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
“무슨 소리야, 그게?”
빨리도 쫓아온 바르디가 소리쳤다. 케이든은 멀찍이 떨어진 채로 멈춰 섰다.
“무슨 소리냐니요. 들으신 그대로입니다. 아직 로하나 공녀가 허락해 준 건 아니지만…….”
“오렐리아를 좋아할 땐 언제고, 그렇게 마음이 쉽게 변하나?”
바르디의 파란 눈이 연회장에서 새어 나오는 샹들리에 빛에 반짝였다. 케이든이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무슨 말씀이신지는 모르겠지만, 들으신 대로 아시면 되겠습니다. 그럼.”
케이든의 뒤로 히스가 바짝 따라붙으며 정원으로 나갔다. 바르디는 분을 이기지 못한 듯 재차 케이든을 부르려 했지만, 주변에 눈이 너무 많았다.
근위대장이 쩔쩔매는 것을 보고 있던 그는 다시 로하나에게로 발걸음을 돌렸다.
히스가 주위를 둘러본 뒤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무슨 소리야, 하노버 공작가와의 결혼이라니?”
“오렐리아 납치 때 왜 그들을 보냈냐고 물었지?”
약간의 침묵 후에 히스의 눈이 반짝였다.
하노버 공작의 목을 쥔다라. 딸을 갖는 것만큼 좋은 협박도 없긴 할 터. 왜 진작 예상을 못 했는지 히스는 민망한 웃음을 지었다.
다만 경악에 가깝게 번뜩이던 공녀의 보랏빛 눈동자가 떠오르자 마음이 썩 좋진 않았다.
“내가 공녀라고 해도 너희 형제한테 정말 질리겠다.”
히스가 솔직하게 말했다. 케이든은 미간을 펴지 못한 채 밖을 바라봤다. 사실이었으니까.
“무슨 일이야?”
“동부 외곽 지구에서 사고. 산사태라고는 하는데, 누가 봐도 경위가 수상해.”
히스가 보고서를 탁 내려놓으며 말했다.
“마물의 짓이야.”
케이든의 손이 보고서를 빠르게 넘겼다.
“어서 돌아가야 해.”
“안 그래도 그럴 거다.”
“결혼하신다면서요.”
“……밤에 다시 얘기하지.”
폭탄을 떨어뜨린 채 로하나를 혼자 오래 둘 수는 없었다. 케이든은 보고서를 다시 히스에게 휙 넘기며 걸음을 서둘러 연회장으로 돌아갔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 기세에 눌려 케이든에게는 섣불리 질문하지 못한다는 게, 그로서는 참 편한 일이었다.
그런데 돌아온 자리에는 로하나가 보이지 않았다. 비비안만이 얼굴이 상기된 채 앉아 있을 뿐이었다.
“비비안 영애, 로하나 공녀는……?”
“공작님! 아, 네, 로하나 공녀님께서도 금방 공작님 따라간다고 나갔는데…… 못 보셨나요?”
순간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케이든은 서둘러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공작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히스가 뒤에 바짝 붙었다.
“넌 반대쪽.”
케이든이 짧게 명령했다. 히스가 반대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케이든은 거의 뛰다시피 하는 걸음으로 하노버 별관으로 향했다.
대연회장과는 꽤 먼 거리였다. 차가워진 초겨울 밤공기가 매웠다. 하노버 경비병이 앞을 가로막았지만 케이든의 한마디로 바로 물러났다. 긴 다리로 뛰는 발걸음이 빨랐다.
로하나의 내실 앞, 문은 닫혀 있었다.
“로하나 공녀님!”
대답이 없었다. 보통 시녀 중 한 명은 방을 지키고 있을 텐데, 아무런 인기척이 없다.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 거칠게 두꺼운 문을 열어젖히자 희미한 불빛만 있는 응접실이 눈에 들어왔다. 오랜만에 오는 곳이었다.
어둠 속에서 침실 문까지 훤하게 열려 있는 것이 보였다.
벽을 따라 걸어 들어가자 드레스 룸이 나타났다.
가지런히 준비되어 있는 실외용 부츠가 그대로였다. 아마 구두를 신은 채 밖으로 나갔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눈을 들자 공작가 정원으로 나가는 작은 문까지 열려 있는 것이 보였다.
케이든의 얼굴이 구겨졌다. 발걸음을 빨리했다. 작은 문을 지나 미로 같은 정원으로 뛰어들자 그때도 벽처럼 높았던 정원수가 솟아 있었다.
케이든은 집중했다. 그의 기억이 맞다면.
방향은 이쪽!
미로 같은 정원수를 돌고 돌아 겨우 발견할 수 있었다. 막다른 길로 보이지만 사실은 통로인 이곳. 그곳을 뚫고 지나가자 숲으로 들어가는 길목이 드디어 나타났다.
그리고 저 멀리 빠르게 멀어져 가는 그녀가 보였다.
*
“로하나!”
로하나는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얼어붙은 듯 발이 멈추어 섰다.
“로하나 공녀, 내가 설명하겠습니다.”
가방을 쥔 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어떻게 내린 결정이었고, 어떻게 세운 계획이었고, 어떻게 잡은 실행 날이었는데…….
로하나는 이렇게 쉽게 들킨 상황에 기가 막혔다. 지금 냅다 뛰어도 브로커를 만나기 전에 케이든에게 붙잡힐 것이 뻔했다.
그래도 로하나는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필사의 달리기는 얼마 못 가 팔목과 어깨를 잡혀 그대로 돌려세워지고 말았다.
로하나는 불에 데기라도 한 듯 온몸으로 케이든의 팔을 쳐 냈다. 잠시의 침묵이 흘렀다.
“무례했다면 용서하십시오. 하지만 이러실 것까지는 없습니다.”
“이럴 것까지 없다고요?”
로하나가 격앙된 목소리를 억누르며 말했다.
“여긴 어떻게 알았어요?”
아무도 모르는 통로였다. 그래서 오렐리아 납치 때에도 이 길을 통해 굳이 말을 몰았던 것인데.
어떻게?
“로하나…….”
“나를 써서 드레고리든 황태자…… 아니 황제에게든 뭔가를 얻으려고 하는 모양이지만 그거 그렇게 안 될 거예요.”
원작에서도 로하나를 인질로 잡는 행동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딸이 죽어도 애국심에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드레고리 하노버니까.
말해 봤자 미친 소리가 될 것 같은 온전한 진실에 로하나는 목이 막혔다. 다시 움직이려는 케이든의 입술은 터져 나오는 로하나의 말에 가로막혔다.
“절 믿으세요. 드레고리 하노버의 약점을 잡고 싶다면, 내 동생도 남아 있어요.”
케이든의 미간이 좁아지고, 눈썹 밑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러니까 전 그냥 보내 주세요.”
로하나의 목소리가 크게 떨렸다. 목에 단단히 뭔가 걸린 듯 침을 삼키기가 어려웠다.
이렇게까지 동요할 일은 아닌데. 오히려 천연덕스럽게 시치미를 떼야 하는데. 뭐라도 수를 써야 하는데. 주체할 수 없이 솔직한 마음이 흘러나왔다.
그녀답지 않았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냥 제발 좀.”
로하나의 보라색 눈동자에서 핏대가 섰다. 그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흘렀다. 이렇게 또 어설프게 실패하고 싶지 않았다.
케이든과 눈이 마주친 로하나는 결국 고개를 떨구었다.
‘어쩌면 나는 이렇게 늘.’
기어이 구질구질한 눈물이 떨어져 흙바닥을 적셨다. 케이든은 바닥을 쳐다보는 로하나를 보면서 눈을 내리깔았다.
공녀의 반짝이는 드레스 앞자락이 드리워진 흙바닥이 눈물로 젖어 가는 게 보였다. 케이든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아파, 많이?>
어릴 적 그녀의 목소리가 머리에 울렸다.
그때는 제 몸에서 흐르던 피가 바닥에 떨어져 몽글몽글 흙을 뭉치게 하고 있었다. 피로 뭉친 흙 위로 다시 선혈이 떨어졌다.
그날도 달이 밝은 밤이었다.
“로하나 공녀님.”
천천히 다가오는 케이든의 큰 구두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더 다가와 이제 닿을 듯 가까워진 그에게서는 처음 만난 날처럼 눈보라 향이 났다.
천천히 고개를 들자 달빛에 비친 그의 콧대에 그림자가 비쳤다. 짙고 긴 눈매가 그녀를 뚫어지게 내려다보았다.
눈을 마주친 지 얼마나 지났을까, 커다란 손이 아주 조심스럽게 로하나의 팔을 감쌌다.
흠칫하는 그녀를 부드럽게 감싼 그의 팔은 조심히 그녀의 망토를 쥐어 새하얗게 드러난 어깨와 가슴을 덮었다.
“보내 드리겠습니다.”
검은 눈동자가 여러 빛깔로 빛났다. 망토에서 망설이며 떨어진 손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턱을 향했다.
떨구었다고 생각했던 눈물이 목덜미에 맺혀 있었다. 눈물을 가볍게 쓸어 없앤 그의 긴 손가락이 놀랄 만큼 뜨거웠다.
“다만…….”
그리고 이내 이어진 목소리는 더 의외의 말을 했다. 가늘어진 눈매의 검은 눈동자가 달빛에 빛났다.
“제가 보내 드리게 해 주십시오.”
*
“보내 드리겠습니다.”
눈물에 젖었던 로하나의 보랏빛 눈동자가 커졌다.
“다만…… 제가 보내 드리게 해 주십시오.”
로하나는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커다란 눈을 깜빡이자 눈물이 뺨을 따라 흘렀다.
얼마나 되었을까, 로하나는 서둘러 시선을 돌렸다. 내딛는 뒷걸음에 케이든은 조심스럽게 잡고 있던 손을 떼며 뒤로 물러났다. 로하나가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던 케이든이 천천히 입을 뗐다.
“이런 식으로 말씀드리려던 건 아니었지만.”
케이든의 흑안이 로하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저와 계약을 하시죠, 공녀님.”
“계약이요?”
목소리가 갈라졌다.
“아주 잠시 동안…….”
로하나가 케이든을 올려보았다.
“저와 부부로 지내시죠.”
그녀의 눈썹이 움찔했다.
“물론 그 후에는 보내 드리겠습니다.”
“보내 준다는 건.”
“이혼해 드리겠습니다.”
“왜요?”
바로 반박하자 케이든은 목을 가다듬었다.
“왜 그런 수고를 하시죠? 무엇보다…….”
로하나의 목소리가 냉정을 되찾았다.
“제가 그걸 어떻게 믿죠?”
로하나의 눈빛에는 방어와 적대감이 가득했다.
“못 믿으시겠죠. 그런데…….”
케이든이 차분한 목소리로 잠시 뜸을 들였다.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 미간을 찌푸리던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른 대안이라도 있으신가요, 로하나 공녀.”
로하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공녀님 도망은 제가 저지할 겁니다. 이미 엉망이 된 계획까지 고려하면 당신에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밤하늘을 닮은 눈이 그녀의 손에 들린 부질없어 보이는 가방을 스쳤다가 올라왔다. 침묵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