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쉿.”
짙은 눈이 그녀를 삼키듯 내려 보았다.
“로하나.”
칼집에 칼을 집어넣는 차가운 금속 마찰음이 울렸다.
로하나는 누가 저를 이렇게 이름만으로 부르는 것이 낯설었다.
혼란스러워하는데 케이든의 큰 손이 그녀의 입을 떠나 어깨를 쥐었다. 나머지 한 팔은 여전히 허리를 감싼 채였다.
“로하나, 브란드와 자택으로 돌아가십시오.”
크게 뜬 눈이 그를 응시했다.
“아무에게도 오늘 일을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드레고리 하노버에게도.”
어느새 서슬 퍼렇던 그의 눈이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어서 가십시오.”
순식간에 몸을 떼며 그가 멀어지자 그녀의 가슴으로 차가운 늦가을 바람이 훅 밀고 들어왔다.
“가급적 오셨던 길로 돌아가십시오. 저도 못 찾을 정도였으니까.”
케이든이 고개를 숙여 로하나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놀란 그녀와 달리 케이든은 지나치게 침착해 보였다.
“말이 있습니다!”
그때 케이든과 히스의 말을 발견했는지 수색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정문의 잠금장치가 부서지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사병 하나가 외쳤다.
“저기 문이 있습니다!”
시간이 없었다. 브란드는 이미 열려 있는 후문을 통해 나가고 있었다. 로하나는 믿을 수 없는 얼굴로 케이든을 올려다보았다.
‘어째서?’
반응할 겨를도 없이 뒤에서 브란드가 로하나를 끌어당겼다. 동시에 케이든이 그녀를 가볍게 밀었다. 로하나의 발이 문밖을 나서는 순간, 후문이 쾅 하고 닫혔다.
로하나와 브란드는 멀리 세워 둔 말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우선은 도망쳐야 했다.
그때, 서둘러 뛰던 중 뭔가가 탁 하고 발에 걸렸다. 로하나의 몸이 크게 앞으로 휘청였다. 긴 치맛자락에 결국 넘어진 것이다.
브란드가 재빨리 와서 누나를 일으켰다. 머리카락을 넘기며 겨우 일어난 로하나는 구두를 벗고 뛰었다.
단정하게 고정했던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렸다.
*
“케이든.”
히스는 굳이 언짢은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었다. 카르크족을 위한 것도, 황태자나 제국민의 환심을 사기 위한 것도 아닌 행동.
다시 말해 케이든 델클리프가 절대 하지 않았고,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이었다.
“굳이 보낸 이유는?”
그렇지만 히스는 침착하게 질문을 던졌다. 상대는 케이든이니까.
케이든은 잠시 히스의 질문을 손짓으로 막은 채 들이닥친 수색대에게 상황을 설명하더니 오렐리아를 넘기게 했다.
소란스러운 수색대의 행동이나 표정과 달리 케이든은 늘 그렇듯 무표정이었다.
수색대가 물러나고 주변에 적막이 찾아올 때까지도 케이든은 별말이 없었다. 침묵을 먼저 깬 것은 다시 히스였다.
“하노버 공작이 카르크에게 어떤 존재인지 네가 더 잘 알 텐데. 이번 일은 황태자의 비위를 상하게 하지 않으면서도 하노버 공작을 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어.”
케이든은 그런 히스의 말에도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넓은 보폭으로 공녀가 지나간 자리를 따라 걸었다.
히스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그때 케이든이 입을 뗐다.
“그러니 더더욱 수색대에게 넘길 순 없었지.”
두 남매가 남긴 흐트러진 발자국과 흔적이 케이든의 손끝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으로 자연스럽게 사라져 갔다.
“내가 쥐어야 되니까, 그 목을 말이야.”
내용에 비해 여전히 너무 태연하고 정중한 목소리는 바닷바람을 뚫고 선명하게 울렸다.
그때였다. 케이든의 눈에 뭔가가 띄었다. 바닥에서 달빛을 받은 무언가가 반짝이고 있었다.
‘뭐지?’
작은 다이아몬드가 여러 개 박힌 금 핀이었다. 발코니에서 보았던 로하나의 옆모습이 떠올랐다. 물결치는 검은 머리에서 우아하게 반짝이던 것.
케이든은 핀을 주워 들었다. 머리를 고정하는 부분이 구부러진 채 쓸 수 없게 되어 있었는데 보석들만은 속없이 빛나고 있었다.
그때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과하게 소란스러운 걸 보니 누가 도착했는지 알 만했다.
주머니에 다이아몬드 핀을 집어넣으며 케이든은 몸을 돌려 소리가 나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바르디는 잠이 들어 있는 오렐리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함께 달려온 황궁의가 다행히 생명 반응에는 이상이 없다고, 날이 밝기 전에는 의식이 돌아올 것이라고 기쁜 얼굴로 고했다가, 바르디의 싸늘한 표정에 말을 얼버무렸다.
‘하노버 공작…….’
바르디는 천천히 오렐리아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잠들어 있는 그녀는 인형같이 아름다웠다.
“오렐리아.”
바르디가 오렐리아의 머리카락을 만지면서 귓속말에 가깝게 속삭였다.
“돌아와서 다행이야.”
키스를 남긴 채 막 몸을 돌려세우는 차, 근위대장이 케이든의 도착을 알렸다. 케이든이 바르디에게 깍듯이 인사를 올렸다. 달빛에 은발이 유난히 밝게 빛나고 있었다.
“케이든.”
“황태자 전하.”
무심하고 태연한 목소리가 왜인지 모르게 바르디의 신경을 긁었다.
“덕분에 오렐리아가 돌아왔어. 정말 고마워.”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수색대보다 고작 몇 분 빨랐을 뿐이고요.”
케이든은 대답과 함께 고개를 끄덕했다.
잠시 침묵으로 일관하던 황태자가 묘하게 비틀린 미소를 짓더니 대답했다.
“그렇구나.”
케이든이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나려는 사이, 바르디가 눈빛으로 그를 붙잡더니 주변 인물을 멀리 물렸다.
“하노버 공작 짓인가?”
케이든은 미간을 조금 좁힐 뿐, 별다른 반응은 하지 않았다.
“그래 보이긴 합니다만, 증거가 없습니다. 하노버 공작이라면 굳이 제 소유의 사업장에서 일을 벌이지도 않을 것 같고요.”
그렇군, 하고 중얼거리던 바르디는 이내 이상한 방향으로 다시 말을 덧붙였다.
“그나저나 오렐리아가 사라져서 정말 놀랐지? 나도 놀랐는데…….”
케이든은 대답 없이 황태자를 쳐다보았다.
“나도 참, 처음에는 형을 의심했지 뭐야.”
반짝이는 푸른 눈이 어두운 밤에도 선명했다. 케이든은 표정의 변화 없이 그를 내려다보았다.
“얼마나 바보 같은 생각이었는지. 지금 생각하니 황당하네. 미안해.”
새파란 눈에 묘하게 일렁이는 승리감을 보며 케이든은 비릿하게 미소 지었다.
“전하,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그러고 보면 형도 정말 많이 놀랐겠어. 많이 힘들었어?”
케이든은 짙은 눈으로 그런 황태자를 바라봤다. 미간이 좁아지고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아무려면 황태자 전하만큼 심려가 컸겠습니까.”
다시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채 뒤돌아 나서는 케이든에게 황태자가 입을 뗐다.
“아니야. 오렐리아가 당신한테 어떤 사람인데. 놀란 것도 화난 것도 나보다 형이 몇 배는 더 했겠지.”
케이든은 천천히 뒤를 돌아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근심이 가득한 어투와는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 빛이 눈에 어려 있었다. 마치 무언가 기대라도 하는 것처럼.
그 모습이 케이든에게 익숙한 기시감을 불러일으켰다.
오랜만에 만난 그의 사촌은 노프탈에서도 지금도, 아주 먼 옛날 15년 전과 비교해서도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이 황궁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푹 쉬십시오.”
그제야 만족이 되었는지 바르디는 옅은 미소를 짓더니 이내 먼저 몸을 돌렸다. 마차가 황궁으로 향했다. 케이든은 그가 탄 마차의 뒷모습이 사라진 후에야 말에 올라탔다.
*
로하나는 대리석 욕조의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근 채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었다. 넘어지는 바람에 다친 무릎에 물이 닿자 쓰라렸지만 고통이 주는 현실감이 머리를 굴리는 데엔 유용했다.
‘왜 놓아줬을까? 무엇을 얻을 수 있어서?’
로하나는 차분하게 생각하다 유일하게 가능한 답안을 떠올렸다.
‘약점으로 사용하려고.’
날이 밝는 대로 케이든을 보러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로하나는 천천히 욕조에서 일어났다.
갑자기 많이 놀란 데다 최근의 부상까지 겹쳐서인지 온몸이 아프다고 호소했다. 밖에서 마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공녀님, 끝나셨으면 들어가도 될까요.”
“응, 고마워.”
가운을 두른 채 화장대에 앉은 로하나에게 다른 시녀 아이가 종종걸음으로 들어왔다.
“조디는?”
“오렐리아 영애님이 납치되었다가 돌아오셨다는 얘길 듣고 시녀들이 난리가 났어요. 거기에 가 있죠. 정보를 캐 온다나요.”
“그렇구나.”
“공녀님, 머리 장식을 혹시 어디에 빼놓으셨나요? 보관함에 넣어 놓겠습니다.”
시녀가 머리를 말리면서 물었다. 그 순간, 로하나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머리핀.”
벌떡 일어나 옷을 벗어 놓은 욕실 앞 드레스 룸으로 달려갔다. 시녀는 저가 뭘 잘못했나 싶어 놀란 얼굴로 급히 뒤쫓아왔다.
바닥에는 찢어진 드레스와 망토, 엉망이 된 구두만이 있을 뿐이었고 화장대 위에는 방금 풀어 놓은 목걸이와 귀걸이뿐이었다.
“여기 없었어?”
로하나의 목소리가 떨렸다.
“네……. 목걸이와 귀걸이만 있길래 공녀님께서 욕조 안에서 빼셨나 하고…….”
시녀가 심란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로하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
아침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로하나는 서둘러 브란드의 방으로 찾아갔다. 어린 시종이 조금 놀란 눈치로 응접실로 안내했다.
“브란드.”
동생은 이미 근위대복을 입고 출근 준비를 마친 채 앉아 있었다. 어제보다는 안정된 분위기였지만 얼굴은 납처럼 무거웠다.
“아버지가 오전 중에 오신대. 이제 나는 어떻게 하지?”
브란드가 초조한 듯 손을 매만졌다.
“브란드.”
로하나가 브란드의 손을 잡았다.
“나를 죽이려고 할 거야. 내 시종들도 모두…….”
“브란드, 잠깐만…….”
“내가 일을 빨리 처리하기만 했어도 이런 일이 없는데……. 멍청하게…….”
“브란드, 그만해.”
로하나의 차분한 목소리에 브란드가 천천히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 아버지에게 혼나는 게 문제가 아니야. 일을 처리 못 한 게 문제가 아니라고.”
로하나의 말에 브란드가 고개를 떨궜다.
“우리 가문이 크고 작은 범죄에 연루되어 있다는 건 알아. 그렇지만 이건…….”
로하나가 입술을 깨물었다.
“살인을 할 뻔했잖아. 아무 힘도 없는 사람을. 어쩌자고 이런 일을 했어?”
그 순간, 브란드가 눈을 치켜떴다.
“누나와 우리 가문을 위한 일이었어.”
브란드에게서 순간적으로 독기가 뿜어져 나왔다.
“누나가 황태자와 문제만 없었어도 이런 일은 필요 없었는데…….”
“뭐?”
“아버지가 수도를 비운 사이 내가 처리하고 누나 생일 파티에 가는 게 목표였어. 누나 생일 파티 같은 마지막 행사에 또 황태자가 그 앨 데리고 나타나면 안 되니까!”
일갈하는 소리가 울러 펴졌다.
“비비안 힉슬리 때 같은 그런 개망신을 또 당할 순 없으니까!”
로하나의 미간이 좁아졌다.
“아……. 아, 미안.”
브란드의 입술이 비틀렸다.
“누나 탓을 하려는 건 아니야.”
로하나는 더 말하려다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델클리프 공작과 이야기해 보고, 내가 아버지를 대면할 거야. 넌 내가 다시 나타날 때까지 무조건 피해 있어. 근무지에서 이탈하지 말고.”
브란드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