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저는 당신에게 유리한 제안을 하고 있는 겁니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답지 않게 조금 흥분한 목소리였다.
“드레고리 하노버는 당신을 레밍턴 캐들러와 정혼시킬 계획이었습니다.”
레밍턴 캐들러는 샤톤웰 여왕 이슬라 캐들러의 오빠였다. 여동생의 권력에 완벽하게 기생하는 그는 취미로 사람을 사냥하기까지 한다는 잔인함과 방탕함으로 유명했다.
하노버 공작가 입장에서는 이미 수틀린 황가보다는 떠오르는 신흥 동왕국 샤톤웰과 결탁해 아르드골드와 샤톤웰 사이에서 ‘중요한’ 세력이 되겠다는 전략이었을 것이다.
원작에선 그렇게까지 세세하게 다뤄지질 않아서 몰랐는데, 이런 물밑 작업이 있었다니.
로하나는 제 아버지의 발 빠른 대처에 허탈해질 정도로 허무함을 느꼈다.
“그치가 어떤 인간인지는 공녀님도 잘 아시겠죠.”
“하지만 공작께는 그게 중요하진 않으셨을 테고.”
신랄하게 중얼거리는 로하나를 무시한 케이든이 무심하리만큼 냉정하게 말을 이었다.
“짐작하시다시피 하노버 공작가와 샤톤웰의 연합은 제국에 부담이 됩니다. 바르디 황제께서 그걸 염두에 둘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케이든이 무심하리만큼 냉정하게 덧붙였다.
“노프탈은 또 다른 전쟁을 감당하고 싶지 않습니다.”
로하나의 눈이 케이든과 다시 마주쳤다.
속으로는 오렐리아를 차지하기 위한 반란을 꾸밀지라도, 그는 최소한 지금 그녀의 앞에서는 제국의 안정을 위해 가장 바른 선택을 하는 충실한 황족이었다.
악스톤을 처단한 카르크족의 배신자다운 얼굴이었다.
“노프탈을 위해서라도 제국에 대한 위협은 제가 막아야겠습니다.”
로하나의 눈이 천천히 깜빡였다. 여세를 몬 케이든의 낮고 단호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어디까지나, 손을 잡는 겁니다.”
차가운 밤바람이 둘을 스치고 지나갔다.
“안전은 보장하죠.”
늘어뜨리고 있던 흑발이 바람에 흩날렸다. 이내 먼저 시선을 돌린 로하나는 케이든을 스쳐 공작가 쪽으로 걸었다. 케이든도 이어서 발걸음을 옮기다 문득 멈추어 섰다.
잠시 뒤를 돌아보는 그의 흑안에 숲속으로 향하던 길목을 보였다. 그땐 꽤 넓어 보였는데 지금 보니 좁고 험하기 이를 데 없었다.
“가시죠.”
제 팔을 내밀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로하나를 내려다보는 눈동자가 익숙한 듯 그렇지 않은 듯 미묘했다.
로하나는 천천히 그의 팔에 손을 끼웠다. 얇은 셔츠 하나를 입었을 뿐인데도 쌀쌀한 날씨를 무시하듯 뜨거운 체온이 느껴졌다.
결국 저를 죽일 자의 얼굴을 보는 것인데도 그 눈빛이 도무지 두렵지가 않았다. 심지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두려운 감정으로 바라보는 그인데도.
“저를 나중엔 보내 주신다고 했던가요?”
케이든은 잠시 망설이는 듯 걸음을 멈추더니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겨우 눈치챌 수 있을 만한 미소가 잠시 떠올랐다 사라졌다.
“언제 어떤 식으로 저희의 결혼을 종료할지도 공작님께서 정해서 말씀해 주실 건지요?”
놀라울 만큼 단단한 팔이었다. 바짝 옆에 붙어 서니 그가 얼마나 저보다 컸는지가 실감이 나, 로하나는 저도 모르게 오르는 긴장을 떨치려 고개를 살짝 저었다.
“계약 내용에 참여하고 싶다는 말씀으로 들리네요.”
“하노버가 제국의 위협이 되지 않을 때가 없을 텐데……. 공작님께서 어떻게 기한을 정할지 모르겠어서요.”
“위협이 되지 않을 때는 제가 만들 겁니다.”
로하나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때를 빨리 만드셨으면 좋겠네요.”
한 해 중 해가 가장 긴 하루, 아름다운 여름날, 케이든 델클리프에게 살해당하는 ‘로하나’를 떠올리며 오늘의 로하나는 입을 열었다.
“그게 공작님께도 도움이 되는 거잖아요?”
케이든이 눈썹을 비틀었다.
“어려울까요?”
“하노버 공작과 사이가 그 정도로 좋지 않은 줄은 몰랐네요.”
로하나는 말없이 제 가방을 들어 보였다.
“일 열심히 해야겠네.”
깍듯한 극존칭을 하던 그답지 않게 농담을 섞어 대답했다.
정원의 길목을 지나서 대연회장의 유리창 너머로 쏟아지는 빛과 함께 모두의 시선이 그 둘에게 쏟아졌다.
그중 오늘 황제가 된 바르디 콘스탄스 렌트워스의 푸른 눈동자가 로하나에게로 와 꽂혔다.
로하나는 다시 아까처럼 예쁘게 반달눈을 만들어 웃었다. 다시 웃으며 숨어야 할 때였다.
*
황위 계승식 바로 전날 밤.
춥지 않은 날씨에도 하노버 공작가의 서재에는 벌써부터 참나무 장작이 타오르고 있었다.
서재라곤 해도 장서보다 서류가 가득 찬 곳은 먼지 하나 없이 깔끔해 기이하기까지 했다.
붉은 가죽으로 장식한 묵직한 마호가니 의자에는 두 남자가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황제 폐하께서 서거하시지도 않으셨는데 이렇게 황위 계승이라니……. 제국의 령에는 맞지 않는 경우인데.”
드레고리가 위스키 잔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그는 앞에 와 앉은 남자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로하나를 닮았지만 그 결이 다른 보랏빛 눈동자가 예리하게 빛났다. 앞의 남자로부터 조금이라도 초조한 빛을 찾고 싶다는 듯이.
“델클리프 공작께서는 혹시 어떻게 생각하실지요.”
그 기대와는 달리 건너편에 앉아 있는 케이든은 편안히 앉은 채 위스키를 한 모금 하더니 미소 없이 운을 뗐다.
“용건만 간단히 하죠.”
드레고리의 눈이 가늘어졌다.
“제가 보낸 연락은 잘 받으셨는지요.”
케이든의 여유 있는 목소리에 드레고리가 붉은 눈을 치켜떴다. 그때의 서류 더미들을 잊을 리가 있겠는가. 각종 인사와 세금, 무역 비리 건들.
어떤 문제일지언정 드레고리를 이 위치에서 끌어내리진 못하겠지만 자칫 잘못하다간 하노버 공작가의 수많은 돈구멍이 날아갈 지경이었다.
“하하핫.”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턱을 쓸던 드레고리의 눈은 다시 감정 없는 검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열 살짜리 꼬마는 이제 피를 아는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드레고리는 묘하게 불안해지는 심정을 행여 들킬까 봐, 더욱 과장된 목소리를 냈다.
“그래, 이쯤에서 내가 공께서 원하는 것을 물어보면 되겠습니까?”
케이든의 표정 없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두 가지입니다.”
드레고리가 제 손을 맞잡고 의자에 깊숙이 앉았다.
“지트니 상단과 관련된 일은 나에게 넘기십시오. 해상 상단 하나 정도는 나도 가지고 있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
케이든의 짧은 말에 드레고리는 이를 꽉 다물었지만 별다른 첨언을 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또 하나는?”
“로하나 하노버.”
의외의 단어가 튀어나오자 드레고리의 입꼬리가 굳었다. 제 딸의 이름이 여기에서 나올 줄은 몰랐기에. 왜?
“아니, 제 딸아이는…….”
“어쭙잖은 혼처를 알아보는 모양인데…….”
“아니, 혼처라니…….”
“굳이 우리 둘 다 필요 없다는 걸 아는 말은 그만두십시오.”
케이든은 드레고리의 말을 끊더니 잠시 뜸을 들였다.
“제가 하려고 합니다, 그 결혼.”
드레고리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황태자, 아니 황제와의 일이 어그러진 후로 드레고리가 로하나를 가장 좋게 팔 자리를 찾고 있던 것은 사실이었다.
깜찍하게 도망을 준비하고 있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받을 때마다 혼담은 더욱 긴밀하고 빠르게 진행되었다.
그녀의 앙큼한 계획들을 미리 망쳐 놓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으면서.
그런데 이런 제안이라니? 의외의 군침 도는 제안에 드레고리는 저답지 않게 말을 조금 더디어 꺼냈다.
“공작께서…… 로하나와?”
남은 술을 비우고 잔을 내려놓은 케이든이 여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다시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노버 공작, 오렐리아 사건에 브란드 하노버 대위가 엮이는 것을 원치 않으시겠죠. 굵직한 횡령과 인사 비리 건은 물론이고요.”
드레고리는 자신의 잔에 술을 채우다 멈칫했다. 오렐리아의 일까지 이쪽인 줄은 지금 알았다.
둘은 연인 사이였다고 하더니, 역시나 귀신같이 그녀를 구해 낸 모양이었다.
순식간에 드러난 적의는 미소로 가려졌지만 눈빛은 당장에라도 눈앞의 사람을 죽일 듯했다.
“오렐리아 사건에 브란드라니,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요.”
“네, 뭐.”
케이든이 긴 손가락으로 깍지를 끼며 고개를 까딱했다. 굳이 발뺌하려 힘 뺄 것도 없다는 표정이었다.
“어찌나 오래 편하게 사셨는지, 파악하는 게 그렇게 힘들지도 않았습니다. 조심성이 많이 떨어지시더군요.”
드레고리는 말없이 두 잔에 술을 따랐다. 케이든은 잠시 채워진 술잔을 바라볼 뿐 더 손을 대지는 않았다. 장작 타는 빛에 호박색 액체가 반짝였다.
“그럼 저와의 정혼을 추진하는 걸로 알겠습니다.”
“굳이 저희와 사돈을 맺고 싶으실 줄은 몰랐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케이든이 잠시 침묵을 지키다 입을 열었다. 내려다보는 턱 끝이 예리했다.
“제국 최고의 권력자이자 재력가인 사돈을 마다할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드레고리는 미간을 좁혔다. 어쨌든 그의 제안이 아주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굳이 저와 손을 잡고 싶어서 이 정도 뒷공작을 했다는 것은 카르크족 혼혈답게 교활하고 의뭉스러웠다.
이득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며, 기이한 힘을 쓰는 위험한 족속의 후예.
이미 오렐리아 년한테 홀딱 빠진 새 황제에게는 희망이 없다. 노프탈의 케이든 델클리프도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점이 있다면 드레고리가 케이든 델클리프를 남들처럼 믿지는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세상은 카르크족의 정신적 지주였던 악스톤을 케이든이 제거했다는 점에서 그에게 신뢰를 느끼는 모양이었지만, 드레고리의 생각은 달랐다.
케이든이 기억상실에라도 걸리지 않는 한 과연 정말로 그렇게 남들이 생각하듯 황제의 편, 즉 제국의 편에 서려고 할까.
“악스톤 건에 대해서는…….”
예상대로 케이든의 눈이 불쾌한 기색을 띠며 가늘어졌다.
“고맙게 생각합니다.”
드레고리의 말이 비꼬는 반어법이라는 것을 눈치챈 케이든은 그런 그를 보며 잠시 숨을 멈추었다.
“물론 공작께서는 뼈아픈 과거겠지만 말입니다.”
“내가 왜 그래야 합니다.”
“아.”
드레고리가 손을 올리며 케이든의 말을 막았다.
“굳이 우리 둘 다 필요 없다는 걸 아는 말은 그만두시죠.”
아까 케이든이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는 드레고리를 보며 케이든은 피식 쓴웃음을 나지막이 흘렸다.
“정혼을 추진하시죠.”
드레고리가 느긋하게 말했다.
“일단은.”
드레고리가 덧붙인 말에 보이지 않게 이를 아득 문 케이든은 망설임 없이 문 쪽으로 향했다.
쾅, 하고 문이 닫히자 드레고리는 저도 모르게 참고 있던 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