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죽일 흑막과의 계약결혼-14화 (14/125)

14

*

찰박거리며 새하얀 손수건이 따뜻한 물에 적셔졌다.

금실로 꼰 레이스로 장식된 커다란 침대가 넓디넓은 방에 놓여 있다.

웬만한 귀족의 안주인 방보다 넓은 방의 바닥에는 새하얀 카펫이, 창에는 연한 복숭아색 커튼이 드리워졌다.

흰 레이스 실내복을 입은 금발의 여자가 노을이 지기 시작한 창밖을 바라보았다.

창 옆의 살굿빛 실크 소파에 앉은 그녀의 옆에서는 하녀들이 고개를 조아리며 손을 부드러운 천으로 닦아 내고 있었다.

‘멍청하게 납치를 당하다니.’

오렐리아는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늘 아무렇지도 않게 짓는 미소. 약혼자인 황태자의 애인에게도 끝까지 평정과 예의를 잃지 않는 여자.

‘결혼을 보름 앞두고 황태자가 새 여자를 데리고 나타났는데도 어쩌면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지.’

모든 것이 분했다.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겨 왔지만 이번에는 정말 위험했었다.

누가 생각해도 배후는 하노버 공작가겠지만 기절했다가 정신을 차렸을 뿐인 오렐리아에게는 아무 증거가 없었다. 범인의 얼굴을 특정할 수 없으면 오히려 역효과만 날 것이 뻔했다.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오렐리아는 고개를 힘껏 내저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안 그래도 가는 어깨와 목이 파르르 떨렸다. 집요하게 창밖을 내다보던 오렐리아의 호박색 눈이 가늘어졌다.

‘지금쯤 지나가야 하는데…….’

제국 회의가 끝났어도 한참 전에 끝났을 것이었다. 그런데 도무지 이쪽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인지 그가 보이지 않는다.

조금 실망한 오렐리아는 무릎을 접어 다리를 껴안으며 다시 생각에 잠겼다.

우선, 파혼이 먼저였다. 황태자의 애인이나 하자고 여기까지 온 것은 아니었으니까.

순간 떠오른 얼굴에 가슴이 저릿했다. 오래 봐 온 그의 얼굴은 어째 저를 본 적이 없었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오렐리아는 화들짝 놀라며 서둘러 반가운 얼굴을 지어 뒤를 돌아보았다.

“황태자 전하!”

“왜 그렇게 밖을 내다보고 있어?”

시녀들이 고개를 조아리며 물러나자 오렐리아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고개를 저었다.

“황태자 전하 언제 오시는지 기다리고 있었죠.”

생긋 웃는 얼굴을 보는 바르디의 입가에 미묘한 미소가 스쳤다. 오렐리아는 그 미소 너머에 있는 무언가를 포착하며 너른 가슴팍에 폭 안겨 얼굴을 비볐다.

“이렇게 혼자 아무것도 하지 못해서 어떻게 해.”

“그나저나 델클리프 공작님께서 안 보이시더라고요.”

순간 올려다본 그의 얼굴은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오렐리아는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계속 말을 이어 갔다.

“저에겐 유일한 친구 같은 분이신데…… 요즘 통 못 뵈니 마음이 불안하네요.”

그녀를 감싸고 있던 굵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무슨 소리야, 오렐리아. 이젠 내가 너의 친구인데.”

오렐리아의 황금빛 눈이 감사와 감격으로 초롱초롱 빛났다. 방금 나오는 황태자의 목소리를 들으니 앞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는 자명했다.

*

늦가을에서 겨울 향이 났다. 울긋불긋 물든 나무들이 높고 가지런하게 선 채 낙엽을 떨구고 있었다.

“케이든, 뭐 좀 물어봐도 되나?”

일을 마치고 노천 식당에 자리 잡아 위스키를 주문한 히스가 물었다.

“우리 여기에 언제까지 있을 거지?”

“일이 끝날 때까지?”

케이든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이 정도 일은 우리가 직접 오지 않아도 됐잖아. 늘 하던 일이고. 회의 정도가 좀 큰일이었긴 했는데…… 그것도 오늘 끝났고.”

작은 잔과 함께 술이 나왔다.

“설마 정말 결혼식이 보고 싶었던 거야?”

히스가 한 잔을 가뿐하게 목으로 넘기며 물었다.

“아니면, 오렐리아?”

팔짱을 끼고 있던 케이든이 어이가 없다는 듯 인상을 구기자 히스는 어깨를 으쓱하곤 말을 이었다.

“무엇보다, 하노버를 그냥 내버려 두는 이유가 뭐지? 오렐리아를 죽이려 한 건 사실이잖아.”

히스의 질문에 케이든이 잠시 뜸을 들였다.

“바르디한테 경계를 강화하라고 했어. 드레고리도 바보가 아니야. 한동안은 몸을 사릴 거다.”

밖에서와는 달리 아무렇지도 않게 황태자의 이름을 호칭하는 케이든의 얼굴은 표정 없이 싸늘했다.

“로하나 공녀와 이야기는 잘되었어?”

“그럭저럭.”

원래도 속 얘기는 거의 하지 않는 케이든이었지만 아무래도 로하나와 관련해서는 뭔가가 석연치 않았다.

케이든이 밝히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은 히스로서는 충분히 불편하고, 불쾌했다.

“그런가.”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는 케이든을 보며 히스는 마뜩지 않은 입소리를 냈다. 그때 푸른 눈의 그에게 갑자기 익숙한 인영이 들어왔다.

“하노버 공녀…….”

“뭐?”

“아니, 저기.”

히스가 예쁘게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케이든은 미간을 조금 찌푸린 채 성가신 얼굴로 히스가 손을 흔드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그녀가 있었다. 전과는 달리 옅은 베일로 얼굴을 가린 채 베이지색 벨벳 모자를 쓴 로하나가.

그녀는 짙은 남색의 짧은 망토를 어깨에 두른 채 작은 손에는 서류 가방을 들고 있었다.

케이든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입을 떼려고 할 때였다.

“로하나 공녀니임!”

다른 사람들이 깜짝 놀라 쳐다볼 만큼 큰 소리였다.

히스가 한발 빨랐다.

로하나는 문득 들린 목소리에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다른 사람들도 깜짝 놀라 쳐다볼 만큼 큰 소리였다.

뒤를 돌아보자 밝은 파란 머리칼의 남자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렇다면 등을 보이고 앉아 있는 은발의 남자는…….

“공녀님.”

케이든이 고개를 까딱했다. 알쏭달쏭하게 태연한 얼굴은 여전했다.

로하나는 가방을 들지 않은 나머지 한 손을 내밀어 어느새 다가온 히스의 인사를 받았다.

반짝이는 짙은 바다색 눈이 로하나를 향해 예쁘게 웃었다.

“수도까지 혼자 나오셨어요?”

로하나는 불편한 마음에 가방을 꼭 쥐었다. 욥을 만나고 오는 길이었다.

“네, 간단한 일이라서요.”

돈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나오는 케이든을 보며 히스가 말했다.

“아, 저는 먼저 들어가 봐야겠네요.”

“아, 저희도 지금 들어가던…….”

“아니.”

그때 케이든이 히스의 말을 잘랐다. 그러고는 성큼 그녀 쪽으로 다가서서 말을 이었다.

“기왕 이렇게 된 것,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히스가 의아한 눈을 했다. 로하나가 천천히 입을 뗐다.

“무슨 일이시죠?”

케이든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열었다.

“저는 수도가 너무 오랜만이라, 마땅히 아는 곳이 없습니다. 공녀님이 편한 장소로 가서 이야기하면 좋을 것 같네요.”

오렐리아가 여기 있는 한 케이든도 쉽게 수도를 떠나지 않을 테니, 이 김에 수도에 대해 더 알아보려고 한다 해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로하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글쎄요…….”

로하나도 수도에 대해 잘 알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시내를 놀러 다니기는커녕 비밀리에 아버지의 사업에 동원되느라 늘 바빴던 그녀였으니.

“꼭 수도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케이든이 덧붙였다.

수도가 아니라면……. 로하나는 고민하다가 한 장소를 떠올렸다.

토바카 호수.

수도 외곽에 있는 호수로 모든 영애들이 오색찬란한 단풍이 아름답다고 좋아하는 곳이었다. 생각해 보니 외딴 호숫가가 비밀리에 이야기를 나눌 장소로 적당한 듯했다.

“그럼…… 토바카 호수로 갈까요?”

*

춥지도 않은지 오늘도 셔츠 하나에 겨우 얇은 망토 하나를 걸친 그는 장식품이라고는 옷에 델클리프의 문장 이 세공된 은색 핀을 꽂은 것이 전부였지만 모두가 돌아볼 만큼 수려했다.

칼같이 예의를 갖추며 그녀 옆에 서 있는 그는 언뜻 다정하게 느껴질 만큼 철저했다. 단둘이 있으면서도 오렐리아를 죽게 할 뻔한 가문의 여식에까지 그는 매우 예의가 발랐다.

과연, 모두를 깜빡 속인 흑막다웠다.

붉은 단풍이 호수에 비쳐 붉게 빛났다. 멀리서 삼삼오오 모인 사람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로하나와 케이든은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오렐리아 영애님은 괜찮으신가요?”

케이든이 그것을 왜 저에게 묻느냐는 듯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죄송합니다. 그러고 보니 문병도 못 갔네요. 속에서 염치가 없었나 봐요.”

로하나가 눈을 내리깔았다. 인사치레였지만 어느 정도 진심이기도 했다.

“아무에게도 죄송할 일도 아닐뿐더러. 저에게 죄송할 일이 뭐가 있습니까.”

케이든의 신랄한 말에 로하나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정말이지 말하는 것만 들어서는 오렐리아의 안위에 아무런 관심이 없어 보였다.

“드레고리 하노버 공작은 다른 말씀 없으시던가요.”

드레고리가 브란드의 말을 죽였다는 소식을 듣긴 했지만, 로하나는 말을 아꼈다.

“별다른 일은 없어요. 아무래도 몸조심을 하는 것이겠죠. 하실 말씀이라는 게 그것인가요?”

조금 뜸을 들이더니 케이든이 이어서 물었다.

“황태자 전하는 다른 말 없던가요?”

바르디는 오렐리아가 구조된 이후로 그녀의 방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로하나는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아니오.”

짧게 대답하는 로하나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보기 좋지 않게 되었네요.”

“네?”

“제가 바르디의 마음을 잘 잡고 있었다면 이 모든 일이 안 일어날 수도 있었겠죠.”

로하나가 중얼거렸다. 케이든은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러더니 말 그대로 이상한 질문이 날아왔다.

“정말 아쉬우신 모양입니다.”

이해력이 부족한 편은 아니었는데, 케이든의 말은 항상 바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네?”

처음으로 진심이 드러났던 걸까. 그의 얼굴에선 읽기 어려운 표정이 스쳤다.

그게 뭐였을까.

“아닙니다.”

다시 돌아온 그의 평안한 얼굴을 보며 로하나는 호숫가로 시선을 돌렸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