공작님이 그러시다는 거.”

태연하게 동의하는 말에 왜인지 오렐리아의 얼굴이 당황한 듯 굳어졌다.

“제가 공작님을 오해할까 봐 걱정되어서 왔다면 그럴 것 없어요.”

로하나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난 삶도, 이번 삶도 남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 주는 데에는 이골이 난 그녀였다.

“영애께서 제가 걱정되어서, 또는 공작이 걱정되어서 그런 중재를 하려 신경 쓰는 것이라면 그러실 것 없다는 말씀이에요.”

오렐리아는 잔잔한 미소를 띤 로하나를 말끄러미 바라보더니 다시 예의 생글거리는 얼굴로 돌아갔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폐하와는 잘 지내시는지요?”

달그락, 하는 찻잔 드는 소리가 로하나의 질문과 함께 잠시 길었던 침묵을 깼다. 로하나의 질문에 오렐리아의 황금빛 눈에 묘한 빛이 어렸다.

“……물론이죠.”

황궁 안은 뒤숭숭하기 이를 데 없었다.

제아무리 여주인 그녀라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소설에서 그녀를 주인공으로 보았을 때 이야기였다.

온갖 세력의 견제에 변두리의 보잘것없는 작위뿐인 귀족인 그녀가 적응하기 쉽지 않을 터였다.

하노버 공작과 그 연계 세력들의 수많은 뒷공작이 계속되고 있을지도 모를 터였고.

“아무리 정략혼이라지만 그래도 제가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어요.”

오렐리아의 말에 보랏빛 눈동자가 조금 흔들렸지만 로하나는 입 끝을 끌어 올렸다.

“정략혼이었다고 황제 폐하께서 말씀하시던가요?”

오렐리아가 막 대답을 하려는 찰나였다. 짧은 노크 소리가 그녀를 가로막았다.

“공녀님,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어린 시녀가 조심히 문을 열더니 초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델클리프 공작님께서 오셨습니다. 기다리시라고 할까요.”

대답하려던 오렐리아의 입술에 작은 경련이 일었다. 문을 연 작은 시녀의 뒤로 커다란 그의 모습이 보였다.

다시 예의 새까만 군복을 입은 그가 가만히 서 있었다. 그리고 늘 태연하게 차분한 얼굴은 처음 보는 불쾌함으로 굳어져 있었다.

짙은 눈매의 그림자가 오렐리아를 바라보다 옆의 로하나에게로 옮겨졌다. 로하나는 별생각 없이 오렐리아로 시선을 돌려 입을 뗐다.

“음……. 그럼, 미안하지만 제가 보시다시피 선약이 있어서…….”

“아, 그…… 대답을 아직 못 드렸는데.”

오렐리아가 화들짝 놀라는 시늉을 하며 일어섰다. 말을 줄이며 당황하는 몸짓은 아까의 오렐리아보다 훨씬 더 그녀를 아이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됐어요, 중요한 이야기도 아닌걸요.”

바르디 렌트워스가 무슨 말을 어떻게 했든 그녀가 알 바 아니었다. 로하나가 고개를 가로젓는 사이 케이든이 너른 걸음으로 들어왔다.

“공작님, 축하드려요.”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오렐리아가 케이든의 팔을 살짝 잡았다. 사뿐하게 까치발을 한 그녀의 입술이 케이든의 귓가로 다가갔다.

귓속말?

로하나는 저도 모르게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곧 또각또각 작은 구두 소리가 바닥을 울리더니 이어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실례했습니다.”

케이든의 목소리에 로하나는 창밖으로 향했던 시선을 다시 가져왔다.

“아니에요, 처음 보는 일도 아니고.”

아무렇지 않게 던진 말에 케이든이 가늘게 눈을 뜨더니 예의 여유 있는 표정으로 돌아와 제 옆의 손에서 뭔가를 꺼내 보였다. 단정하게 끈으로 묶은 스크롤이었다.

로하나가 건네받아 끈을 끄르는 사이 낮은 목소리가 부연했다.

“계약서입니다. 확인해 보십시오.”

케이든은 날카롭고 짙은 눈매로 그녀를 끌어당기듯 바라보면서 말을 잠시 멈추었다. 로하나는 손으로는 능숙하게 종이를 꺼내며 빠른 시선으로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이상하다고 생각될 정도의 내용에 빠르게 내려가던 시선이 조금 늦어졌다. 잠시 멍하니 한 단어에 멈추어 선 그녀의 시선은 계약 만료일에 꽂혀 있었다.

검은 잉크로 쓰인 날짜는 읽고 다시 읽어도 등줄기에 얼음 조각이 흘러내리듯 로하나를 소름 끼치게 했다.

여름의 시작 날. 미드 서머.

굳이 말하지도 않았는데, 만료일은 1년 중 가장 해가 길다는 여름의 한중간이었다. 원작에서 그녀가 죽는 날이 계약 만료일로 쓰여 있었다.

가열하게 움직이는 수레바퀴 소리가 쿵쿵 귓가에 울렸다. 꼭 오렐리아가 등장했던 순간에 느꼈던 감정이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여느 때처럼 여유 있게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있던 케이든이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로하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그런 케이든과 서류를 다시 한번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니오.”

마른 목소리 사이로 거친 목소리가 작게 흘러나왔다. 케이든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그녀를 조금 깊게 들여다보려 하자 로하나는 서둘러 굳은 얼굴을 조금 폈다.

그녀의 얼굴이 어두워진다면 그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나머지 조건들이 지나치게 후했기 때문이다.

겨우 1년을 같이 사는 대가로 주는 현금과 채권, 그리고 남부의 땅까지.

굳이 왜라는 의문이 남는 부분이지만, 로하나는 만료일에 시선이 꽂혀 별다른 생각을 더 할 수가 없었다.

말없이 계약서만 들여다보고 있는 로하나가 영 이상한지 케이든의 낮은 목소리가 응접실에 이어서 울렸다.

“드레스니 보석이니 결혼식에 대한 것은 제가 몰라서 비워 놓았습니다. 원하시면 전담자를 노프탈에서 보내지요.”

의외의 말에 로하나는 한쪽 눈썹을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뭘 그렇게까지 하느냐는 생각이 그대로 담긴 표정이 저도 모르게 환하게 드러났을 것이다.

“결혼식 때문이라면 그러실 필요 없어요.”

로하나가 미소를 거둔 채 말했다. 냉정을 되찾은 목소리는 조금 망설이다가 그래도 질문을 꺼냈다.

“조건이 너무 후합니다.”

“어떤 부분이요?”

아시면서, 하는 눈을 읽었는지 케이든은 슬쩍 옅은 미소를 지었다.

“저한테는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니 부담 가지실 것 없습니다. 물론, 어느 정도의 협력을 요구할 수는 있겠죠.”

케이든은 사무적으로 말을 이어 갔다.

“협력이요?”

“어차피 드레고리 하노버 공작과 함께 지내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공녀에게 힘을 실어 드리죠. 하노버 공작이 제국에 위해를 끼치지 않게 하려면 결국 공녀님이 돌아갈 친정이 없을 수도 있어서요.”

살벌하고 극단적인 말을 여전히 태연한 얼굴로 한 케이든은 로하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정원에서 나누었던 말보다 훨씬 덜 감정적인 그의 태도를 보며 로하나는 순간 다정하다고 착각할 만큼 기묘했던 케이든에 대한 기억을 바로잡았다.

“하노버 가를 멸문하는 일에 그 딸의 도움을 받고 싶으니, 그 대가로 이 정도는 지불하시겠다는 건가요?”

로하나가 작게 한숨을 쉬며 계약서를 테이블에 내려놓자 케이든의 시선이 그녀의 손을 따라가다 다시 올라왔다.

“굳이 그 정도까지는 하지 않길 바라고 있습니다.”

예의상 옅게 미소 짓는 케이든을 보며, 로하나는 차라리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가 그녀가 이해하기 훨씬 좋은 상태였다.

눈물까지 흘릴 정도로 격앙되었던 정원에서의 조우는 떠올리기만 해도 불편했다.

“황실의 결혼이 있고 나서 그다음 길일에 날을 잡도록 하죠. 운이 좋아 그렇게 멀지는 않더군요.”

황실 결혼이 있기 전에는 다른 결혼이 지양되지만, 그 뒤로는 크게 상관이 없었다.

그래도 바로 다음 길일은 조금 빠르지 않나 싶어 로하나가 케이든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이미 결정한 듯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따라서 자리에서 일어서는 로하나를 기다리던 케이든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미 제 서명은 되어 있습니다. 시간이 필요하시면 사흘 뒤 이 시간이면 되겠습니까?”

로하나는 잠시 ‘미드 서머’ 라는 날짜를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냥 지금 서명하죠.”

“복잡한 내용입니다. 천천히 검토하시는 게…….”

“전혀요.”

복잡할 것 없었다. 로하나는 빠른 속도로 서명을 했다. 마지막 순간 조금 상념에 젖었는지 글자 끝 잉크 자국이 짙게 남았다.

오전의 밝은 햇살이 높다란 창문을 타고 밝게 흘러들었다. 두 장의 계약서가 각자의 손으로 들어갔다.

“그럼.”

케이든이 몸을 일으키자 무거운 의자가 쉽게 뒤로 밀려 긁히는 소리를 냈다.

고개를 까닥하고는 빠르게 나가는 케이든 델클리프의 뒷모습을 보며 로하나도 고개를 간단히 숙였다.

로하나는 깊고 짙은 숨을 크게 내쉬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누구의 편에 서는 것이 그녀의 안전을 보장할 것인가.

케이든 델클리프에게 협력해서 만약 일찍이 그에게서 벗어난다면, 원작에서처럼 그녀를 바르디나 드레고리 하노버를 협박하기 위한 인질로 사용할 겨를도, 이유도 없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만약 케이든의 음모를 미리 바르디에게 폭로한다면? 케이든이 그녀를 죽이기 전에 그를 어떤 방식으로든 처단하는 것이 더 확실한 방법이 될 수도 있었다.

‘그게 가능할까.’

로하나는 이 지난한 고민을 하는 저 자신에게 피로감을 느끼며 테이블 위에 엎드리며 양 손으로 두 눈을 감쌌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