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로하나, 설마 나한테 화가 난 거야?”
텅 빈 보랏빛 눈동자가 바르디의 말에 다시 초점을 찾았다.
“오렐리아 때문에 그래?”
바르디가 술잔을 비우더니 탁하고 탁자에 내려놓았다.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였다. 고작 이 정도 이유로? 하고 묻듯.
로하나는 그런 제 오랜 연인을 낯설게 바라보았다. 그러자 바르디는 그런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로하나의 시선이 손톱 끝에 닿기라도 하면 당장 망가질 것 같은 새하얀 나이트가운을 향했다 돌아왔다.
표정을 바꾸지 마.
로하나는 필사의 힘으로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 올렸다. 안 그랬다가는 보기 흉한 얼굴이 될지 몰랐다.
그녀가 입을 열려는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바르디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천천히 느긋하게 로하나 주위를 몇 번 빙빙 돌았다. 돌 때마다 그 속도가 빨라졌다.
술잔을 대번에 비운 그는 로하나가 앉은 소파 뒤에 다가와서야 불안하게 빠른 걸음을 멈췄다.
“황태자 전하.”
로하나가 입을 열려는 그때, 바르디가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거칠고 새된.
“진정하고 잘 생각해 봐, 로하나. 다시 그 예쁜 입 떼기 전에.”
바르디가 일어서려는 로하나의 어깨를 억지로 눌러 내렸다. 뒤를 올려다보는 보랏빛 눈이 적의에 가득 차 번뜩였지만 그는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이거 놓으시죠.”
“아무 이유 없이 날 걱정하던 그 마음은 어디로 갔어?”
뒤에서 그녀의 어깨를 감싼 바르디가 귓가에 속삭였다.
“참 로하나는 다른 생각을 쉽게도 하는 모양이야.”
쉽다니? 꽉 쥔 손마디가 하얗게 질렸다. 그러나 로하나는 화가 나는 것보다도 본능적인 두려움이 앞섰다.
우선, 이 자리를 벗어나야 했다. 그러나 목 언저리에 놓인 차가운 손은 꼼짝할 기색이 없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공녀님이 원하지 않는다면…….>
로하나는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아까 따라 놓은 찻물이 찻잔의 입가에 가득했다. 조금 더 따르면 바로 넘칠 듯 아슬아슬하게 찰랑이는 찻잔.
<하지 마십시오, 결혼.>
대가를 치르더라도 불쑥 본능적으로 해야 할 말을 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 토바카 호수의 빛을 닮은 황태자의 눈이 더더욱 그 순간임을 확신케 했다.
지금이었다.
“바르디 황태자 전하.”
로하나가 떨리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로하나 마르시아 하노버.”
아주 진작에 했어야 할 말이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높은 여자의 비명 소리가 멀지 않은 곳에서 울려 퍼졌다. 쨍한 그 소리는 차가운 공기를 멀리서 갈랐다. 뭐라고 하는지는 정확하지 않았다.
바르디의 주의가 조금 떨어진 그사이, 그 틈을 타 로하나는 서둘러 바르디에게서 벗어나 자리에서 일어섰다. 몇 걸음 뒷걸음질한 뒤였다.
그때 다시 여자의 높은 목소리가 들렸다. 화가 난 듯 울먹이는 소리 같기도 했다.
“뭐지?”
바르디가 큰 목소리로 질문하자 문을 연 시종장이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그게…… 오렐리아 영애님 방에서 나는 소리 같습니다.”
그 말을 들은 로하나는 문득 황태자가 오렐리아에게 제 처소 바로 옆방을 그녀에게 내줬다는 소문이 자자했던 것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바로 이 옆에 있었겠구나.
“그게 도대체 무슨 개소리야?”
바르디의 목소리가 더 높아졌다.
“그게…… 아까부터 모든 수하를 물리고 계시다고 하십니다.”
시종장이 쩔쩔매며 말했다. 순간, 바르디와 로하나의 눈이 마주쳤다.
로하나도 그 와중에 불길한 생각에 가슴이 덜컹했다. 일전에도 있었던 유례없는 납치 사건, 제 아비가 벌였던 사건이 벌어진 지 고작 며칠이었다.
설마.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발걸음이 바빠졌다. 대리석을 신경질적으로 울리는 바르디의 구두 소리를 뒤따라 로하나도 빠르게 뛰었다.
*
“공작님, 어때요? 꽤 맛있죠?”
오렐리아가 어린아이 같은 말투로 노래하듯 말했다. 케이든은 별 감흥 없이 스테이크를 씹었다.
오렐리아가 또 고집을 피워서 모든 경호원을 물린 덕분에 케이든과 오렐리아는 넓디넓은 오렐리아의 응접실에 단둘이 있었다.
계절에 비해 너무 얇은 실내용 레이스 드레스를 입은 오렐리아가 미소를 띠며 와인을 따랐다.
“건강해 보이니 다행이군.”
케이든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오렐리아가 와인을 마시려던 손을 잠시 멈칫하더니 다시 생글생글 미소를 지었다.
“어디 다녀와요? 노프탈 업무를 여기에서 보려면 책상에만 있어도 바쁠 텐데.”
“시내에 일이 있었어.”
“히스는 들어와 있던데.”
케이든은 말없이 음식을 씹었다.
“엘리에나 백작 영애님과 데이트 중이신 거 같더라고요, 중앙 정원에서.”
케이든은 말없이 오렐리아를 쳐다보았다. 하고 싶은 말을 하라는 냉정한 눈빛이었다.
“로하나 공녀랑 있었어요?”
케이든이 나이프를 들고 있던 손을 내려놓았다.
“어머나, 정말이에요? 오늘 공녀님께 가 보려고 했는데 없더라고요. 둘 다 없는데 히스는 여기 있고……. 대충 찍어 봤죠.”
오렐리아는 태연을 가장하며 아직도 깨작거리던 전채 요리에 놓인 작은 토마토를 포크로 콕 찍었다.
‘정말 로하나랑 있었다고?’
샹들리에가 박살 나며 떨어질 때 그의 몸놀림이 떠올랐다. 웬만한 일에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던 그가 치밀하고 완벽하게 움직였다.
그까짓 아린족, 심지어 하노버 공녀가 다치는 것에 왜 그리 민감했어야 했는지.
“그러다가 황태자님의 질투라도 사면 어쩌시려고 그러세요.”
안 그래도 서늘했던 케이든의 흑안이 차갑게 식었다. 뼈 있는 말이라는 것을 그녀도 그도 잘 알았다.
“이제는 네가 황태자와 연인 관계인 거 아니었나.”
“약혼녀 로하나 님이 계시는데 무슨요.”
오렐리아가 호박색 눈을 시무룩하게 내리깔며 말했다. 케이든은 그런 그녀를 차가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로하나 공녀님이 보통 분이셔야죠. 제가 어떻게 비교가 되겠어요.”
“…….”
“그리고 공작님은 너무하세요. 제가 괜찮은지 궁금하지도 않으셨어요?”
케이든의 차가운 눈매가 조금 누그러지는 틈을 놓치지 않고 오렐리아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작은 손이 뻗어 나와 케이든의 손 위에 내려앉았다.
“어떻게 한 번을 안 찾아오세요?”
그녀의 손이 닿자 케이든은 의자를 밀며 일어났다.
“식사 고마웠네. 다시는 이런 짓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네 면을 생각해 주는 것도 정도가 있어.”
오렐리아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왜 하노버 공작가를.”
오렐리아의 말에 케이든이 우뚝 멈춰 섰다.
“감싸 주고 있어요?”
오렐리아의 호박색 눈이 어느새 격한 감정에 휩싸여 있었다.
“나를 감쪽같이 납치하고 죽이기 직전까지 갔던 거, 능력이나 동기 측면에서 하노버 공작가만 한 곳이 없는데.”
케이든도 무거운 시선으로 오렐리아를 돌아보았다.
“그 ‘하노버’를 칠 좋은 기회를 이렇게 날리는 이유가 뭐예요?”
굳게 다문 입술이 침묵을 지켰다. 오렐리아는 그런 케이든을 올려다보며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분했다, 늘 이런 식인 그가. 늘 제게는 아무것도 보여 주지 않는 그가.
“드레고리 쪽은 충분히 경고해 놓았어. 앞으로도 몇 가지 일이 더 있을 거고. 그 ‘하노버’는 아직 필요해.”
오렐리아가 다시 말을 시작하려는 걸 케이든이 가로막았다.
“이제는 섣불리 움직이지 않을 거야. 미리 설명하지 않은 건 미안하군.”
“제가 걱정되지는 않아요?”
두 사람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어차피 꼬리 자르고 도망갈 인간이라 꼬리를 희생시키지 않을 뿐이야.”
“거짓말. 결국에는 공작님도 하노버 편인 거겠죠.”
“억지 부리지 마.”
“나는 우리가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당신도 그냥 내가 하찮은 하급 귀족인 거죠. 막상 세월 흐르니까 다 잊은 거고.”
오렐리아가 분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오렐리아, 조심해.”
케이든의 경고에도 오렐리아는 멈출 기세가 없었다. 뭔가 이상할 정도로 그녀는 잔뜩 흥분해 있었다.
“역시 공작님도 카르크족은 이런 일 당해도 어쩔 수 없는 종자다 그런 거예요? 이걸 들킬까 봐 매일매일 노심초사한 내 심정은 알아요?”
높아진 목소리가 응접실에 쩌렁쩌렁했다. 감정 기복이 큰 그녀였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갑자기 폭발하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었다.
케이든은 미간을 찌푸렸다. 뭔가 이상했다.
“그런 소리가 아니잖…….”
“우리가 알고 지낸 세월이 얼마인데. 내가 카르크……!”
순간, 케이든이 오렐리아의 입을 덥석 막았다. 오렐리아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기다리기라도 한 듯 온 팔로 케이든을 감싸 안았다. 약했지만, 그녀 나름으로는 온 힘을 다하는 것이 보였다.
“카르크족만 아니었어도, 아니 공작님처럼 혼혈만 되었어도…… 이런 일이 있을 때 아린족인 하노버를 지켜 주진 않았겠죠.”
쓸쓸한 목소리로 속삭이는 그녀를 케이든이 싸늘한 눈으로 내려 보았다.
“너는 황태자의 연인으로 여기 렌트워스궁에 온 거다. 당연히 하노버 입장에서 너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겠지.”
부러질 듯 가는 팔이 파르르 떨렸다. 케이든은 천천히 그녀의 팔을 잡아서 떨어뜨렸다.
“궁은 잔인해.”
문득 떠오른 잔인한 기억에 케이든은 작게 몸서리를 쳤다. 그것을 놓치지 않은 듯 오렐리아의 큰 황금빛 눈이 케이든을 올려다보았다.
“그 정도는 너도 잘 알지 않나. 왜 새삼스럽게 이러는 거지?”
오렐리아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여러 번 말했듯이 나는 네 출신에 관심 없어.”
고개를 기울이며 예전의 태연한 얼굴을 한 케이든이 속도 모르는 소리를 해 댔다.
“그렇게 신경이 쓰이면 바르디에게 경호를 더 강화해 달라고 요청해 보든지.”
“싫어요.”
오렐리아가 다시 다가와 케이든의 허리를 강하게 껴안았다.
“공작님이 직접 지켜 주는 게 나는 더 좋은데.”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저를 올려다보는 오렐리아를 내려다보며 케이든은 한숨을 쉬었다.
강하게 밀쳤다가는 뼈가 부러질 수도 있을 것 같아 팔을 떼어 내려 팔꿈치를 잡은 순간, 오렐리아의 손이 케이든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때였다.
덜컥, 하고 문이 열렸다. 황태자와 그녀였다.
로하나 하노버.
순간, 내려다본 오렐리아의 입꼬리에 아는 사람만 볼 수 있는 씰룩임이 스쳤다.
대단하군.
케이든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런 얕은 수작은 본 적이 없어서 눈치챌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