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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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고리 하노버는 자택 서재에 앉아 서류를 처리하고 있었다. 아들의 바보 같은 실수 덕분에 황실의 사돈이 될 입지가 결국 위태로워졌다.
드레고리는 쯧, 하고 혀를 찼다.
어떻게 그 계집을 처리해야 하나.
물론 다시 사람을 쓰는 수도 있었지만 지켜보는 눈이 너무 많아졌다. 브란드가 가장 아끼던 말을 죽이고 그의 절친한 시종에게 물 한 모금 안 주고 있었지만 분이 풀리지 않았다.
귀찮지만 사실 결혼만 하고 나면 나머지야 어떻든 상관없지.
황태자도 생각보다 바보는 아닌지 파혼 같은 소리를 하진 않는다. 젊은 황제에게는 하노버 공작의 돈과 수완과 명예가 반드시 필요했다.
황태자라는 지위와 그 젊은 혈기에 새로운 여자를 안고 지내는 것이야 놀랄 일도, 생각보다 걱정할 일도 아니었을지 모른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뭐야.”
눈도 들지 않고 묻는데 호위 기사인 테라가 들어왔다.
“공작님, 중앙 황실에서 급한 전보입니다.”
“뭔데.”
“폐하께서 위독하시답니다.”
“얼마나.”
“곧 종을 울려야 할지도 모를 정도라고 합니다. 그런데…….”
테라가 목소리를 낮췄다.
“유언을 바꾸고 싶으시다고 계속 그러신답니다. 황궁의에게 전해 들었습니다.”
“누가 알지?”
“아직 공작님뿐입니다.”
“그렇게 유지해. 그리고 황궁의한테 입조심하라고 하고. 안 그러면 후사가 매우 힘들어질 거라고”
드레고리가 명령하자 테라가 고개를 숙이고 나갔다. 드레고리는 가만히 생각했다.
‘결혼이 마무리된 후에, 그다음에 죽으셔야죠, 폐하. 그리고 유언을 바꾸시다니요.’
지금 황제가 죽는 것은 그에게 좋지 않았다. 그는 새로운 혼란이나 그 어떤 변동도 원치 않았다. 물론 오렐리아라는 계집이 나타난 덕에 순항은 글러 먹었지만.
그러다 그의 날카로운 눈에 좀 수상쩍은 것이 띄었다. 드레고리는 빠르게 넘기던 서류를 다시 돌이켜 읽어 보았다.
‘이게 뭐야.’
드레고리의 눈이 당황스럽게 흔들렸다. 팔락팔락, 찢어질 정도로 거칠게 서류 더미를 넘기던 드레고리는 쾅 하고 책상을 내리쳤다.
‘어떤 놈이……!’
난데없이 발견된 서류에는 드레고리가 여태까지 진행한 각종 인사 비리부터 세금 비리가 나열되어 있었다. 어느 정도 증거까지 갖춘, 그야말로 완벽한 협박용 문서.
황궁에 그를 대적할 자는 없었다. 굳이 그를 협박해야 할 자도 없었다. 순간, 오렐리아 브리의 정보를 물어 왔던 테라의 말이 떠올랐다.
<케이든 델클리프 공작저에서 함께 지냈다고 합니다.>
케이든 델클리프. 드레고리는 굵은 손마디를 꺾으며 천천히 생각을 정리했다.
어떻게 해야 하나.
드레고리는 마음대로 굴러가지 않는 상황에 오랜만에 초조함을 느꼈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나중에.”
“공작님.”
테라가 느리고 낮은 목소리로 문을 열었다.
“나중에 오라니까!”
“욥입니다.”
드레고리는 심호흡을 했다. 그러고 보니 딸도 망아지처럼 날뛰고 있었다고 했지.
“욥.”
서둘러 서류를 덮는 순간 한 사내가 칼로 베면 베일 듯 각 잡힌 자세로 문을 열고 들어왔다. 로하나의 친구인 욥이었다. 눈에는 욕심이 다글다글했다.
“그래, 그래서 우리 딸아이가 뭐라고 했던가?”
욥은 뱀같이 번뜩이는 눈으로 제 상사이자 주인을 보며 허리를 깊게 숙였다.
그의 세 아이가 태어날 때마다 선물까지 몰래 챙겨 줘 가며 굶던 욥을 관리자 수준까지 올려 준 건 로하나 하노버였다.
그런 사람도 쉬이 배신하는 욥을 보며 드레고리는 차게 웃었다.
그의 딸은 영리했다.
재산의 절반은 그녀가 기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사람을 사지 않으면 아버지가 눈치채지 못하게 이 정도로 일을 벌일 만큼.
‘그런데 그럼 뭐 하나.’
욥이 이리저리 기쁘게 내놓는 자료들을 보며 드레고리는 씁쓸하게 제 딸을 동정했다.
‘결국 사람을 믿어 이리되지 않는가.’
딸의 깜찍한 도주 계획을 보며 드레고리는 딱하다는 듯 긴 숨을 내쉬었다.
“아닙니다.”
다시 돌아온 그의 평안한 얼굴을 보며 로하나는 호숫가로 시선을 돌렸다. 그때 낮은 목소리가 그녀의 시선을 다시 잡아끌었다.
“황태자 전하를 원망합니까?”
짙고 검은 두 눈은 로하나를 끌어당기듯 바라보았다.
제국의 황태자를 원망하냐니. 사사로운 배신을 당했다고 그렇게 함부로 말할 정도로 최고 공작가의 영애 자리가 가벼운 것은 아니었다.
로하나가 피식 웃으며 그게 무슨 질문이냐는 듯 바라보자 케이든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정치적인 것을 묻는 것이 아닙니다.”
“정치적이지 않은 대답을 왜 원하시죠?”
로하나는 진심으로 궁금해 되물었다.
까칠하시네, 하는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본 케이든은 의자에 몸을 깊게 기대앉았다. 넓은 몸의 셔츠가 햇살을 받아 새하얗게 빛났다.
“공작님, 진짜 하고 싶은 말씀을 해 보시죠.”
로하나의 딱딱하고 사무적인 말을 끝으로 침묵이 흘렀다. 멀리서 아이들이 뛰어노는 소리가 겨우 그 침묵을 중간중간 흐렸다.
“흠.”
심중을 알아내기 어려운 눈을 한 채 그는 호수를 느긋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고개를 비스듬히 들어 다시 그녀를 봤다.
그 시선이 주변인들을 얼마나 긴장시키는지 저 흑막은 알까.
“당신답지 않기에 캐물어 봤습니다.”
로하나의 한쪽 눈썹이 꿈틀했다.
“저답지 않다고요?”
나를 어찌 안다고 그런 얘기를 하십니까, 하는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짓자마자 케이든의 말이 공백을 채웠다.
“상단에서 뭔지 모를 밀거래를 하거나, 술주정뱅이에게 달려들거나, 동생을 말리겠다고 말을 타고 내달리는 거나.”
여유 있게 옆으로 기댄 채 말하는 남자의 목소리는 느른하고 짙었다.
“심지어 그걸 두고 저와 거래까지 하시는 것을 보면.”
케이든이 조금 몸을 앞으로 기울이자 다시금 익숙한 향이 밀려왔다.
“황태자에게도 일갈을 가해도 한참 전에 가했어야 할 것 같은데 안 그러시길래. 혹시 생각하시는 더 적절한 ‘때’나 ‘방법’이 있어서 그런가 생각해 봤는데, 그런 눈치도 아니시고요?”
로하나는 말없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디까지 알고, 어디까지 떠보는 것인지. 그는 그저 여유가 넘치고 평온해 보이기만 할 뿐이었다.
“저는 아주 일관되게 행동하고 있어요.”
로하나가 단호하게 말했다. 사실이었다. 적당히 저를 위하고, 적당히 죄책감을 덜기 위한 행동을 해 가며. 최소한 누구처럼 모두를 속이고 있지도 않았다.
그때였다. 케이든이 몸을 조금 더 숙여 왔다.
“공녀님이 원하지 않는다면…….”
아주 조금 거리가 좁혀졌을 뿐인데, 로하나는 낯선 긴장감에 숨을 참았다.
“하지 마십시오, 결혼.”
그의 눈과 입술은 진지했다. 로하나는 순식간에 온몸이 뜨거워졌다.
쿵, 쿵.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로하나는 애써 몸의 반응을 무시하고 생각에 집중했다. 흑막은 로하나가 결혼하지 않기를 원한다.
어째서?
“이게 하고 싶었던 이야기인가요?”
되물으며 시간을 버는 사이 서서히 떠오른 또 하나의 가정에 빠르게 뛰던 그녀의 심장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기어이 만나는 남주와 여주. 그런 여주와 이미 만나고 있던 흑막.
셋의 인연은 질기고 깊었다.
당장 가해자를 죽여도 이상하지 않았을 여주 납치 사건에서도 자신을 고이 보내 준 것, 굳이 황태자와의 결혼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
그리고 그럴 리가 없지만 언뜻 호의적으로까지 보이는 흑막의 행동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하나.
원작에서도 있었던 정략결혼.
하노버 가문을 손에 쥐어 돈을 주무르기 위해 그가 원작처럼 자신의 결혼을 추진한다면, 황태자와의 결혼을 파기하길 원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결혼이 아니고선 하노버 공작을 손에 쥘 수 없을 테고 전쟁에서 승리하기에도 어려울 것이니.
퍼즐 조각이 짜 맞춰지자 차분해진 머리가 쿵쾅거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로하나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기왕 당하는 협박이라면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 천천히 입술을 뗐다.
“이게…… 거래 사항인가요?”
“음?”
이번에 되물은 것은 케이든이었다. 빈틈없던 얼굴에 살짝 금이 갔다.
“이번 사건을 입 다물어 주시는 것에 대한 거래요. 제가 황태자와 파혼하길 바라시는 것인지요.”
왜인지 알 수 없지만, 잠시 눈썹을 찌푸렸던 그는 곧 이해했다는 듯 눈을 내리깔았다. 미묘한 차이였지만 싸늘한 눈빛이 아까와는 전혀 달랐다.
“아뇨.”
여전히 마른 미소가 입술에 서려 있었지만.
“그럼 왜죠?”
로하나는 직접적으로 묻기로 했다.
“제가 결혼을 파기하고 정말 바르디 전하가 오렐리아 영애와 정식으로 만나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요.”
위험하지만, 그의 가장 큰 약점인 오렐리아를 건드려 보자 케이든의 미간이 좁혀졌다.
로하나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케이든은 긴장하는 그녀가 흥미로운 듯 미소를 더 짙게 지으며 물었다.
“제가 둘 사이를 방해해야 할 이유라도 있나요?”
미소에도 불구하고 한층 더 낮아진 목소리가 이상하게도 폭발할 것 같은 분위기를 냈다.
로하나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원작을 통해 이미 당신이 오렐리아를 사랑하는 것은 안다고 할 순 없는 노릇이니.
“아니요, 그건 아니지만…….”
날카로운 눈매가 로하나를 꿰뚫듯 했다. 높은 콧대와 굳게 닫힌 입이 어느새 어둑해진 푸른 하늘에 비쳐 보였다.
숨 막힐 듯한 침묵이었다.
“가시죠.”
잠시 그렇게 로하나를 바라보던 케이든은 차분하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드릴 말씀은 전부 드린 것 같군요.”
다시 돌아온 예의 바르고도 태연한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