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죽일 흑막과의 계약결혼-9화 (9/125)

9

*

로하나의 생일날이 밝았다.

“어쩜 이렇게 아름다우세요.”

조디가 새로 맞춘 드레스를 입은 로하나를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생일 파티 날 아침부터 하노버 연회장은 분주했다. 가을 생일이라 꽃장식을 마음껏 할 수 있다며 조디는 매우 기뻐했다.

“예쁘네.”

로하나는 몸에 딱 붙는 새빨간 실크 드레스를 거울에 비쳐 보았다.

가슴은 빈틈없이 꼭 맞았지만 치마 부분은 풍성하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름답지만 숨 막히는 옷이었다.

“아, 나 잠시 서재에 좀 다녀올게.”

“네? 지금이요?”

드레스까지 차려입고 서재라니. 조디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로하나는 빙그레 웃고는 걸음을 바삐 옮겼다.

드레스 자락이 대리석을 부드럽게 스쳤다.

파혼을 하든, 결혼을 강행하든, 야반도주를 하든, 어떤 선택이 최선일지를 모르는 상태에서 불확실성을 줄이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은 단 하나.

돈이다.

케이든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겼던 그때 이후로 상단에서 움직이면서 돈을 만드는 것은 위험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니 오늘같이 아버지라는 작자가 수도를 비웠을 때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했다.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공녀는 넓고 화려한 복도를 지나 하노버의 서재에 도착했다. 말이 서재지 한 거대 기업의 회장실 같은 곳이었다.

역겨울 정도의 부자. 원래도 세계관 최고 부자였지만 이 정도까지 성장한 데에는 로하나의 공도 있었다.

타인의 자본까지 끌어들여 배당금과 수익금을 나누는 체제는 이 세계관에 없었다.

‘증표’라는 일종의 주식 개념을 도입한 로하나의 승부는 통했고 하노버 공작가는 원작을 뛰어넘는 부자로 거듭났다.

로하나는 서재에서 제 이름으로 되어 있는 ‘증표’를 가지고 나올 생각이었다.

훗날 드레고리를 협박할 좋은 무기가 되어 줄 수 있을지도 모를 테니.

하노버에게만 허락된 서재. 그녀가 루비가 박힌 무거운 서재 문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안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뭐지?’

아무도 없을 시간인데? 귀를 기울이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네, 아버지.”

브란드? 그리고 아버지?

로하나는 위험한 줄 알면서도 서재 문 앞에서 다시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자세한 이야기는 들리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이미 대화를 마친 것인지 브란드의 근위대 부츠가 대리석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로하나가 황급히 몸을 돌려 복도 한쪽으로 몸을 숨기자마자 브란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실수 없게 해.”

이미 수도 밖에 나가 있어야 했던 드레고리의 목소리. 드레고리가 멀어져서야 브란드도 발걸음을 옮겼다. 로하나가 있는 복도 쪽이었다. 곧 있으면 마주치게 될 것이다.

“아, 깜짝아. 누나.”

“어어, 브란드!”

아슬아슬하게 막 걸어오는 것을 가장할 수 있었던 로하나가 웃으며 말했다.

“아니, 근무는 어쩌고, 집에는 무슨 일이야?”

근위대의 붉은색 군복을 입은 채 이 시간에 집에 있는 남동생을 보니 낯설었다.

“아니, 잠깐 일이 있어서…….”

브란드가 말끝을 흐렸다.

아버지가 또 너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하는 질문이 입가에만 머물렀다.

“뭐야. 왜 그렇게 걱정하는 얼굴이야. 아니 근데, 우리 누나 오늘도 정말 예쁘네.”

아무 말 없이 입술을 꾹 다무는 로하나를 보며 브란드가 너스레를 떨었다.

“아, 진짜. 누나, 나 잠깐 농땡이 치려고 집에서 쉰 건데, 이렇게 심각하기야? 이거 비밀이야?”

거짓말을 해?

브란드는 아버지와의 일을 로하나에게 숨긴 적 없었다. 아니, 그녀가 ‘알기로는’ 그랬다. 아버지와 무슨 일이 있든 이야기하는 동생인데…….

“나 이제 가 봐야 해. 다음에 보자, 누나.”

로하나가 다시 추궁하려고 입술을 떼자 이어지는 말을 막으려는 듯 브란드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브란드, 잠깐…….”

“아, 누나.”

어느새 복도 끝 작은 현관에 묶어 놓은 말을 탄 동생이 입을 뗐다.

“난 누나가 행복해질 수 있다면 다 좋아.”

뭐야……. 갑자기 무슨 소리야.

“그러니 나만 믿어.”

대답하려는데 어느새 말을 탄 브란드는 빠르게 멀어져 갔다.

멀어져 가는 동생을 보며 로하나는 늘 그녀를 괴롭히던 생각에 빠져들었다.

로하나는 불안하게 흔들리는 마음을 다시 단단히 먹었다. 방법을 찾자. 찾을 수 있어, 하고 되새기면서.

그 방법이 뭔지는 전혀 알 수 없었지만.

파티를 앞둔 발걸음이 무거웠다.

*

제국 최고의 권세가 딸의 생일답게 연회는 화려했다. 아직은 황태자의 약혼녀이기도 했으니 더욱 그랬다.

최고급 음식과 와인이 쉴 새 없이 제공되었고, 화려하고 맵시 좋은 사람들의 드레스가 스치는 소리와 함께 대리석 바닥을 경쾌하게 울리는 구두 굽 소리가 낭랑했다.

그때 비비안이 밝은 얼굴을 하고 로하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자신의 데뷔탕트를 굳이 당겨서 연 것이 민망한지 그녀의 목소리에는 어느 때보다 녹아내릴 듯한 아양이 가득했다.

“로하나 님, 생일 축하드려요.”

“비비안, 와 주셔서 고마워요.”

살뜰한 눈웃음을 지은 비비안이 주위를 슬쩍 둘러보았다.

“바르디 황태자 전하는…… 아직 안 오셨나 봐요.”

그녀는 먹이를 찾는 듯한 눈빛을 애써 숨기지도 않았다.

“네, 뭐.”

대답을 듣고도 두 눈은 계속 바빴다. 아마 지금은 오렐리아를 찾고 있을 것이었다.

“어제는 그 애랑 사냥을 나갔다 왔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군요.”

로하나는 머리로는 더 이상 그들과 자신이 상관없다고 생각했지만, 가슴이 제멋대로 뜨끔한 것까지 막지는 못했다.

로하나가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자 비비안이 다시 목소리를 줄여 왔다.

“아, 그러고 보니 지트니 상단 이야기는 사실인가요?”

순간, 다른 곳을 응시하던 그녀의 시선이 다시 비비안에게 향했다.

“어떤 이야기를 말씀하시는 거죠?”

공녀가 흥미를 갖자 만족스러운지 비비안은 재빨리 말을 이었다.

“파산이요! 갑작스럽게 망하기 일보 직전이라는 소문이 파다하던데요?”

“망한다고요?”

지트니 상단은 하노버 공작가를 중심으로 성장한 굵직한 해상 상단 중 하나였다.

쉽게 흔들릴 곳은 아니었다. 쉬이 그런 소문이 날 만한 곳도 아닐 텐데. 무엇보다 하노버 공녀인 자기 자신도 금시초문이었다.

“소문에서 지트니 상단이 어쩌다 그렇게 되었다고 하던가요?”

“그런 이유 같은 것까진 저야 모르죠.”

그런 어려운 이유를 저가 어떻게 알겠냐는 듯 비비안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묻는 당신은 대답을 들으면 알겠느냐는 암묵적 눈짓과 함께.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지금 파산 신청 일보 직전이라는 것 같더라고요. 저희 아버지께 들은 것이니 틀림없어요.”

로하나는 입을 다물었다. 불현듯 그날 마주쳤던 케이든의 태연했던 표정이 떠올랐다.

<모든 일에는 적절한 때와 방법이라는 게 있는 법이니까.>

설마. 아무리 카르크족에 관련된 일이라도 원작에서 알던 그는 오렐리아와 관련된 일이 아니면 크게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늘도 그래서 드레고리 공작께서 자리를 비우신 걸로 알았는데, 아닌가요?”

로하나는 서둘러 생각에서 빠져나와 비비안에게 대답했다.

“몰랐어요. 알아봐야겠네요.”

곧 다른 귀족들이 인사를 하러 오는 바람에 비비안은 눈을 찡긋하곤 물러났다.

로하나는 그로부터 한참 동안 모든 손님과 인사를 나눈 뒤에야 겨우 중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다이아몬드 머리 장식 핀으로 고정한 긴 머리카락이 가는 허리까지 흘러내리고 있었다. 바르디와 오렐리아, 케이든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결국 불참이라 원작에 안 나왔던 건가.

로하나는 와인을 한 모금 머금었다.

‘그런데 브란드까지 안 올 건 뭐야.’

누나 결혼하기 전 마지막 생일이라고 얼마나 유난이었는지 모른다. 아침에 보았던 모습이 다시 아른거렸다.

‘무슨 일이지.’

샴페인을 많이 받아 마셨더니 취기가 살짝 올랐다. 로하나는 열을 식힐 겸 테라스로 나갔다.

하얀 대리석으로 지은 테라스에는 부쩍 추워진 날씨에 사람이 없었다. 차가운 가을바람이 붉게 상기된 뺨을 차게 식혔다.

‘아, 좋다.’

이렇게만 살 수 있으면 참 좋겠구나. 바람 쐬고, 술 마시고.

로하나는 실없는 생각에 피식 웃으며 샴페인 잔을 기울였다.

그때 등 뒤에서 낯설지만 익숙한 떨림이 느껴졌다.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누가 제 등 뒤에 있는지.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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