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죽일 흑막과의 계약결혼-18화 (18/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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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러나.”

어쩔 줄 몰라 하는 시종장과 근위대까지 물리고 두꺼운 문이 덜컹 닫혔다.

그리고 펼쳐진 광경에 네 사람은 잠시 가만히 서 있었다. 오렐리아는 케이든의 허리를 안은 채였고, 케이든의 손은 오렐리아의 팔꿈치께를 잡고 있었다.

얇디얇은 오렐리아의 실내복이 추워진 계절에 어울리지 않았다.

로하나는 눈앞의 광경에 잠시 멍해졌다. 보랏빛 눈동자가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오렐리아의 금발이 허리까지 늘어뜨려져 있었고, 그런 그녀와 마주친 케이든의 두 흑안은 처음으로 당황한 듯 흔들렸다. 입가엔 쓴웃음이 걸려 있었고.

어째서 당황하는 거지.

로하나는 피식 웃음이 날 것 같았다. 어쩌면 눈물이 날 것 같기도 했고. 이 상황이 우습기도 했고, 비참하기도 했다.

“뭐 하는 거야, 두 사람?”

바르디의 목소리가 웅웅거리며 들렸다. 로하나는 천천히 뒤돌았다. 더 이상 저가 있을 곳은 아니었다. 돌아가기에 좋은 순간이었다.

그때 몸을 돌리는 로하나에게 벼락같은 소리가 떨어졌다.

“로하나, 거기 서.”

바르디였다.

“오렐리아 영애님이 잠시 납치 때 상황을 이야기하다가 속상하셨던 모양입니다. 조금 놀라셨습니다.”

오렐리아를 떨어뜨리며 케이든이 낮게 말했다.

“케이든 델클리프, 네가 왜 여기에 있지?”

케이든이 짧은 은발을 쓸어 넘기며 질끈 눈을 감자 수려한 미간이 좁혀졌다.

“오렐리아, 케이든이 찾아왔나? 무슨 짓을 한 거야?”

오렐리아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두 손을 마주 잡았다. 그녀도 참 곤란하겠지. 로하나는 아주 남의 일을 보듯 멍하니 생각했다.

“저…… 전하, 그런 것이 아니라…….”

“남의 여자 탐하는 건 핏줄 내력인가, 케이든? 네 부친은 그것에 그치지 않고 반역에 목이 잘렸었지.”

“전하! 아무것도 아니에요. 제가 그냥 다른 이야기를 하다가 그만…….”

필사적으로 변명하는 오렐리아를 두고 황태자가 빈정거리며 말했다. 그런 모욕의 말에도 케이든은 표정 변화 없이 고개를 살짝 내린 채 듣고만 있었다.

이미 정혼자가 있던 유리에 렌트워스와 결혼했던 그의 부친 더스틴 델클리프를 두고, 사람들은 그가 남의 여자를 탐했다고 말하곤 했다.

그리고 결국 모두가 우려했던 대로 제국에 반역을 꾀하다가 사형을 당한 것은 케이든이 아주 어릴 적에 일어난 일이었다.

선대 황제가 너무나 아낀 딸이었기에 유리에 공주와 그녀의 아들인 케이든은 목숨을 구할 수 있었지만.

오렐리아를 두고 벌써 이렇게 부딪치는구나. 로하나는 바르디를 향했던 시선을 돌려 케이든을 쳐다보았다.

찰나의 순간 로하나와 케이든의 눈빛이 마주쳤다. 그때 로하나는 볼 수 있었다. 저 예의 바른 제국의 수호자가 감춰 둔 눈빛을.

당장에라도 누군가의 목덜미를 물어뜯을 듯한 어둡고 날카로운 눈빛. 그 눈빛에 갑자기 귓가에서 과거의 어떤 소리가 울린 것은 찰나의 순간이었다.

<아파, 많이?>

갑자기 떠오른 생뚱맞은 옛 기억에 로하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어릴 적 자신의 목소리였다.

‘뭐지?’

그 순간, 케이든의 낮은 목소리가 으르렁거리게 들렸다.

“식사를 했을 뿐입니다. 황태자께 결례를 범했다면 사과의 말씀을 올리지요.”

최대한 인내심을 발휘하는 듯 그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근데 그 순간이었다. 오렐리아가 다시 케이든의 팔을 잡았다. 바르디가 숨을 들이마시는 것이 옆에 선 로하나에게도 느껴졌다.

케이든은 필요 이상으로 강하게 그녀의 손을 뿌리치며 발걸음을 내디뎠다. 상심한 오렐리아가 울상을 지었다. 어여쁜 얼굴이 창백했다.

그때였다. 바르디가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격하고 급한 걸음이었다. 그러더니 순식간에 오렐리아를 와락 끌어안았다. 작은 몸이 폭 포개어져 들어갔다.

그 순간, 무언가가 로하나 안에서 정리되었다. 해야 할 말은 해야 하는 것이 옳다.

이기적이었던 것이 아니다. 과거에도, 지금도. 그건 누군가한테 미안할 일은 아니었다.

둘이 있을 때보다 더 적절한 때가 이렇게 나타나다니. 오렐리아가 참 시의적절하게 비명을 질러 주었다 싶었다.

“황태자 전하.”

왜 우는지 모를 오렐리아를 안은 바르디가 로하나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말없이 로하나 옆을 지나쳐 가던 케이든도 발걸음을 멈추어 섰다.

“로하나, 우리 이야기는 다음에…….”

로하나는 천천히 입을 뗐다. 지금이라도 흘러나오는 이 말을 할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는 안도감마저 들었다.

“로하나 마르시아 하노버.”

바르디의 눈이 아까와 같이 굳었다. 상관없었다. 로하나는 다시 또박또박 제 말을 이었다.

“파혼을 요청합니다.”

순간 오렐리아의 입가에서 피어오른 미소도, 당장 옆에 아무도 없다면 저를 아까처럼 위협할 황태자 바르디의 얼굴도 이젠 로하나에게 어떤 의미도 없었다.

얼마나 침묵이 흘렀을까. 바르디의 미간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절대 들을 수 없고 존재해서는 안 되는 말을 들은 듯 싸늘하게 굳은 얼굴에선 지금 로하나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분노가 배어 나왔다.

그러더니 그의 시선은 로하나 뒤에 선 케이든을 향했다.

이제 와 제 사촌이 먼저 연모했던 오렐리아를 안고 있는 것이 눈치가 보이는 건지, 케이든에게로 오래 머물던 시선이 아주 천천히 로하나에게로 돌아왔다.

푸른 눈에는 무엇을 향하는지 모를 화가 가득했다.

“파혼하도록 하지.”

무거운 침묵 끝에 황태자의 성마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못 박힌 듯 멈추어 있던 케이든은 그 말을 들은 것을 끝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멀어지는 걸음 소리를 들으며 로하나는 천천히 무릎을 숙여 인사를 표했다. 끝났다, 일단은.

또각또각.

단단한 굽이 대리석을 낭랑하게 울렸다. 아주 빠른 걸음이었다.

이미 결혼이 취소될 것을 예상했던 것인지 어느새 황궁 내에는 과할 만큼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던 꽃들이 치워져 있었다. 덕분에 가는 길이 일전만큼 길게 느껴지진 않았다.

로하나는 하노버 별관까지 언제 걸어가나 싶을 정도로 기운이 없었지만, 마음은 가벼웠다.

‘됐어.’

원하는 대로 된 바다. 파혼하자고 하는 쪽이 황태자라면 드레고리도 분풀이가 그나마 적을지도 모른다.

로하나는 속으로 쓰게 웃었다. 공작저에 도착하자마자 로하나는 조디를 불렀다. 오래전부터 준비한 것이긴 했지만 막상 입을 떼려니 쉽지 않았다.

“조디.”

조디는 영문을 모른 채 응접실 의자에 앉았다. 로하나는 종이봉투와 작은 보따리를 내려놓았다.

“내일부로 너는 해고야.”

조디는 세상이 두 쪽 나기라도 한 듯 깜짝 놀랐다.

“고…… 공녀님? 그게 무슨!”

“조디, 너도 잘 알잖아. 나는 이제 너희를 지켜 줄 수 없어. 황태자와 파혼하고 오는 길이야. 그리고 곧…….”

로하나는 천천히 입을 뗐다.

“황태자 전하는 황제 폐하가 되실 거야. 드레고리가 가만있지 않을 일이 앞에 태산 같아. 그러니 이런 곳에서 떠나.”

최대한 담담하고 차분하게 로하나는 말을 이어 갔다.

“그동안 너무 고생이 많았어. 여기 추천서야. 수도는 아니지만, 대우는 확실한 곳으로 찾았어.”

조디는 아무 말이 없었다.

“진작 이렇게 했어야 했는데…….”

로하나가 빙긋이 미소 지었다.

“내가 욕심을 부렸어.”

사실이었다. 조디는 어려서부터 로하나의 거의 유일한 친구였기에 고통 중에 산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를 보내 주지 않았다.

보내고 싶지 않았다.

“돈도 조금 넣었어. 내일 아침 후에 떠나. 부탁할게.”

황위 계승식에서 황태자는 파혼을 공식적으로 선포할 것이다. 아버지가 모르게 할 수 있는 시간은 오늘 밤이 마지막이었다.

“공녀님.”

조디가 울먹이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로하나는 최대한 담담하게 그런 그녀의 팔을 부드럽게 쓸었다.

저까지 울어서는 안 되니까. 로하나는 미소를 지은 입술을 강하게 끌어 올렸다.

*

케이든이 내실에 도착하는 소리가 들렸다. 제 방에서 응접실로 걸어 나오던 히스는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묘한 분위기였다. 아주 미묘하게 올라간 입꼬리와 그에 비해서는 얼음장 같은 눈빛. 꼭 전투를 앞두고 있을 때 케이든이 이러했다. 그것도 이길 전투를 앞두었을 때.

히스가 저 자신의 기가 막힌 정보력으로 황제가 황태자에게 생전에 보위를 물려줄 것이라는 것을 알려 주었을 때에도 아무 반응 없던 그였는데.

지금 이 순간, 케이든의 기분이 더 나빠지기는커녕 묘하게 들떠 있는 것은 신기하다 못해 조금 불편하기까지 했다.

히스가 케이든을 아예 이해 못 하겠다는 기분이 드는 것은 요즘이 거의 처음이었으니까.

“잊은 건 아니지?”

히스의 질문에 케이든이 미간을 좁혔다.

“잊다니?”

“바르디 렌트워스가 황위를 계승하는 것에 좀 더 긴장해야 하는 것 아닌가?”

“어차피 금방 있을 일이었어.”

케이든이 리큐어 바에 가 위스키 잔에 술을 따르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영롱한 호박색 액체가 묵직했다.

쇠약한 황제가 앞날이 창창한 데다 젊고, 인기까지 많은 제 손자에게 황위를 물려준다는 것은 제국을 위해서는 환영받을 일이었다.

그러나 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원하는 카르크족에게는 좋은 소식일 수가 없었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렌트워스 황가를 칭송해도 카르크족은 그럴 수가 없다.

그건 ‘그런 일’을 당한 케이든 델클리프에게도 예외는 아닐 거라고 히스는 믿었다. 저의 아버지가 그를 믿었듯이.

케이든은 두서너 모금을 마신 뒤 응접실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러나 눈은 바빴다. 상관없다고 무시하는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날카롭게.

“그래서 다음 계획은?”

다시 크게 잔을 기울이자 목울대가 일렁이며 남아 있던 술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따금씩 벽난로에서 장작이 부러지는 소리만이 들리던 중 탁, 하고 유리잔을 내려놓으며 케이든이 물었다.

“그 욥이라는 자 조사를 마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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