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죽일 흑막과의 계약결혼-10화 (1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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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 축하합니다.”

낮은 목소리에 로하나는 어깨를 떨었다.

어느새 옆으로 자리한 케이든의 옆모습이 달빛에 비쳐 보였다. 높고 곧은 콧대 옆으로 달그림자가 졌다.

“고맙습니다. 와 주셨네요.”

최소한 한 명은 왔다고 생각하며 로하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파티의 주인공이 테라스에 혼자 계시다뇨.”

케이든이 천천히 다가와 로하나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테라스에 기댔다.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노골적으로 그를 좇다가 상기된 얼굴로 멀어졌다. 정작 케이든은 특별히 신경 쓰지 않는 듯 무심했다. 익숙한 듯도 했다.

“아무도 모를걸요. 다들 한 번씩 저와 이야기 나눴으니 이제 숙제는 끝난 거죠.”

잔을 단숨에 비우며 로하나가 대답했다. 흠,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샴페인 때문인지 볼에 열감이 올라왔다. 로하나는 옆의 남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깔끔하게 올린 은회색 머리가 검은 예복과 잘 어울렸다. 카르크족다운 흐린 머리 색에 아린족의 특징인 짙고 선명한 눈 색깔의 조합이 묘했다.

그녀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케이든은 칼 언저리에 있던 손을 들어 펴 보였다.

굳이 검을 차고 있는 것을 본 건 아니었는데.

로하나가 입꼬리를 올리며 어깨를 으쓱하자 케이든의 크고 긴 손가락이 천천히 테라스의 대리석을 감아쥐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그가 할 법하지 않은 말에 로하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애초에 주인공 커플이 없는 자리에 케이든이 있는 것 자체가 이상했다.

“별말씀을요.”

동생이 새벽에 찾아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샹들리에가 떨어지던 그날, 그는 왜 나를 찾아 황궁으로 왔던 걸까. 오렐리아를 찾으려고?

지트니 상단 일은 어떻게 된 걸까. 정말로 그가 부도나게 하기라도 한 것일까? 아니면 우연?

로하나는 그에게 하고 싶은 질문을 떠올렸다가 살짝 벌렸던 입술을 다시 굳게 다물었다.

‘굳이 얽히지 말자.’

알아서 무엇 하겠는가. 로하나는 다시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가을에는 별이 잘 보여서 좋죠.”

새카만 밤하늘에 별이 정말 쏟아질 듯 총총했다.

“네.”

건조하고 차가운 바람이 훅 파인 등과 목 언저리를 훑었다. 기분 좋게 서늘했다.

가을이 끝나 가고 있었다. 허리까지 굽이치는 흑갈색 머리카락 위에 다이아몬드 핀이 꼭 별처럼 반짝였다.

“몸은 정말 괜찮으세요?”

굳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옆에 서 있는 것이 어색해 로하나는 하나 마나 한 안부를 물었다. 케이든은 늘 그랬듯 불편할 것 전혀 없다는 듯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공녀님이야말로 괜찮으신가요.”

“네, 그럼요. 덕분에. 다시 한번 고마워요.”

케이든의 시선이 잠시 그녀를 향했다.

“히스…… 아, 제가 그분의 성과 직위를 모르네요.”

로하나는 그러고 보니 그의 정체를 여전히 모른다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그냥 히스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물론 왔죠.”

케이든이 몸을 로하나 쪽으로 기울이더니 긴 손가락으로 연회장 안쪽을 가리켰다.

“저기 보시다시피 아주 제대로 놀고 있습니다.”

순간 가까워진 공간에 예의 짙은 눈보라 내음이 훅 끼쳐 왔다.

샹들리에 사건과 연결되어서 각인된 걸까. 심장이 이상할 정도로 불안하게 뛰는 것이 로하나는 속으로 어이가 없었다.

그리고 케이든이 이렇게 사람 옆에 가까이 붙는 버릇이 있는 줄도 몰랐고.

‘방금 비워 낸 샴페인을 원망해야 하나.’

영문 모를 두근거림을 털려고 노력하며 케이든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히스가 많은 영애에게 둘러싸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이 보였다. 비비안도 있었다.

“인기가 너무 좋으신데요.”

로하나가 쿡 웃자 케이든은 조금 풀린 그녀의 얼굴을 지그시 내려 보며 맞장구를 쳤다.

“대단하죠.”

로하나가 히스 일행으로부터 다시 시선을 거두는 순간, 생각보다 가까워진 거리에서 넓은 가슴이 먼저 보였다.

고개를 올리자 케이든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또 그 눈이었다. 뭔가가 아슬아슬한 느낌.

이 모든 것이 생존에 대한 본능인가 싶어서, 로하나는 미간을 좁히며 어색하게 웃었다. 케이든은 그럼에도 더 멀어질 생각이 없었다.

‘굉장히 사람 옆에 붙어 서네.’

그녀가 뒷걸음질을 쳐서라도 몸을 멀리하려던 순간이었다.

다급한 구두 굽 소리가 들렸다. 한둘이 아니었다. 구두라기보다는 군화 소리.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물러서 계십시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케이든이 한쪽 팔로 로하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원작에선 나오지도 않는 생일 파티에서 무슨 큰일이 난다는 거지.

그녀가 당황한 사이 연회장 문이 열렸다. 새파란 눈을 형형히 뜬 황태자가 안으로 들어섰다. 바르디의 시선은 군중을 훑다가 케이든에게 고정되었다.

케이든 뒤에 있던 로하나가 인사를 하려 발걸음을 옮기는 순간이었다. 그녀의 손목이 부드럽지만 강하게 잡혔다. 케이든의 손이 그녀를 붙잡고 있었다.

“델클리프 공작?”

눈을 바르디에게서 떼지 않던 케이든은 로하나의 목소리에 본인도 놀란 듯 주춤하며 손을 놓았다.

순간 바르디의 인상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그 변화를 보지 못한 로하나는 의아해하며 케이든에게서 시선을 떼어 연회장 중앙으로 향했다.

“황태자 전하.”

바르디의 푸른 눈은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로하나, 케이든하고 뭐 하고 있는 거지?”

“네?”

“발코니에서 둘이 뭐 하고 있느냐고 묻잖아.”

무슨 일이지, 이게.

로하나는 당황스러웠다. 파티 중간에 굳이 근위대 소대 하나를 끌고 와서 이게 무슨 질문이란 말인가.

“황태자 전하.”

어느새 다가온 케이든이 인사를 올렸다.

“내 정혼자 팔목을 방금 잡았어?”

케이든이 인상을 썼다.

“갑작스레 위협적인 소리가 나 공녀님을 보호한 것뿐입니다.”

“거짓말도 태연하게 하는군.”

“불편하게 해 드렸다면 죄송합니다.”

케이든의 정중한 목소리에도 황태자는 여전히 굳은 얼굴을 풀지 않았다.

“무슨 일이신가요, 전하.”

로하나가 재빨리 부드럽게 물었다. 공작가에서의 마지막 생일인데 별일 없이 화려함을 즐기고 싶었다.

‘싸우지 마라, 오렐리아를 두고 싸워도 모자랄 판에…….’

그러고 보니 오렐리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전하, 오렐리아 영애는요?”

바르디는 그제야 정신이 돌아왔는지 로하나를 쳐다보았다.

“일이 좀 생겼소.”

다른 사람들을 의식했는지 바르디가 격식을 갖춰 말했다.

“오렐리아가 없어졌네.”

“네?”

군중이 다시 한번 크게 술렁였다.

“없어지다니…… 그게 무슨…….”

“케이든 델클리프 공작.”

케이든이 어이없는 눈을 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예, 전하.”

“자네가 아는 것이 없을까?”

“무슨 말씀이신지…….”

케이든이 날카로운 눈을 빛내며 미간을 좁혔다.

“방에도 없고 정원에도 없고 아무 데도 없는데, 공작도 모른다?”

어이가 없다는 듯 황태자의 한쪽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오렐리아가 사라졌다는 말이오. 공작이 데려간 것이 아니면 당장 찾으러 가야 하지 않겠소?”

기이한 질문이었다. 로하나가 케이든을 쳐다보았지만 케이든은 여전히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바르디의 미간이 좁혀졌다. 알 수 없는 긴장감이 팽팽하게 둘 사이를 채웠다.

그때였다.

“공작님, 잠시만…….”

히스가 굽신굽신 인사를 하며 케이든을 끌고 나갔다.

웅성거리며 눈치를 보던 귀족들은 애써 모른 척 다시 정중하게 황태자에게 인사를 올렸다. 로하나는 이 이상한 상황에 대해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오렐리아 실종 사건이라니. 그런 건 원작에 없다.

“그나저나 생일 축하해, 로하나. 늦어서 미안해. 사람 목숨이 달린 일이다 보니 정신이 없었어.”

바르디가 사람들을 물리며 씁쓸하게 속삭였다. 어떤 표정을 지을지 몰라 로하나는 그저 가만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줄 수 있지?”

오렐리아가 사라졌다.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야. 이렇게 되어서 미안해.”

그러다가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로하나는 얼음물에라도 들어간 듯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설마.’

당연한 거였는데, 원작에 파묻혀 생각을 못 했다.

원작에서는 없었던 일이라도, 알 수 있는 일이 눈앞에 있었는데. 로하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나는 누나가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낮에 들었던 동생의 목소리가 머리에 울렸다.

왜 진작 몰랐을까.

오늘 아침에 비밀리에 집에 있었던 아버지와 동생.

지금까지 브란드가 로하나의 생일을 놓친 적은 없었다. 그런데 연회가 끝나 가도록 아버지는 물론 브란드도 귀가하지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동생의 웃음이 조금씩 흐려지고 있었다. 가끔 술에 잔뜩 취한 채 돌아오는 것을 보면서도 아직 어린 동생이 주량을 몰라 취한 줄로만 알았다.

만약 로하나가 상상하는 최악의 경우라면……. 동생은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지를지도 몰랐다.

아니면 이미 저질렀거나.

로하나는 바짝 군기가 든 군인들에게 명령하는 바르디를 두고 빠르게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만약 그녀가 상상하는 것이 맞다면 동생을 막는 것이 중요하니까.

‘내가 먼저 발견해야 해, 누구보다도 빨리.’

방을 지키고 있던 조디가 홀로 뛰어 들어오는 로하나를 보고 깜짝 놀랐다.

“공녀님! 괜찮으세요?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근위대까지 와서 하노버 경비병들도 당황했어요.”

“조디, 내가 지금 아무도 모르게 여기에서 나가야 할 것 같아. 누가 찾거든 두통 때문에 일찍 누웠다고 말해.”

“공녀님, 무슨 일이신지 그래도…….”

“부탁해, 조디. 묻지 말고 나 좀 도와줘. 말을 준비해서 정원 앞으로 데리고 와.”

마주친 눈동자가 어느 때보다 절박하고, 어느 때보다 단호했다.

“네, 외투 먼저 준비해 드릴게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이해한 듯 조디가 고개를 끄덕였다.

긴 망토를 걸친 로하나는 초조하게 조디를 기다렸다. 이내 그녀가 서툴게 말을 끌며 나타나자 로하나는 재빨리 뛰어서 고삐를 그러쥐었다.

“공녀님, 여기에서 나가시고 오른쪽으로 꺾으시면…….”

“아니야, 길은 내가 알아서 갈게.”

“네?”

조디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조디. 몸조심하고 있어.”

“공녀님이야말로요. 절대 다쳐서 오시면 안 돼요.”

똑 부러지는 목소리와 달리 조디는 많이 불안해 보였다. 로하나는 굳게 조디의 손을 잡았다.

“미안해. 고마워. 금방 올게.”

조디에게 미소를 짓고 로하나는 말고삐를 쥐고 정원으로 향했다. 조디의 의아한 눈빛을 뒤로한 채.

눈에 띄지 않으려면 이 길이 나았다. 높다란 정원수들 사이로 말을 몰던 로하나는 어느 순간 옆으로 틀었다.

커다란 말은 겨우 지나갈 정도로 작은 통로. 정원수 사이의 틈으로 들어가 좁다란 공간을 지나자 황궁 밖으로 이어지는 작은 숲이 나왔다.

로하나는 제 몸에 붙은 나뭇가지를 털어 내며 말에 올라탔다.

“가자.”

순식간에 속도를 낸 말은 조용히 길을 내달렸다. 바르디의 군인보다도 케이든보다도 먼저 오렐리아와 브란드를 찾아야 한다.

제발 늦지 않았기를 로하나는 속으로 쉼 없이 되뇌었다.

브란드를 막지 못하면, 다른 누군가가 먼저 그들을 찾아낸다면…….

‘브란드, 제발……!’

로하나는 이를 악물고 말을 내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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