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델클리프 공작, 안녕하십니까.”
그때 처음 보는 사람이 나타나 비비안과 히스가 비운 자리에 앉았다. 케이든의 얼굴이 다시 여느 때의 심각한 얼굴로 굳어졌다.
“요르딕 후작.”
“호이트 요르딕 후작이라고 하오. 샤톤웰의. 아, 공녀님은 잘 모르시려나. 동왕국, 동쪽 나라라고 하면 아시겠죠.”
요르딕은 케이든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더니 로하나에게 자기소개를 했다.
“예, 안녕하세요.”
로하나는 들고 있던 샴페인 잔을 내려놓고 손을 내밀었다. 샤톤웰은 아주 잘 알고 있었지만 굳이 그에게 반박할 가치를 못 느껴 미소만 지었다.
그런데 요르딕의 인사 입맞춤이 지나치게 열정적이었다. 케이든의 미간이 깊게 구겨졌다.
“케이든 델클리프 공작과 친분이 있으신 모양이오.”
보통 영애에게는 오히려 존대를 하는 귀족 문화에서 호이트 요르딕은 대뜸 말을 놓았다.
“네, 그렇습니다만.”
로하나가 냉랭하게 대답했다.
“아하, 제국의 영애님들은 확실히 간드러지는 맛이 부족하군요, 델클리프 경.”
요르딕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케이든에게 동의를 구했다. 로하나의 목소리가 차가웠다면 케이든의 얼굴은 당장 얼음이라도 쪼갤 듯했다.
“흐음…….”
요르딕은 흥미롭다는 듯 턱을 쓸었다.
“일전에 불순한 카르크족을 처리해 주신 것에 대해서 우리 여왕님께서 두고두고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해 드렸는데.”
주민들이 대부분 카르크족인 샤톤웰의 여왕은 카르크족임에도 아린족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었다. 현재로서 일단은.
하지만 곧 그녀의 반란이 시작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아르드골드 제국과의 싸움이 벌어지겠다고 로하나는 태연하게 생각했다.
“충분하셨는지는 모르겠네요.”
“충분했습니다.”
두꺼운 손을 내저으며 요르딕이 말했다.
“그래도 우리 공주님과의 혼사를 원하실 만큼은 아니신가 봅니다.”
로하나는 동그래진 눈으로 케이든을 바라봤다. 케이든의 흑안은 냉정하게 요르딕을 쳐다보고 있었다.
“쓸데없는 말씀이지만, 인사는 고맙게 받지요.”
케이든이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 요르딕을 쏘아 내려다보았다. 로하나는 의외의 정보에 쓸데없이 냅킨을 가다듬었다.
“그나저나, 로하나.”
요르딕의 녹색 눈이 불쾌할 정도로 온몸을 훑었다.
“많이 속상하시겠소.”
“로하나 공녀님, 이오, 후작.”
케이든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괜찮아요, 공작님.”
로하나가 여유 있게 응대했다. 이런 부류의 사람도 참으로 오랜만이네. 이 정도의 수작에 밀릴 그녀는 아니었다.
“아뇨. 상호 합의하에 내린 결정이라, 전혀.”
“드레고리 하노버 공작님께서도 아주 상심이 크시겠죠?”
“그런가 보다 하셨죠.”
로하나가 낭랑하게 대답했다. 그때 나팔이 울리고, 사람들의 환호가 울려 퍼졌다. 새 황제의 등장이었다. 바르디는 환한 웃음을 띤 채 환호하는 귀족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옆에는 붉은 드레스를 입은 오렐리아가 딱 붙어 있었다. 꽃잎같이 섬세한 실크의 흐름이 꼭 아르드골드 제국의 상징, 붉은 튤립 같았다.
“정말 아름답죠.”
요르딕이 끈적하게 말했다. 로하나는 대답하지 않고 그 둘을 바라보았다. 오늘이 그들을 보는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생각보다 담담했다.
“로하나.”
황태자, 아니 이제 황제가 된 바르디가 말을 걸기 전까지는.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 로하나에게 일제히 쏠렸다. 오렐리아는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을 했다. 그래도 그녀에게는 알 수 없는 당당함이 서려 있었다.
“델클리프 공작.”
케이든이 고개를 까딱했다.
“황제 폐하, 안 그래도 지금 델클리프 공작에게 결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으려던 참이었습니다.”
요르딕이 저 멀리 건방진 태도를 치워 버린 채 예의 바르게 말했다.
“아, 벌써 바르디 ‘폐하’께도 말씀드린 거였소?”
케이든이 낮은 음성으로 물었다.
“아, 아주 대략적으로. 우리 공주님이 공작님을 보통 좋아해야죠, 하하하.”
요르딕이 날카로운 눈빛을 숨기며 너스레를 떨었다.
로하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공주라니? 샤톤웰의 여왕은 원작에서 결혼도 하지 않는다. 아이가 없는 것은 물론이고.
“케이든, 축하하네. 내 생각에 아주 좋은 혼처야.”
바르디가 밝은 웃음을 띠며 말했다. 로하나는 들릴 듯 말 듯 한 코웃음을 치며 손에 들고 있던 샴페인 잔을 내려놓았다.
제국의 안녕과 제 황권을 생각하면 노프탈이 샤톤웰과 지나치게 친해지는 건 저가 걱정해야 할 일이지 축하할 일이 아니었다.
국경의 수호자가 적국과 혼약을 맺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황제가 어디 있단 말인가.
‘델클리프 공작이 세린 공주랑 결혼한다는데?’
사람들이 어느새 모여 수군거리고 있었다. 델클리프의 약혼 소식이라며 말이 오갔다.
케이든은 조용히 샴페인 잔을 빙글 돌렸다. 밝은 액체가 찰랑 흔들렸다. 그러더니 한숨을 쉬고는 천천히 잔을 내려놓았다.
“폐하까지 아신다면 지금 상황을 명료히 해 두는 게 낫겠군요.”
“뭘 말이오?”
요르딕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황위 계승식에서 제 이야기를 하기 좀 그렇습니다만…….”
바르디가 눈썹을 치켜떴다. 그때였다.
케이든의 큰 손이 천천히 로하나의 손을 잡아 쥐었다. 순식간에 다가온 케이든의 커다란 몸이 주변 온도를 높이듯 가까웠다.
날카로운 턱이 기울더니 그녀의 귓가에 다가온 목소리가 속삭였다.
부드러운 귓속말이었다. 로하나의 보라색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뭐라고?’
케이든의 지긋한 흑안이 그런 공녀를 바라보았다.
“제가 이미 로하나 공녀에게 청혼을 해 버려서 말이죠.”
쐐기를 박는 듯, 낮고 단호한 음성이 연회장에 울렸다.
*
큰 손이 천천히 로하나의 손을 잡아 쥐더니 몸을 부드럽게 기울여 속삭였다. 어처구니없는 눈으로 황제를 바라보던 로하나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케이든에게 고정되었다.
“저를 믿으십시오.”
그가 부드러운 귓속말로 속삭였다.
케이든은 시선을 로하나에게서 요르딕으로 천천히 돌렸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말이 로하나의 귓가에 들렸다.
“제가 이미 로하나 공녀에게 청혼을 해 버려서 말이죠.”
일순간 정적이 흘렀다. 모두가 입을 딱 벌리고 놀랐지만, 여기에서 로하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케이든은 그런 로하나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모두의 탄성과 호기심 어린 눈동자가 빠르게 로하나에게로 고정되었다.
로하나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케이든을 바라보았다. 심장이 쿵 떨어졌다. 잠시 숨을 멈췄다. 내뱉는 숨에 사람들의 술렁임이 다시 귀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제야 아무 반응 없던 드레고리의 오늘 행동들이 이해가 갔다. 그치가 그럴 인간이 아니지.
‘그렇구나.’
온몸의 핏기가 빠졌다. 누가 얼굴에 찬물이라도 뿌린 듯했다.
‘늦었어.’
이미 드레고리와 이야기를 끝낸 것이다, 케이든 델클리프는. 오렐리아 납치 사건에 대해 입 다무는 것을 대가로 공작가를 인질로 삼은 것이다.
파혼을 외치는 그 순간 같이 있었던 케이든 델클리프. 그가 더더욱 발 빠르게 움직일 것을 예상 못 하다니.
‘멍청해도 정도가 있지.’
그래서 오늘 그녀의 아버지는 놀라지 않았던 것이다.
로하나는 고작 황궁의 경비가 느슨해진다는 이유로 오늘을 도망 날로 잡은 것이 기가 찼다. 저녁 내내 이 삶을 여유 있게 돌아보던 자신에게 혐오감이 들었다.
‘또 그렇게 될까 봐.’
로하나는 이를 악물었다.
‘또 그런 식으로 죽을까 봐.’
로하나는 악몽에서 늘 보는 흰빛과 자동차 충돌을 기억했다. 억울했다. 이렇게 살지도 죽지도 않을 것이다.
로하나는 조심스럽게 심호흡을 했다. 우선 이 자리에서는 자연스럽게 맞춰 주는 것이 낫겠지.
“네……. 그러셨죠.”
모두가 로하나의 붉은 입술에 집중하는 순간, 로하나는 만면에 미소를 띠며 케이든의 팔을 감아쥐었다.
“이렇게 밝히니 민망하군요. 아직 허락을 구하고 있던 참인데…….”
바르디와 오렐리아를 보며 케이든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바르디의 표정이 어마어마했다.
로하나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로하나는 예쁘게 눈웃음을 지으며 케이든을 바라보았다.
“이게 무슨 소리야?”
바르디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로하나를 바라보았다. 로하나는 그런 그의 표정이 어이가 없어 거의 진심으로 웃을 뻔했다.
“말 그대로입니다.”
케이든이 천천히 대답했다.
“로하나, 대답해.”
“공작님께서 충분히 대답한 것 같은데요…….”
로하나가 양손으로 케이든의 팔을 부드럽게 잡았다. 바르디의 표정이 꽤 보기 좋기는 했다.
“아하, 우리 공작님은 갑자기 돌발 행동하는 데 뭐가 있으시다니깐…….”
그때, 어느새 나타난 히스가 케이든의 옆으로 자리했다. 그의 새물새물한 눈웃음 뒤에 가려진 날카로운 빛을 로하나는 보았다.
아마 두 사람의 사전에도 협의가 안 된 공고였던 모양이지.
히스는 로하나에게도 웃어 보이더니 케이든에게 잠시 귓속말을 했다. 입술을 거의 움직이지 않아 무슨 말인지 알기는 어려웠다. 케이든의 얼굴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그러더니 그가 다시 로하나 쪽으로 몸을 숙였다. 가깝게 다가온 그의 입술이 속삭였다.
“로하나 공녀님, 미안하지만 잠시 나갔다 오겠습니다. 혼자 괜찮으시겠습니까.”
미안한 눈빛에 난처한 목소리.
“네, 그럼요.”
로하나는 방긋 웃으며 낭랑하게 대답했다. 더 잘되었지.
사람들의 질문 세례야 적당히 대답하면 될 터이고, 케이든이 히스와 자리를 비우자마자 황제가 된 바르디가 케이든을 쫓아가는 걸 보는 건 생각보다 유쾌했다.
오렐리아는 무슨 연유인지 로하나 앞에 남았다.
“로하나 공녀님!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이에요?”
비비안이 옆에 딱 붙어 앉아 질문 세례를 퍼붓는데, 오렐리아의 가는 목소리가 귀에 들렸다. 아직 테이블 앞에 그대로 서 있는 오렐리아가 좀 이상해 보였다.
무슨 말을 더 하고 싶은 건지 오렐리아는 그 앞을 계속 서성이다 뭔가를 결심한 듯 빠르게 연회장 밖으로 사라졌다.
“로하나 공녀님, 어떻게 이런 엄청난 일을 감쪽같이 비밀로 하셨어요. 제 심장이 다 뛰어서 진짜!”
비비안이 아직도 심장이 뛰는지 가슴에 손을 모으고 물었다.
“아니, 심지어 ‘허락’을 구하고 있다니, 너무 로맨틱하신 거 아니에요? 어떻게 된 거예요. 바르디 황태자 전…… 아니, 폐하랑은 정말 예전에 끝났던 거예요? 오렐리아 영애가 나타났을 때부터? 아니면 사실 그 전부터?”
대답할 말을 못 찾은 로하나는 웃음을 만들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