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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욥이라는 자 조사를 마쳤나?”
“아, 그게 말이지.”
히스가 약간 질린다는 듯 서둘러 대답했다.
“로하나 공녀는 그날 본인이 가지고 있던 서류로 자산을 현금화한 모양이야.”
히스가 설명했다.
“네 추측대로 비밀리에 뭔가를 꾸미는 모양인지 부친이 모르게 하는 일이라고 하더라고. 알아내는 게 어렵지 않을 정도로 겁이 많더군.”
케이든은 딱히 상대가 겁이 많지 않아도 히스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걸 알았지만,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히스가 작정하고 질문을 하면 누구든 진실을 토로하게 되어 있었다.
“문제는 욥이 벌써 드레고리와 내통을 했더라고. 이미 공작에게 다 말했는데 뭘 원하냐고 하는 걸 보니.”
다시 잔을 채우던 케이든의 손이 움찔했다. 위스키가 흐르던 소리가 멈췄다.
“욥의 부인 이야기를 들어 보니 어려운 사정을 공녀가 여러 번 봐줬더라고. 아마 개인적인 신뢰 관계가 있어서 이런 부탁을 한 것 같던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연히 드레고리 하노버 공작 편에 섰겠지.”
케이든이 다시 손목을 기울여 잔을 채웠다. 황금빛 액체가 크리스털에 비쳐 우아하게 일렁였다.
“아무래도.”
지나치게 똑똑하지만 그만큼 지나치게 순진했다. 케이든은 느른해진 눈으로 그녀를 떠올렸다. ‘그때’와 달라진 것이 전혀 없었다.
황제 계승식에 결국 바르디 렌트워스가 오르는 것을 보게 된 것이 영 거북했다. 물론 지금은 ‘가장 적절한 때’가 아니니 그가 칼춤을 추더라도 박수를 치며 내버려 두어야 하겠지만.
케이든은 긴 손가락으로 잔을 쥐었다.
“잠시 드레고리를 보고 올게.”
히스가 입을 딱 벌렸다.
“뭐?”
“상황이 벌어진 김에 오늘 이야기를 마쳐야 될 것 같군.”
본능적으로 가장 좋은 타이밍을 아는 것이 그의 재주 중 하나였다.
그렇게 동부 전체를 통일했고 노프탈을 일으켰다. 협박이든, 사주든, 계략이든 뭐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무슨 일인지 말 안 해 줄 건가.”
히스가 응접실 소파에 다시 앉으며 의미 없이 물었다.
“다녀와서.”
덜컹, 무거운 문이 열리자 밖에서 시종들이 놀라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아, 한 가지.”
케이든의 목소리에 히스가 고개를 돌렸다.
“돌아갈 날짜는 미룬다.”
그 말을 끝으로 문이 닫혔다. 히스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
“공녀님, 정말 이 드레스로 하시겠어요?”
조디는 조금 명랑해졌던 보름간의 기간이 무색하게 다시 푸석해진 얼굴로 힘없이 물었다.
해고를 이해할 수 없다고 밤새 이유를 물으며 울던 조디는 황위 계승식까지만이라도 있게 해 달라고 로하나에게 간곡하게 부탁했다.
마음이 약해진 로하나는 그런 그녀의 마지막 요청을 받아들였다. 어차피 황위 계승식까지는 여기 있을 테니까.
황태자에게 비공식적으로 파혼을 선언한 지 보름이 지나, 어느새 황위 계승식 날이었다.
“응, 아깝잖아.”
결혼식 피로연에서 쓰려던 드레스 중 하나. 푸른 오프 숄더 드레스는 밤하늘의 별처럼 비즈가 화려했다.
로하나는 침대 밑에 마련해 둔 서류와 현금, 금괴 등을 다시 한번 눈으로 확인했다.
이방인들까지 떠들썩한 오늘은 도망하기 가장 좋은 날이었다. 이미 브로커에게 돈까지 전달해 놓았고, 임시 거처까지 모두 온전히 준비해 놓았다.
모든 행사가 끝나고 모두가 밤새워 흥청망청 마시는 사이 로하나는 자연스럽게 이 무대에서 사라지면 되었다.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원작과도 안녕이었다.
황위 계승식이 열리는 대연회장은 렌트워스를 상징하는 붉은 튤립으로 가득 꾸며져 있었다.
금사를 한껏 얽어 짠 카펫과 크리스털로 만든 수십 개의 샹들리에는 아침 햇살에도 눈부시게 반짝였다. 과연 다른 왕국의 귀족들까지 감탄시킬 호화로움이었다.
모든 귀족들이 입장하고 바르게 선 후에 나팔수가 팡파르를 울렸다. 이어서 황제의 의복을 갖춘 바르디가 들어왔다.
하얀 여우 모피로 만든 커다란 망토가 자연스럽게 넓고 두꺼운 어깨에 올라와 있었다.
붉은 예복에 황금색 휘장, 그리고 새파란 사파이어로 장식한 브로치가 그의 눈 색깔과 맞춘 듯 화려했다.
주교의 축복, 황관의 수여, 사람들의 박수와 탄성이 이어졌다. 로하나는 곧 있을 폭탄선언에 아버지가 이성을 잃지 않기를 바랐다.
“새로운 황제를 축복합니다.”
일동이 외쳤다.
“귀빈 여러분.”
바르디가 연설을 시작했다. 새 황제의 첫 연설에 모두가 귀를 기울였다.
“짐은 아르드골드 제국의 위대한 초대 황제, 짐의 조부 콘스탄스 레브론 렌트워스의 명을 받아, 이 자리에 섰소. 아르드골드는 역사에 없는 부흥을 이뤄 낸 제국이오. 그리고 나는 이 자리에서 그 역사를 이어 가겠소.”
바르디가 어렵지 않게 황제 티를 내는 것에 다들 조금 놀라는 눈치였다.
주교가 주관하는 길고 긴 대관식이 끝나고 모두가 축포가 울리기를 기다리고 있는 사이, 바르디가 돌발적으로 입을 열었다. 로하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중대한 발표를 하겠소. 짐의 정혼자를 로하나 하노버 공녀로 알고 있는 자가 많으나…….”
긴 속눈썹을 떨며 보랏빛 눈동자를 내리뜬 로하나가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파혼하였고, 짐은 이 자리에서 새 정혼자를 발표하려 하오.”
많은 관중이 이렇게 술렁이면 이런 소리가 나는구나. 연회장 전체가 커다란 파도에 휩쓸려 떠내려갈 듯 크게 술렁였다.
로하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동생 옆의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의외로 아버지의 얼굴은 지나치게 침착했다.
저렇게까지 표정 관리를 잘하다니, 역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인간다웠다.
반면에 브란드는 누가 와서 뺨을 세차게 때리기라도 한 듯 경악한 얼굴이었다.
“오렐리아.”
젊은 황제가 다시 입을 열자 이번엔 쥐 죽은 듯한 정적이 찾아왔다.
붉은 드레스를 입은 오렐리아가 당당한 발걸음으로 황제 옆에 섰다. 풍성한 드레스 자락이 바닥을 쓸었다.
“내 새로운 정혼자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짝짝.
천천히 박수를 치는 소리에 로하나가 고개를 돌리자 옆 공국 샤톤웰의 요르딕 후작이 박수를 치고 있었다. 현 샤톤웰 여왕의 사촌이라고 했던가.
한쪽 입꼬리가 가득 올라간 그를 보며 로하나는 작게 숨을 들이켰다.
한두 사람의 박수가 이어지자 곧 큰 박수가 터졌다. 바르디와 오렐리아는 행복한 얼굴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계승식이 끝났으니 만찬을 위해 연회장으로 이동하시라는 안내에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로하나는 천천히 드레고리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드레고리가 힉슬리 후작과 이야기를 나누더니 로하나에게는 아무 눈치도 주지 않고 사라진 것이었다.
“누나!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미안, 브란드. 다음에.”
경악을 금치 못하는 남동생이 거의 화가 난 목소리로 물었다. 로하나는 미소를 잃지 않으며 발걸음을 뗐다.
그러자 모두가 로하나와 닿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그녀에게 길을 피해 주었다. 소곤소곤하는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예상도 했고 각오도 했지만 생각보다 공개적인 망신을 당한다는 것이 그렇게 편한 일은 아니었다. 제아무리 로하나라도 저도 모르게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때였다. 한 남자가 로하나 앞에 와 섰다.
“실례가 아니라면.”
케이든 델클리프가 팔을 내밀며 말했다. 로하나는 어느 틈에 나타난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마를 드러내 올린 짧은 은발이 조명에 반짝였다. 넓고 탄탄한 몸이 돋보이게 딱 떨어지는 새까만 예복을 입은 케이든은 이상하게도 침착하고 평온해 보였다.
그린 듯한 깊은 눈매와 콧대, 우아한 미소는 마치 오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자연스러웠다.
로하나가 내밀어진 케이든의 팔을 붙잡자 케이든은 그녀가 잡은 손 위에 다시 손을 포개었다.
“가실까요?”
식사 자리는 정해져 있었으나 케이든은 이를 무시한 채 로하나 옆에 앉았다.
로하나는 밀담은 나중에 밤에 하기로 한 거 아니었는지 의아해 미간을 좁혔다. 호화로운 식사 만찬이 이어지고, 모두 바르디가 다시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괜찮으세요?”
로하나가 말이 없는 케이든에게 먼저 입을 열었다. 원작의 케이든이라면 오늘 같은 날 태연히 샴페인을 마실 것 같지 않았는데, 그는 평온해 보였다.
“저 말입니까?”
케이든이 정말로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제국에 젊은 황제가 탄생하였는데 어찌 안 괜찮겠습니까.”
케이든의 낮은 음성이 또렷하게 들렸다.
“안 그런가요?”
로하나의 눈이 조금 흔들렸다. 다 알면서도 능글맞게 다른 소리를 하는 케이든을 올려다보며 로하나는 솔직하게 토로했다.
사람들의 동정 어린 시선에 제국 내 최고의 화제를 이끄는 케이든과 함께하는 데 대한 호기심 어린 시선까지 더해서 많이 불편하다는 것까지.
“네, 시선이 좀 많이 불편한 것 빼고는 좋은 날이네요.”
로하나 옆은 원래 비비안 힉슬리가 앉을 자리였으나, 케이든은 능숙하게 사람을 시켜 자리를 재배치시켰다.
모두의 시선이 꽂히는 것이 느껴지지도 않는지 케이든은 시종일관 엷은 미소로 모두를 응대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조금 밝아진 목소리였다.
로하나는 원탁 옆에 자리한 케이든을 다시 쳐다보았다. 오늘따라 조금 편안해 보이는 그의 얼굴은 과연 전국에서도 놀랄 만한 수려한 미남이었다.
로하나는 마지막이려니 하고 그런 그의 모습을 조금 더 눈에 담았다.
정략혼을 위한 움직임이라면 노련하고 외교적이었지만, 굳이 지금 이렇게 굴어 준 것이 나쁘지는 않았다.
시선을 돌리자 사람들은 왈츠를 추며 행복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