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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일 흑막과의 계약결혼-8화 (8/125)

8

정원으로 나와 그녀의 곁에서 걷는 황태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명랑했다. 수심이라곤 모르는 푸른색의 말갛고 밝은 눈동자가 반짝였다.

‘오렐리아를 언젠가 정말 사랑하게 된다고 한들, 그게 그렇게 중요할까?’

로하나는 드레고리 하노버의 협박이 떠올랐다. 사실 애초에 목표는 황후였다. 사랑 정도야 운 좋게 잠시 얻은 것일 뿐이었다고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중요한 건 따로 있었지 않은가. 이번에야말로 닥치고 살면 주변 사람들을 지킬 수 있을지도 몰랐다.

‘또 네 생각만 할 거야? 도망치겠다고? 황후가 될 수 있는데 고작 남자 마음 하나 얻지 못했다고?’

지난 생의 선택을 죽을 만큼 후회했던 과거의 자신이 내는 목소리가 그녀의 머릿속을 거하게 울렸다.

‘얌전히 죽은 듯이 가만있어. 그렇게 망쳐 놓고도 또 네 생각만 하고 있다니.’

브란드의 얼굴이 머릿속에 스쳤다. 조디의 다친 팔과 어이없이 목숨을 잃었던 유모까지. 혼자 생각에 잠긴 로하나를 황태자의 목소리가 깨웠다.

“로하나.”

“네?”

바르디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또 다른 생각 하지.”

가라앉은 얼굴이 서운한 듯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오렐리아가 나타나기 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눈빛에 로하나는 시선을 돌려 버렸다.

“아…….”

“왜 그렇게 늘 다른 곳에 가 있는 것 같을까, 당신은.”

바르디가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절대 흐트러지지 않는 것까지 변함이 없네, 당신은.”

로하나의 미간이 좁혀지던 순간이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경호를 위해 먼발치에서 멈추는 큰 흑마 한 마리가 보였다. 북부의 말이었다.

바르디와 로하나의 시선이 그쪽을 향했다.

타고 있는 사람은 하늘색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미지의 남자, 히스였다. 경비대가 신분을 확인했는지 문을 열어 주자 로하나와 바르디 쪽으로 히스가 천천히 말을 몰았다.

로하나는 뒤따라오는 말이 있는지 목을 살짝 뺐다.

이어서 나타난 검은 말에는 예상대로 은발의 공작이 타고 있었지만 혼자는 아니었다.

밝은 금발의 여인이 함께였다.

“오렐리아?”

바르디가 인상을 쓰며 중얼거렸다. 몇 분 지나지 않아 히스가 도착하여 말에서 내렸다.

“황태자 전하.”

히스가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바르디는 그런 히스를 본 척도 하지 않은 채 케이든과 오렐리아가 말에서 내리는 것을 쏘아보았다.

“황태자 전하.”

오렐리아가 인사를 올리고, 케이든은 말없이 고개를 까딱했다.

“뭐야, 어디를 나갔다 오는 거야?”

미묘하게 날카로워진 목소리. 황태자의 벽안이 케이든을 향했다. 오렐리아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궁 안이 너무 갑갑하여 시내에 나갔는데 거기에서 딱 만났지 뭐예요!”

줄줄이 뒤따라오는 사용인과 기사들의 얼굴이 곧 쓰러질 것 같은 흙빛이었다.

“혼자 궁 밖에 나가다니! 위험하게 왜 그랬어?”

걱정하는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기까지 했다.

“그래서 이렇게 돌아오는 길은 공작님께서 함께해 주셨어요. 역시 저에게 제일 좋은 친구분이세요.”

친구분이라.

15년 전, 로하나는 황태자가 남부로 휴가를 가지 못하게 막은 일이 있었다. 그래서 바르디와 오렐리아는 어렸을 때 만나지 못했다.

그리고 무슨 연유인지 오렐리아는 케이든과 어렸을 때 만나 함께 지낸 모양이었다.

원작에서 바르디와 오렐리아가 소꿉친구에서 연인으로 발전하는데…… 이번에는 케이든과 오렐리아가 소꿉친구처럼 지냈던 걸까.

“로하나 공녀님.”

부르는 소리에 로하나가 시선을 돌리자 케이든이 눈에 들어왔다.

“괜찮으십니까. 안색이 많이 안 좋으십니다.”

약속한 대로 상단 앞에서 만난 것은 굳이 언급하지 않기로 한 것인지 공작의 목소리는 오늘 처음 만난 사람처럼 태연했다.

“괜찮아요.”

눈을 마주치며 로하나는 아까 그러했듯 다시 장단을 맞추었다.

“아직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담담한 목소리를 내는 케이든을 로하나는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로하나 공녀님, 정말 괜찮으세요?”

오렐리아가 불쑥 끼어들었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커다란 눈동자가 반짝였다. 작은 손이 로하나를 붙잡았다.

“아, 괜찮아요.”

로하나가 슬며시 손을 빼며 말했다.

“생일 파티를 앞두고 다치셔서 어떻게 해요. 제가 다 너무 속상해요.”

로하나는 약간 놀랐다. 결혼식에 가려져 있어서 그렇지, 1주일 뒤는 로하나의 생일이었다.

원작에서는 묘사된 적도 없는 생일이기는 했지만 어떻게 오렐리아가 벌써 그걸 아는 것인지 의문이었다.

“아, 네. 별일 아니에요. 생일 파티가 뭐라고요.”

“저는 초대하지 마세요. 저 때문에 다치신 셈인데…… 제가 무슨 면목으로 파티에 나가겠어요.”

오렐리아가 예쁜 얼굴로 눈물이 그렁그렁해져서 말했다. 목소리는 씩씩했고, 곧 부러질 것같이 작고 여린 몸에 연한 살구색 드레스가 정말 어여뻤다.

“네……?”

되묻는 로하나를 두고 바르디가 펄쩍 뛰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오렐리아! 로하나, 아니라고 얘기해 줘. 오렐리아가 그날도, 그다음 날도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모른다고. 밤새도록 잠도 못 자고…….”

아까까지의 치열한 고민이 허무할 만큼 맥빠지는 소리였다. 둘이 있는 모습을 보니 상황은 너무나 명확했다.

그때였다. 로하나의 눈에 황태자의 두툼한 손이 오렐리아의 등허리를 쓰다듬는 것이 보였다.

오랜 시간 로하나의 좁은 세상에서 그녀와 바르디는 연인이었다. 그렇기에 손짓 하나라도 그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고도 남았다.

순간 로하나의 가슴속에 겨우 매달려 있던 무언가가 툭 하고 떨어졌다. 무겁고, 쓰렸다.

원작을 몰랐어도, 빙의 같은 것을 하지 않았더라도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는 불을 보듯 훤했다.

‘이러다간 역시 황후가 되는 것도 어렵겠는데.’

흘러가는 꼴을 보니, 또 요절을 면치 못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하나는 속으로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급격히 피곤했다. 오라, 오지 마라로 더 이상 대화를 나누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피곤했다.

“그럴 리가요, 오렐리아 영애. 당연히 오셔야죠. 기대할게요.”

로하나는 사무적으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마치 처음 그녀와 마주쳤던 그날처럼.

정말요? 하며 울음을 터뜨리며 좋아하는 오렐리아를 바르디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바라보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럼 전 이만…….”

로하나는 아무와도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급히 몸을 돌려 발걸음을 서둘렀다.

바르디는 로하나를 막는 척하더니 이내 오렐리아에게로 주의를 빼앗긴 모양인지 더 다가오지 않았다.

<미안해. 당신이 필요했어.>

죽는 순간 들렸던 소년의 기묘한 목소리가 다시 뇌리에 스쳤다.

‘뭐가 왜 필요했다는 거야.’

도톰한 입술을 꾹 깨문 로하나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얼마나 걸었을까. 멀어질 만큼 멀어졌다 싶어서 로하나는 서두르던 발걸음을 늦췄다. 마르기 시작한 잔디가 자박자박 구두에 밟혔다.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는데.’

죽으면서 들린 헛소리에 애초에 뭘 기대했던 건지. 이번 세계에서는 중요한 사람일 거라는 상상이라도 했던 것이 우스워 웃음이 났다.

연애라는 달콤함에, 지친 마음을 아주 쉽게 그곳에 기대어 버렸다. 한심하기가 그지없어.

분하지만, 눈물이 났다. 두 번을 살면서도 또 똑같은 실수를 했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아서. 겉으론 착한 척, 말로는 늘 똑똑한 척, 태연한 척, 이중 삼중 계획과 대책을 세우면 무엇 하는가.

‘결국 이리 순진하게 원작대로 황태자에게 빠진 꼬락서니라니.’

여기에서 더 최악인 것은, 도대체 어떻게 행동해야 지난 생 같은 꼴이 나지 않는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파혼이 맞는가? 결국 결혼했다가 이혼이라도 하게 되면 타격이 더 클까?

이 꼴 저 꼴 보기 싫어 도망이라도 치면 좋겠지만.

‘정말?’

걷는 걸음 밑으로 마르기 시작하는 잔디가 바스락거렸다.

‘네가 정말 드레고리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뭘 어떻게 했어야 했는지, 어떻게 해야 할지 더 이상 머리 쓰고 싶지도 않았다. 사실은 배신당한 것만으로도 벅찼다. 전생에서도 그랬었다.

혹시 얼굴에 자국이 남을까 봐 걱정이 되어 바닥으로 떨어뜨리는 부끄러운 눈물이 구두가 내딛는 땅을 방울방울 적시고 있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등 뒤에서 중저음의 목소리가 울렸다.

“로하나 공녀.”

로하나는 뒤돌아보지 못하고 그대로 섰다. 잠깐 들었을 뿐이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쉽게 구분됐다. 다급히 불러세운 것치고 케이든은 말이 없었다.

뒤돌아서기엔 붉어졌을 얼굴을 보일 수 없어 로하나는 그대로 멈춘 채 서 있었다. 잠시 뜸을 들인 후 그가 천천히 입을 뗐다.

“갚을 방법을 물으셨죠.”

로하나는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가을바람이 스치자 머리카락이 나부꼈다. 곁눈으로 그의 망토 자락이 함께 흔들리는 것이 들어왔다.

“저도 초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로하나는 잠시 그대로 서 있었다. 뚱딴지같은 부탁이었다.

생일 초대를 부탁하는 건가?

무려 저 흑막이 보답을 받을 대가치고는 너무 소박하고 엉뚱했지만, 생각이 오렐리아와 바르디가 단둘이 파티에 참석하는 것을 참을 수 없겠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이해가 되었다.

그는 어디까지나 원작의 악역, 오렐리아를 열렬히 짝사랑하는 가여운 흑막이었다.

“네, 물론이죠.”

로하나는 조금 돌아보며 시선은 케이든 발치 쪽을 향했다. 눈물이 난 얼굴을 대놓고 보일 수는 없으니.

그가 눈치챌 것 같지도 않았고, 눈치챈다고 해도 신경 쓸 것도 아니지만. 지키고 싶은 최소한의 체면이었다.

“그럼…….”

로하나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울긋불긋 물들기 시작한 플라타너스 잎이 바람에 흩날려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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