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죽일 흑막과의 계약결혼-11화 (11/125)

11

*

로하나는 동생이 근무하는 해군 기지로 향했다. 하노버 공작가의 항만이 바로 인접해서 편의를 봐줬다는 말이 있는 3지부.

항만은 파도 소리가 가득했고 바다 냄새가 진했다. 로하나는 우선 기존 창고들 사이에 말을 세웠다. 그리고 소리를 죽여 뛰기 시작했다.

분명, 그곳이다. 숨이 차고 불편한 구두에 발이 금방 아팠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동생은 어려서부터 마음이 약해 벌레 하나 못 죽이던 심성 고운 아이였다. 군 훈련을 너무 싫어했지만,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릴 수는 없었다.

남동생은 섬세한 보통 사람이었다. 이런 짓을 하고 동생이 괜찮을 리가 없었다.

‘제발, 브란드!’

로하나는 조금 외따로 떨어진 낡은 창고 앞에 도착해 있었다. 최근에도 잘 쓰지 않아 없애려고 했던 부지가 있었는데, 매각하려고 할 때마다 아버지는 그냥 두라고 하곤 했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이 안 쓰는 창고를 가지고 있는 게 이상해서 유난히 기억이 나는 그곳.

로하나는 조심스럽게 발을 옮겨 문가에 귀를 댔다. 그 순간 부스럭하는 인기척이 났다.

‘찾았다.’

갑작스럽게 문을 두드리면 놀란 동생이나 동생의 수하들이 순식간에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아직 늦지 않았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무작정 오기만 했지 다른 계획이 없었다.

그때.

“누……나?”

문 앞에 바짝 기대어 있던 로하나가 재빨리 뒤를 돌아보자 익숙한 얼굴이 서 있었다.

“브란드.”

작은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브란드는 사색이 된 채 서 있었다.

주위를 미친 듯이 둘러보던 브란드는 로하나가 이어서 입을 열려고 하자 순식간에 그 큰 손으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로하나는 갑자기 입이 막힌 채 창고 안으로 끌려가듯 들어갔다. 몸부림치는 그녀를 브란드가 벽에 몰아세웠다. 쾅 하고 부딪치자 등이 찌르르 아팠다. 남동생이 문을 잠갔다.

“누나가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브란드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너야말로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무슨 짓이야, 이게.”

숨찬 것을 숨기며 로하나가 속삭이듯 소리쳤다. 큰 소리를 낼 수는 없었다.

“너 여기 혼자야?”

“누나야말로 여기까지 혼자 왔어? 파티는 어쩌고 여기 있어?”

브란드가 로하나의 어깨를 강하게 잡고 흔들었다. 로하나도 지지 않고 동생을 똑바로 쳐다봤다.

“대답해, 어딨어.”

브란드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어디 있어.”

브란드가 입을 앙다물었다. 화가 나 있던 눈이 순식간에 슬퍼지고, 이내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아직 살아 있지?”

동생이 현장을 뜨지 않았다는 것은, 아직 일이 끝나지 않아서일 터.

“브란드, 대답해. 어디 있어.”

로하나는 자신의 어깨를 꽉 잡고 있던 동생의 손에서 서서히 힘이 빠져가는 것을 느꼈다.

“살아 있어.”

포기한 듯 브란드가 중얼거리더니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로하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긴장이 조금은 풀렸는지 큰 숨이 나왔다. 숨을 내내 안 쉬고 있었다는 것이 느껴졌다.

“브란드, 정신 차려야 해. 오렐리아 어디 있어.”

“저 안에.”

브란드가 힘없이 겨우겨우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작은 문이 있었다. 창고 사무실 문이었다.

“어떻게 되어 있어?”

“전신 포박. 크로티노스.”

“크로티노스? 양은 정확히…….”

“그리고 여기에서 죽였어야 했는데 못 했어.”

브란드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아버지가 다시 나에게 실망하실 거야.”

크로티노스는 독극물은 아니었다. 보통 수면 마취제로 사용되는데, 아마 이동을 위해서 주사한 후 여기에서 죽여 처리할 계획이었던 모양이다. 항구는 바다 옆이니까.

로하나는 생각만으로도 끔찍해 온몸을 떨었다. 팔에서 손끝까지 솜털이 다 섰다.

끔찍한 인간.

절로 욕이 나왔지만 로하나는 감상적으로 내달리려는 마음을 냉정하게 붙들었다.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었다.

“브란드.”

브란드는 조금 멍해진 얼굴로 로하나를 쳐다보았다.

“얘기는 이따 하자. 오렐리아는 아직 괜찮은 거지? 걔가 네 얼굴을 봤어?”

브란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크로티노스는 마취제야. 그것 말고도 준 게 있어?”

다시 고개를 가로젓는다.

“브란드, 창고 뒤편에 말이 있어. 오렐리아를 태우고 중앙 병원으로 갈 거야. 정신 차려!”

브란드의 뺨을 살짝 치자 그제야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로하나는 그런 남동생을 뒤로한 채 사무실로 향했다.

문을 열자 작은 오렐리아가 옆으로 다소곳하게 쓰러져 있었다. 깜깜한 실내였는데도 금발이 반짝였다. 로하나는 그녀의 의식과 맥박을 확인했다.

‘다행히 괜찮아.’

로하나는 서둘러 포박을 풀기 시작했다. 안아 올리려고 했지만, 아무리 작고 가벼운 여자라도 로하나가 혼자 들기엔 무리였다.

“브란드!”

작게 부르자 브란드가 어설프게 달려왔다. 그때였다. 말굽 소리가 들렸다.

로하나는 당황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천운으로 사무실에도 밖으로 향하는 후문이 있었다.

이쪽으로.

로하나의 눈길에 브란드가 오렐리아를 안아 들고 뒷문으로 향했다. 덜컹거리면서 잠긴 앞문을 열려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뒷문밖에 없다. 로하나는 부디 그들이 정문에 조금 더 집착하길 바라며 조심스럽게 사무실 안의 잠금쇠를 잠갔다.

딸깍.

이제 뒷문을 열고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멀어져야 했다. 하여 문손잡이를 잡고 돌리려는 순간.

쾅.

후문이 부서지듯 열렸다.

로하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목덜미에 닿기 직전에 멈춘 칼날은 어둠 속에도 새파랗게 빛났다.

그녀의 가느다란 목이 가쁜 숨을 내쉬며 오르내리자 날카로운 칼날은 닿을 듯 닿지 않을 듯 미동 없이 그 자리에 머물렀다.

서늘한 칼끝의 냉기가 목을 타고 느껴졌다.

날카로운 눈동자가 달빛에 빛났다.

케이든 필립 델클리프.

로하나로선 처음 보는 눈빛이었다. 그가 사람을 여럿 죽여 제국의 영웅 자리에 올랐다는 것을 그 짧은 눈 맞춤에도 알 수 있었다.

브란드는 놀란 숨을 내쉬며 오렐리아를 고쳐 안았다. 케이든의 차가운 눈이 둘을 뜯어보듯 훑었다. 칼끝이 로하나에서 미묘하게 뒤의 브란드에게로 움직였다.

로하나는 열심히 생각했다. 도망칠 방법은 없었다. 이미 좁디좁은 문은 케이든이 가리다시피 서 있었다.

브란드는 지금 제대로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닌 것은 물론, 케이든에게 상대가 될 리 없다.

케이든은 세계관 최고의 검사이자 군인이었다. 검술에서도 어려서부터 겨룰 자가 없던.

승산이 없다.

“가만있어.”

어느새 나타난 히스가 차가운 눈으로 말했다. 늘 여유가 넘치던 히스는 다른 사람 같았다.

“오렐리아를 내려라.”

케이든의 낮은 목소리가 섬뜩했다. 브란드는 온몸을 덜덜 떨면서 오렐리아를 내려놓았다. 그녀의 몸이 힘없이 바닥에 축 처졌다. 히스가 오렐리아의 맥박을 확인했다.

그 와중에도 케이든의 눈과 칼은 로하나를 떠나지 않았다.

처음 본 살벌한 케이든의 모습은 원작을 떠올리게 했다. 다른 일에서는 냉정하지만 오렐리아 일이라면 이성을 잃곤 했던.

“무슨 짓을 했지.”

케이든이 물었다. 브란드는 덜덜 떨며 입을 열었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크로티노스, 마취 정량만 투여했다고 해요. 맥박, 호흡에는 이상 없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로하나가 숨도 쉬지 않고 빠르게 대답했다.

“괜찮을 거예요.”

브란드를 향했던 시선이 다시 그녀를 향했다.

“16창고 앞에 있던 말은 공녀님이 타고 오셨습니까.”

로하나는 귀를 의심했다.

“네?”

“16창고 앞에 있던 말, 공녀님 말이냐고 물었습니다.”

둘의 시선이 얽혔다.

“네.”

“넌.”

시선이 재빨리 브란드를 향했다 돌아왔다.

“저…… 저는 없습니다. 저는 걸어서 복…… 복귀…….”

“쉿.”

케이든이 브란드의 말을 잘랐다. 로하나조차 당황하여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하는 그때, 아주 멀리서 말굽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케이든이 인상을 쓰며 귀를 기울였다. 히스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케이든, 수색대다.”

“오렐리아는.”

“괜찮아 보이네, 다행히.”

조금 여유로워진 말투로 히스가 대답했다. 케이든은 천천히 발을 옮겨 창고 안으로 들어왔다. 가까워지는 말굽 소리는 하나둘의 것이 아니었다.

원작의 케이든이라면 오렐리아를 데리고 아예 노프탈로 바로 가 버려야 할 것 같았지만…….

그 선택을 하지 않는다면 여기에서 우리를 수색대에 넘기거나…….

아, 아니면.

섬뜩한 생각이 로하나의 머리를 스쳤다. 가까운 칼날이 소리를 낼 듯 예리하게 달빛에 빛났다.

이렇게 죽는 건가. 감히 오렐리아를 건드린 것을 용서할 수 없으니 그냥 즉결 심판?

가슴이 빠르게 뛰었다. 그때, 벌써 창고 정문 앞까지 도착한 수색대가 문을 열려고 시도하는 소리가 들렸다.

로하나는 빠르게 생각했다. 수색대에 적발되는 것이 더 안전하지 않을까. 여기에 있다가는 이 칼에 곧 죽을 것 같은데.

그래, 차라리 소리를 질러서 알리자.

그녀가 소리를 지르려 숨을 들이켜는 그 순간이었다. 갑작스레 몸을 밀어붙인 케이든이 로하나의 입을 막으며 그녀를 안았다. 놀란 눈이 확장되고 몸은 얼어붙었다.

단단하고 커다란 몸에 그대로 밀착된 로하나는 미동도 할 수 없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