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초대 황제가 아직 생존해 있는데 황위 계승이 있다는 것은 아무리 위세가 대단하다고는 하나 젊은 제국에게는 불안한 행보였다.
그 파격적인 행사에서 기존의 황태자 약혼녀가 바뀌었고, 이어서 그 전 약혼녀가 무려 황족인 케이든 델클리프와 이미 다시 결혼을 약속했다.
이런 사실에 아무도 자정이 훌쩍 넘긴 시간이 되어서도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연회는 막 시작된 듯한 흥분과 표현되지 않는 긴장감 속에 길게 이어졌다.
케이든은 늘 그렇듯 깍듯한 분위기로 예의를 갖추었고, 로하나 역시 늘 그러했듯 자연스럽고 우아하게 시종일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오렐리아의 화려한 붉은 드레스와 바르디의 붉은 가운은 군중을 몰고 다녔으며, 그 군중의 눈은 새롭고 신기한 커플을 향했다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이제 그만 들어가죠.”
먼저 말을 속삭인 것은 로하나였다. 케이든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듣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연회장에 있는 대부분의 시선과 함께 바르디 황태자의 시선이 끈덕지게 붙어 왔지만 로하나는 모두를 깨끗하게 무시한 채 정면만을 응시했다.
공작저에 돌아온 후로도 호기심 어린 시선과 질문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은 채 혼자 젖은 머리카락을 말리자니 로하나는 예전 생각이 났다.
원작에서 그녀가 죽는 것은 해가 가장 긴 하루, 즉 아름다운 여름날이다. 그때 전쟁이 나기 때문에 다른 건 몰라도 그것만큼은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번에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전에 여기와 연을 끊는다.’
어설픈 이런저런 것을 생각했던 것이 멍청하게 느껴져 로하나는 속으로 자책하는 마음을 가눌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쾅.
복도 너머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어수선한 발걸음 소리만 들어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로하나의 미간이 깊게 구겨졌다.
똑똑.
이어진 노크 소리에 로하나는 화장대 앞에서 일어나 응접실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입술 사이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예를 갖추면서도 심히 다급한 노크 소리. 어찌할 바 모르는 시녀와 시종들의 다급한 발소리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쾅, 하고 문이 이내 열렸다. 로하나는 응접실 앞에서 무릎을 굽혀 인사를 올렸다. 더더욱 깍듯이.
“폐하.”
로하나는 머리조차 제대로 말리지 못한 상태가 신경 쓰였지만 바르디는 늘 그렇듯 개의치 않았다.
황제 즉위식의 화려한 의장이 아무것도 꾸미지 않고 있던 로하나와 어색하게 대비되었다.
“사실이야?”
“네.”
망설이지 않고 대답하자 바르디의 푸른 눈이 번뜩였다.
“그래서 노프탈로 떠나겠다고?”
“네.”
“어떻게…….”
약간 끊어지는 목소리에 로하나는 내리깔았던 눈을 천천히 들었다. 시야에 들어온 황제의 얼굴은 정말 놀라울 만큼 고통에 차 있었다.
“어째서?”
어째서라니.
“제국의 안정을 위해서는 이편이 나쁘지 않습니다.”
로하나가 케이든이 했던 말과 동일한 말을 반복하자 쾅, 하고 무지막지한 힘을 가진 주먹이 벽을 내려쳤다.
옆에 있던 높다란 장식장이 크게 흔들렸다. 안에 고이 비치되어 있던 값비싼 유리 장식이 불안하게 진동했다. 그에 반해 로하나는 잠잠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그따위 걸 걱정해서 이러는 거 같아?”
로하나는 똑바로 그를 바라보았다.
“델클리프 공작과 하노버 공작의 연대는 제국 황실의 안정에 기여할 거예요. 샤톤웰 쪽에서 델클리프 공작께 관심을 가지고 계셨다는 것도 아셨지 않습니까.”
혹시 몰라 하노버 공작의 뒷공작에 대해서는 말을 아낀 채 로하나는 말을 이었다.
“그만!”
순간 버럭 성을 내는 목소리가 쩌렁쩌렁 응접실을 울렸다.
“그만해.”
관자놀이를 누르던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불안한 듯 앞뒤로 서성였다.
“로하나.”
성큼 너른 걸음으로 가까이 온 그가 닿을 듯 닿지 않으며 그녀 앞에 바투 섰다. 한참 그녀를 내려다보던 바르디의 미간이 좁혀졌다.
“로하나, 가지 마.”
당당한 목소리였다.
“네가 여길 떠난다는 생각을 해 본 적 없어.”
로하나가 대답할 말이 없어 눈을 가늘게 뜨자 바르디는 시선을 떨궜다.
“미안해.”
괴로운 목소리가 응접실에 퍼졌다.
“그래도 그건 안 되겠어.”
그리고 로하나도 더 이상은 들어 줄 수가 없었다.
“폐하.”
로하나는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순식간에 험악해지는 그의 얼굴을 보면서도 이상하게 겁이 나진 않았다.
그러고선 황태자의 약혼녀였던 그녀가 절대 하지 않았을 말을 입에서 꺼냈다. 아주 최대한 예의 바르게.
“제국에 누를 끼치는 일이 아닌 이상 제 결혼은 폐하께서 상관하실 일이 아닙니다.”
바르디의 푸른 눈이 그녀의 입술을 지나 눈에 고정되었다.
“그러니, 어서 돌아가세요.”
곱게 다리를 굽혀 고개를 숙인 로하나 뒤로 달빛이 아스라이 빛났다.
“밤이 늦었습니다.”
바르디는 그런 그녀를 안타깝게 바라보더니 입술을 꾹 씹었다. 그런 초조한 모습은 그에게서 본 적이 없는 모습이었다.
“케이든은.”
늘 철없는 소년 같던 그에게서 처음으로 진지한 목소리가 흘러나와 정적을 갈랐다.
“네가 생각하는 그런 영웅이 아닐 수도 있어.”
로하나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거야 로하나야말로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 ‘흑막’에 대해서 그녀보다 잘 알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그러나 원작 속 황제는 제대로 배반당하는 순간까지 제 사촌을 미련 맞을 만큼 착하게 믿었었다.
그런데 이런 의심의 싹이 자라나고 있었다니, 바르디 렌트워스도 생각보단 있는 사람이었다.
“그럴 리가요.”
로하나는 빙그레 웃었다.
“그 ‘악스톤’까지 처단하셔서 저희가 이렇게 편안하게 살고 있는 것 아니겠어요?”
로하나는 아린족의 귀한 공녀로서 할 법한 말을 골라 했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살기 위해서 어느 편을 들어야 할지 모르겠으나, 오늘은 그걸 결정하는 날이 아니었다.
특히나 바르디 렌트워스의 말에 대해서는 그 어떤 동의도 하고 싶지 않았다.
“다시 한번 약혼을 축하드립니다.”
때마침 밖이 어수선해지는 인기척을 들으며 로하나는 깊게 허리를 숙였다.
드레고리 하노버의 기척이라는 것을 느낀 바르디 렌트워스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더니 발을 돌려 내실을 나갔다.
거칠게 여닫는 문소리와 다급한 인사 소리와 발소리가 급하게 이어졌다.
로하나는 허리를 숙인 채 깊게 숨을 내쉬었다.
*
새벽같이 일어나 앉아 있던 그녀에게 케이든이 서신을 통해 오후에 방문하겠다는 말을 전해 왔다. 어떤 계약을 하든, 그녀가 쥔 카드는 결국 하노버 공작가였다.
왜 굳이 보내 주겠다는 말을 했을까.
누가 보아도 정략결혼인 마당에, 그의 속내까지 다 아는 로하나가 듣기에는 천 배는 더 이상한 소리였다.
그녀는 뭔가를 심각하게 놓치고 있는 기분이었지만 아무리 되짚어 보아도 도무지 짐작 가는 부분이 없었다.
케이든은 제국의 안정을 위해 샤톤웰과 손을 잡으려는 드레고리 하노버를 저지한다고 했다.
명목상으로든 실체적으로든 지금 그녀가 그에게 제시할 수 있는 카드가 무엇일까.
부실하지만 그녀에게 떠오른 아이디어는 하나였다. 그녀가 하노버라는 사실.
그녀가 유일하게 아직 손에 쥐고 있는 특권이었다. 저가 도망을 계획했다는 사실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음흉한 드레고리로부터 아직까진 별말이 없었으니.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네.”
로하나는 거의 잠을 자지 않아 푸석해진 볼을 양손으로 꾹 눌러 생기를 되찾아 보려 하며 대답했다.
“공녀님.”
새로 온 전담 하녀 중 하나가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손님이 오셨습니다.”
“델클리프 공작?”
거울에 비친 몸에 꼭 맞는 크림색 드레스는 심플하면서도 풍성하고 반투명한 실크 장식의 소매가 우아했다. 시녀는 우물쭈물하면서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왜 그래?”
“아뇨, 그게…… 오렐리아 영애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순간 멈칫하는 발걸음을 다시 제 속도로 움직이면서 나간 응접실에는 오렐리아가 반짝이는 금발을 리본으로 묶은 채 라일락색 시폰 드레스를 입고 앉아 있었다.
“우와, 역시 하노버 공작가는 남다르네요.”
오렐리아가 손을 모으며 말했다.
“나가 있어 줄래.”
로하나가 지시하자 시녀들이 물러나고 문이 닫혔다.
“공녀님, 제가 죄송하다는 말씀을 못 드린 것 같아서요.”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이었고, 들을 필요도 없는 말이었다.
“아니에요, 영애님이 죄송하실 일이 아니죠.”
로하나는 딱 잘라 말했다.
일견 사실이었다. 바람난 놈을 두고 같이 눈 맞은 여자를 탓하랴.
“폐하께서 오셔서 사과하시면 모를까…….”
그러나 과하게 예를 차리며 은근히 저까지 내려다보는 로하나의 말투를 눈치챈 것인지 오렐리아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로하나 공녀님, 케이든 델클리프 공작님과의 정혼이 진행 중이라고 들었어요.”
달칵, 하고 로하나가 찻잔을 내려놓자 오렐리아가 물었다.
“사실인가요?”
로하나는 오렐리아를 바라보았다. 오렐리아의 금빛 눈은 늘 해사한 웃음만이 가득했다.
로하나는 그 웃는 눈빛이 어쩐지 익숙했다. 가장 쉽게 본심을 가리기 위해 저 자신도 눈웃음을 쉽게 짓곤 했으니까.
굳이 케이든의 결혼에 여주인 오렐리아가 관심을 갖는다는 것이 이상해 로하나는 천천히 입을 뗐다.
“네, 사실입니다만.”
그러자 오렐리아는 순간 더 가늘게 눈을 접으며 밝게 말했다.
“그렇군요, 정말 좋은 일이에요!”
짝, 하고 얇고 작은 손으로 손뼉까지 치면서 축하의 뜻을 밝혔지만 로하나는 과한 눈웃음과 그 손뼉 사이로 무언가가 스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꼬집어 무엇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본능적으로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뭔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