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로하나는 몸을 일으켰다. 어서 빨리 케이든을 만나야 했다. 우선 상황 파악을 하고 생각하자.
“조디, 델클리프 공작님께 내가 방문한다고 말씀드려.”
로하나가 문을 닫고 나오며 조디에게 말하자 조디가 어어, 하며 망설였다.
“왜 그래?”
복도를 지나 밖으로 나가려는데 조디가 말했다.
“그게…… 지금 작은 응접실에 와 계세요.”
“뭐?”
“케이든 델클리프 공작님이요. 아까부터 기다리세요.”
뒤를 돌아보고 서 있던 케이든이 몸을 돌렸다. 허리에 아무렇지도 않게 걸쳐진 칼의 예리함을 본 후여서인지 예전과 달라 보였다.
“델클리프 공작님.”
무릎을 굽혀 로하나가 인사를 하자 케이든이 고개를 숙였다.
“모두 물러가라.”
로하나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명령했다. 시종들이 물러났다.
“조디, 너도.”
넋 놓고 케이든을 올려다보던 조디가 퍼뜩 정신을 차리며 인사를 올렸다.
무거운 응접실 문이 모두 닫혔다. 로하나가 자리에 앉자 케이든도 뒤따라 앉았다. 새하얀 커튼을 뚫고 햇살이 들어왔다.
“아무래도 빨리 찾아뵙는 게 나을 것 같아 아침부터 이렇게 실례했습니다.”
중저음 목소리가 응접실에 울렸다. 그는 침착한 눈으로 그녀와 주위를 슥 둘러보았다.
“아뇨, 저도 마침 찾아뵈려던 참이었어요.”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로하나가 먼저 입을 뗐다.
“오렐리아 영애님은…… 괜찮으신가요?”
“오늘 새벽에 눈을 떴다고 합니다.”
“다행이네요.”
침묵이 흘렀다. 로하나는 각오를 단단히 했다. 여기에서 굳이 빙빙 돌릴 필요는 없겠지.
“무엇을 원하시죠?”
이제는 그녀에게 조금 익숙해졌다는 듯 엷은 웃음을 지은 케이든이 의자에 깊숙이 몸을 기대앉더니 천천히 입을 뗐다.
“말했던 대로 제가 연루되었다는 것을 부친께 비밀로 해 주셨으면 합니다.”
말을 마치고 입을 꼭 다문 로하나를 보며 케이든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브란드 하노버는 오렐리아를 납치하고 항만에서 모종의 공격을 당해 정신을 잃어 일 처리를 못 한 겁니다.”
침착한 목소리가 낮게 울려 퍼졌다.
“그사이 저와 황궁대가 들이닥친 거죠. 브란드는 서둘러 오렐리아를 두고 도망친 것으로 하죠.”
로하나의 미간이 좁아졌다.
“저흰 그날 마주치지 않은 겁니다.”
“왜죠?”
로하나가 반문했다.
“애초에 그 자리에서 저희 모두를 고발했으면 공작님은 영웅이 되셨을 텐데요.”
로하나의 차분한 질문에도 케이든은 침묵을 지켰다.
“저희 아버지는 아시다시피 그 정도 증거에 매일 사람은 아니에요. 잡아떼면 넘어갈 겁니다. 제아무리 그 장소가 하노버 항만의 창고였다고 해도요.”
“압니다.”
‘그 좋은 기회를 그냥 두셨다고요?’
무엇보다 어떻게 우리를 죽이지 않았죠? 천하의 당신도 오렐리아를 너무나 사랑해 결국 제국을 배신까지 하지 않나요, 하는 말이 입 끝에서 머물렀다.
“저희가 공작께 현장을 들킨 것을 부친을 포함해 모두에게 비밀로 하라는 말씀이시죠?”
케이든이 눈으로 동의했다.
“그래야 브란드 하노버도 변명의 여지가 있을 겁니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작전이 실패한 이유가 단순히 브란드가 마음이 약해져서라는 것을 아버지가 안다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로하나가 연루되어 있다는 것을 들키면 더더욱.
그렇기에 케이든의 말대로 외부의 알 수 없는 방해가 있어서 브란드가 실패하였고, 오렐리아를 지키는 세력이 강하다는 것을, 알려 두는 편이 그에게 나을지도 몰랐다.
아마 델클리프는 시의적절한 시기에 이 카드를 사용할 모양이었다.
그가 지트니 상단 건에 대해서도 그러했듯이.
“브란드 대위에게도 이게 최선이라는 것을 이해시키세요.”
“네.”
로하나가 침착한 얼굴을 유지하며 대답했다.
“그럼, 공작님께서 저희에게 원하시는 건 어떤 것일까요?”
아침 햇빛이 새하얀 커튼을 통과해 반짝였다.
“없습니다.”
케이든의 시선이 천천히 그녀의 얼굴을 지나 장식 없이 늘어뜨린 머리카락, 그리고 수수한 회색 드레스로 이어졌다. 긴 시선이었다.
“일단은.”
말을 마치며 시선이 창문을 향하자 로하나도 시선을 조용히 내렸다.
“대신 지금 뭐 하나만 묻겠습니다.”
케이든은 기댔던 몸을 일으키더니 비스듬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날카로운 턱과 높은 콧대가 유난히 도드라졌다.
“바르디 황태자 전하와는 정말로 연인 관계셨을까요?”
로하나는 조금 미간을 좁혔다.
“네?”
갑작스러운 이상한 질문에 로하나는 저도 모르게 입을 조금 벌렸다.
“그게 무슨…….”
시종일관 무뚝뚝하던 그의 얼굴에 미세한 동요가 느껴졌다.
“굳이 이런 상황에서 약혼을 지속하실 이유가 있습니까. 하노버 공작도 딸의 말이라면 어쩔 수 없을 텐데요.”
로하나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었다.
“공작님께서 굳이 그게 왜 궁금하실까요?”
호사가로 보이시진 않는데. 뒤에 줄인 말을 알고도 무시한다는 듯 그는 태연히 말을 이었다.
“신경이 쓰여서요.”
날카로운 턱을 조금 비스듬히 기울인 그가 말했다.
“왜 그게 신경이 쓰이실까요?”
케이든은 별 대답 없이 턱을 괸 채 어째 유난히 냉소적으로 변해 있는 로하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질문에 대답해 주기까지 조금도 움직이지 않을 기세인 그를 바라보다 로하나는 짧은 한숨을 쉬었다. 긴 시선이 흐려졌다.
“세상에 괜찮은 일만 일어나는 건 아니죠.”
지트니 사건 때 그에게서 들었던 말을 돌려주며 로하나가 입을 뗐다.
“그때마다 누가 나서서 구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역시 연달아 그가 했던 말을 돌려준다. 표정 없던 케이든의 얼굴에 쓰고 날카로운 미소가 슬쩍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 순간, 로하나는 깨달았다. 왜 그의 시선이 불편했는지. 다정하면서도 고압적인 그의 시선은 언젠가 잡아먹을 사냥감을 재는 맹수의 눈과 닮아 있었다.
“황실 결혼은 제 일이 아니라서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요.”
그렇다고 새삼 겁먹을 일은 아니었지만.
밝은 아침 햇살에 비추어지니 저번처럼 흑안이 묘하게 반짝였다.
“그럼 누구의 일입니까?”
로하나는 짧은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웬만한 대화의 흐름은 쉽게 쥐락펴락해 왔다. 두 번 사는 삶에서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으니까.
그럼에도 케이든의 화법은 좀체 알 수가 없었다.
“공작님, 이건 결혼이잖아요.”
로하나가 천천히 솔직하게 대답했다.
“연애가 아니고요.”
저도 모르게 철모르는 아이한테 가르치는 어투가 되었지만 케이든의 말이 어불성설이었으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군요.”
지트니 앞에서처럼 그는 의외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몸을 일으켰다. 로하나도 뒤따랐다.
“아…….”
그때였다. 케이든이 문득 몸을 돌리더니 천천히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 둘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이상할 만큼 사람에게 가까이 서는 풍습이 노프탈에 있는 것이 분명했다.
뒷걸음질하기는 너무 지나친 것 같아 로하나는 어색하게 그와 가까이 붙어 섰다.
그는 천천히 안주머니로 손을 옮겼다. 의외의 행동에 로하나는 눈을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케이든이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걱정하실 것 같아서…….”
로하나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자 케이든이 무언가를 천천히 내려놓았다. 시종일관 무심한 태도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툭.
천천히 손을 펴자 의외의 물건이 눈에 들어왔다. 화려한 다이아몬드 핀. 어제 잃어버렸던 그 핀이었다.
로하나가 다시 입을 열려고 고개를 들었을 때, 케이든은 이미 몸을 돌려 빠른 걸음으로 방문을 나서고 있었다.
*
로하나를 만나고 바로 참석한 회의는 노을이 짙게 질 때까지 늘어졌다.
각 지역 주요 영주가 모인 제국 회의. 노프탈의 영주인 케이든 델클리프로서는 최초의 참석이었다.
회의가 끝나고 우르르 귀족들이 몰려나오는 사이 미성의 목소리가 케이든을 불렀다.
“델클리프 공작님!”
남부의 프란츠 소예 후작이었다.
“소예 후작.”
케이든이 고개를 까딱했다. 짙은 밤색 고수머리를 짧게 친 젊은 후작은 투덜거렸다.
“아깐 죄송하게 됐습니다.”
프란츠가 신랄하게 중얼거렸다. 거칠고 건방진 말투와는 달리 눈은 유난히 소처럼 맑고 동그랗다.
“부디에르였지요, ‘빌어먹을 카르크 녀석들’이라고 굳이 말한 게?”
서부 대장, 해안과 바다를 담당하는 부디에르 대장의 말을 기억 못 할 리 없으면서 프란츠는 슬쩍 케이든을 떠보았다. 케이든은 익숙한 듯 그런 프란츠를 내려 보았다.
카르크족의 수장을 친 제국의 충성스러운 신하 앞에서 굳이 ‘카르크족’의 편을 들며 기이한 사과를 대신하는 젊은 후작을 보며 케이든은 미간을 좁혔다.
“굳이 내가 신경 써야 할 일인가?”
케이든의 조금 귀찮아하는 목소리에 프란츠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담배 연기가 뿌옇게 노을 진 하늘을 배경으로 퍼져 나갔다.
“부디에르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암요. 저놈은 바다를 끼고 있으니 이 세상이 제 것이죠, 뭐.”
아르드골드는 무역으로 엄청난 부를 쌓았다. 동쪽으로는 큰 산맥이 가로지르고 있었고 남부는 지내기엔 나쁘지 않았으나 자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서쪽만이 바다로 뚫려 있어서 여러 나라와 교역이 가능했고, 이때 그 무역의 중심에 선 것이 하노버 공작이었다.
척박하고 가난한 동부는 배척받는 마력을 사용하는 카르크인들이 주로 거주하게 되었는데, 그 지역을 평정한 것이 케이든 델클리프였다.
케이든은 날카로운 턱을 쓸며 쓴웃음을 지었다.
“공작님에 대한 칭송이 여기까지 들립니다요. 동부가 독립을 감히 생각하지 못한다고…….”
그러나 이어진 프란츠의 말에 케이든은 턱을 기울이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독립을 생각할 만큼 멍청한 역적이 아직 남아 있단 말인가?”
“아, 아니…… 그 정도로 공작께서 제대로 통치하고 계시다 이거죠. 누가 감히 반역을 꾀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프란츠는 손사래를 치며 황급히 말을 거뒀다. 그때 저 멀리에서 히스가 오고 있었다.
“그럼.”
프란츠가 히스와 스쳐 인사하곤 사라졌다. 히스는 푸른 머리에 어울리는 흰색 정장 차림이었다.
“시내로 가지. 의약품 거래처를 좀 확인해야겠어. 본 적 없는 곳이라.”
케이든이 마구간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검은 망토가 늦가을 바람에 펄럭였다. 히스가 오랜만에 궁 밖으로 나선다며 콧노래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