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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일 흑막과의 계약결혼-16화 (16/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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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케이든은 작게 숨을 내쉬고 걸었다. 복도에서 사람들의 시선이 지나칠 정도로 꽂혀 왔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돌아온 황족이 무슨 생각일지 궁금할까. 소문대로 그저 제국의 충실한 종으로 선망하는 걸까. 아니면, 조롱하는 걸까.

아무래도 상관없었지만.

그답지 않게 머릿속이 복잡해 한 손으로 은발을 쓸어 넘기며 머무는 서관 복도로 접어드는 순간이었다.

무언가 평상시와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무장한 경호대가 케이든의 처소 문 앞에 서 있었고, 사용인들도 평소보다 많았다.

뭐지?

케이든이 오른손으로 칼 손잡이를 쥐며 발걸음을 옮길 때였다. 인파 사이에서 익숙한 인영이 튀어나왔다.

“공작님!”

오렐리아가 금발을 찰랑거리며 달려왔다. 언뜻 보기엔 아이 같을 정도로 작은 체구의 그녀는 케이든처럼 얇은 옷차림이었다.

케이든은 반사적으로 안겨 오는 그녀를 잡아서 멈추어 세웠다.

“공작님! 어떻게 저한테 한 번도 찾아오질 않으세요? 구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도 못 하게 할 셈이세요?”

케이든은 주변을 살폈다. 보는 눈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시녀, 시종들이 소곤거리면서 못 본 체를 했다.

“무슨 일이야?”

“회의는 늦은 낮에 끝났다는데, 해가 다 질 때까지 어딜 다녀오시는 거예요?”

오렐리아가 예쁜 얼굴을 찌푸리며 부루퉁하게 말했다.

“설마 여기 계속 있었던 건가?”

케이든이 오렐리아의 경호원들을 노려보자 다들 어쩔 줄 몰라 하며 눈을 피했다.

오래 기다린 건지 언뜻 잡았던 오렐리아의 몸이 찼다.

“밖은 아직 위험하다고 모두가 설명했을 텐데.”

“그럼 나랑 저녁 먹어요.”

아무에게도 안 들릴 만큼 작은 목소리로 오렐리아가 속삭였다.

“영애님, 벌써 해가 지고 있습니다. 이제 처소로 들어가셔야…….”

경호 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쩔쩔매며 말했다. 케이든은 그를 한번 보고 한숨을 쉬었다.

“같이 안 먹어 주면 저 정말 굶을 거예요, 아시죠?”

오렐리아가 경쾌한 목소리로 살벌한 말을 했다. 케이든은 한숨을 쉬었다. 10년을 봐 온 그녀였다. 절대로 그냥 돌아갈 리가 없었다.

그의 입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식사만이야.”

오렐리아가 신나 하며 손뼉을 쳤다.

“어서 가요! 내 방에 이미 식사 다 준비해 놨어요. 바르디 전하가 얼마나 잘 꾸며 줬는지 구경시켜 줄게요.”

“네 방이라고?”

인상을 쓰는 케이든을 무시하고 오렐리아가 덥석 케이든의 손을 잡았다. 손이 얼음장같이 차가웠다.

“어서 가자!”

오렐리아가 작은 걸음을 종종거렸다.

*

로하나는 화장대에 앉아 작은 나무 상자를 만지작거렸다. 달칵하고 조심스럽게 열자 그 안에 부러진 다이아몬드 핀이 보였다.

브란드와 도망하던 중 망가졌던 그 핀을 케이든이 굳이 다음 날 아침에 가져왔던 것이었다.

가는 손가락으로 들어 올리자 다이아몬드는 오색 빛깔을 내며 화려하게 반짝였다.

길고 곧은 손가락이 핀을 내려놓던 순간 스쳤던 뜨거운 감각이 떠올라 로하나는 낮게 헛웃음을 지었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공녀님.”

조디가 조심스럽게 얼굴을 보였다.

“응?”

“바르디 황태자 전하께서 부르십니다.”

로하나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간다고 전해 드려 줘.”

드르륵, 다이아몬드 핀이 든 상자를 서랍에 넣으며 로하나는 숨을 골랐다. 어쩐지 가슴이 답답했지만, 차라리 잘되었다 싶었다.

하노버의 권력을 위시하듯 하노버 별관은 황태자가 머무는 본궁에서 가장 가까운 건물이었다.

덕분에 제 방에서 출발한 로하나는 느린 걸음에도 꽤 금방 황태자의 내실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얼마 전까진 이런 가까운 거리가 불편해질 줄 상상도 못 했다고 생각하며 로하나는 사용인들 앞에 섰다.

“황태자 전하, 로하나 하노버 공녀 오셨습니다.”

무거운 문이 열렸다. 아침저녁으로 시종이 직접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할 만큼 높다란 창에는 정교하게 직조된 두꺼운 벨벳 커튼이 늘어뜨려져 있었다.

웬만한 홀만큼 넓은 응접실에는 여러 팀이 모여서 파티를 해도 될 만큼 다양한 가구가 여러 곳에 놓여 있었다.

렌트워스 황가의 상징인 붉은 벨벳과 새하얀 여우 모피로 장식된 실내는 다가올 겨울을 대비하듯 꾸며져 있어 따뜻해 보이다 못해 더워 보일 지경이었다.

침실로 이어지는 복도에서 바르디가 나왔다. 그는 편한 차림이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얼굴도 밝았고 적갈색 머리카락은 평상시처럼 흐트러져 있었으며, 푸른빛 눈은 아무 걱정 없는 듯 맑았다.

그 환한 얼굴을 보면 로하나는 요즘 있는 모든 일이 제 상상이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로하나!”

로하나가 말없이 인사를 하는 사이 시종들이 뒤에서 문을 닫았다. 무거운 문이 소리도 없이 단호하게 닫혔다.

“로하나, 잘 지냈어? 저녁 아직이면 같이 먹을래?”

바르디가 리큐어 바로 걸어가더니 크리스털 잔에 위스키를 따르며 말했다.

로하나는 이미 식사했다고 대답하며 자리에 앉았다. 붉은 벨벳으로 장식한 단단한 소파는 금으로 테두리가 마감되어 있었다.

바르디는 천천히 술잔을 가지고 와 맞은편에 앉아 앉았다. 무릎에 팔꿈치를 대며 몸을 앞으로 수그리는 자세였다.

늘 황태자답지 못하다고 지적을 받는데 그걸 고치기는 힘든 모양이었다. 로하나는 그런 잔소리까지 하면서 웃었던 지난날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속으로 삼켰다.

“혹시 기억나?”

무슨 일이냐는 로하나의 눈빛에 바르디의 푸른 눈이 웃음을 띠었다.

“로하나가 나한테 그때 여행 가지 말라고 했던 거.”

<가지 마세요.>

“그때요?”

“어릴 때 말이야. 남부로 가는 거 가지 말라고 했었잖아.”

순간, 15년 전 그날의 기억이 떠올라 로하나는 흠칫 목을 가다듬었다.

그에겐 별거 아닌 기억인 줄로만 알았다. 바르디 황태자는 변덕스럽고 천진난만해 여러 계획이 쉽게 변경되곤 했으니까.

그러니 저의 한마디에 여름휴가를 취소한 것쯤은 금방 잊었을 줄로 알았는데.

“아…… 그러고 보니 제가 그런 철없는 소리를 했었네요.”

“그때, 왜 가지 말라고 하느냐고 물었을 때, 네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기억나?”

새파란 눈은 그녀를 보물 보듯 바라보고만 있었다.

“전하께서 당신이 걱정되시느냐고 물었고, 제가 그렇다고 대답했죠.”

잔잔한 대답에 바르디는 큰 손으로 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랬지.”

순간, 보기 드문 기이한 미소가 그의 얼굴에 스쳤다.

“걱정되느냐고 내가 먼저 물었었지, 네가 먼저 말한 것이 아니라.”

바르디 황태자는 이렇게 선문답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로하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보다 하고 싶은 말이 따로 있을 텐데. 이별을 앞두고 과거 팔이라니. 유책이 있는 쪽에서 꺼낼 주제로는 더더욱 적합하지 않았다.

그때 바르디가 침묵을 깼다.

“할 이야기가 있어.”

올 이야기가 왔구나 싶어 로하나는 차라리 반가운 마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네.”

그런데 들려온 말은 뜻밖의 말이었다.

“황제 폐하께서 나에게 황위를 먼저 계승하시기로 하셨어.”

그럴 리가.

커다란 보랏빛 눈동자가 흔들렸다. 원작에선 황제가 서거하면서 황태자 바르디가 계승식에 오른다. 그런데 어째서?

“어떻게…….”

“알아. 모두가 말렸지만 황제 폐하께서 뜻이 확고하시네. 그래서 말인데, 황위 계승식을 먼저 해야 하니 우리 결혼은 좀 미뤘으면 해. 미안하게 되었어.”

둘의 눈이 진지하게 마주쳤다. 로하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하, 혹시 결혼을 망설이시는 거라면 지금이라도 알려 주셔야 마땅합니다. 만약 황위를 계승하신다면 더더욱이요.”

그 말을 들은 바르디의 미간이 깊게 구겨졌다. 적갈색 머리카락 사이로 푸른 눈이 가늘어졌다.

“당신은 나를 붙잡을 생각은 전혀 하지 않네.”

“네?”

“어떻게 오렐리아와 내가 어떤 관계인지는 묻지도 않는 걸까. 꽤 시간이 흘렀는데도 말이야.”

순간 어이가 없어 헛기침이 날 뻔한 것을 로하나는 간신히 참았다. 이걸 보고 적반하장이라고 해야 할까.

“전하께서 이미 ‘친구 사이’라고 명명하셨는데 제가 뭘 더 여쭈어야 했을까요?”

로하나의 뼈 있는 말에 이번엔 바르디의 얼굴이 대번에 굳어졌다.

“그리고 한 가지 말하지 않고 넘어간 게 있는데…….”

소년같이 해맑은 미소를 짓다가도 이렇게 순식간에 얼굴을 바꾸는 것이 그의 특징이긴 했다.

“샹들리에 관리자는 물론, 조명 관리자 전부의 목을 친 것에 대해서 들었을 텐데, 어떻게 나한테 그 고맙다는 말 한마디도 없어?”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하는 것에도 정도가 있었다. 지금, 그걸 칭찬해 달란 말인가. 아이 같은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였나 싶어서 얼굴이 다 홧홧했다.

어이가 없어 답답한 한숨을 숨기던 그때 로하나의 눈에 뭔가가 들어왔다.

창 앞에 놓여 있는, 역시나 금장으로 장식되어 있는 붉은 소파, 그 등받이 위로 낯선 질감의 무언가가 보였다.

정교한 레이스로 짠 새하얀 나이트가운.

마치 급하게 벗어 던져둔 것처럼 나이트가운은 등받이 위로 흐트러진 채 걸쳐 있었다. 새빨간 벨벳 사이사이로 보이는 정교한 나비 무늬의 레이스가 섬세하기 이를 데 없었다.

놀라지 마.

차갑게 굳는 머리와는 상관없이 어쩔 수 없이 뛰는 가슴을 억누르며, 로하나는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을 되씹었다.

무엇을 위해서 이런 꼴을 봐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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