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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일 흑막과의 계약결혼-7화 (7/125)

7

그는 정문에서 조금 비켜난 거리에 서서 그녀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생각하는 사이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감사하다는 말씀은 안 하셔도 됩니다.”

정중하면서도 은근 뻔뻔한 목소리에 로하나는 눈썹을 움찔했다.

“제가 감사할 일이었던가요?”

같이 뻔뻔하게 나서자 날카로운 검은 눈동자가 흥미롭다는 듯 그녀를 꿰뚫듯 바라보았다.

“굳이 뒷길에 세우신 좋은 말은 가문의 문장도 없고, 들고 계신 서류에 모자는 그렇다 쳐도, 베일까지.”

낮은 목소리는 차분하고 느긋했다. 지나치게 좋은 관찰력에 로하나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눈에 띄지 않고 싶으신 게 분명한데…….”

케이든이 한쪽 턱을 기울이며 덧붙였다.

“그냥 모른 척하고 가셨어야죠.”

“그 어처구니없는 사태를 보고도요?”

로하나는 경멸을 겨우 가린 목소리로 되물었다.

원작에서 그의 배신은 오로지 오렐리아를 향한 연모 때문이었다. 악스본을 죽였던 카르크족에 대한 배신도, 반란을 일으키기 위해 다시 만든 연합도 모두.

“고작 그 정도 일에 사람 어떻게 안 됩니다.”

냉랭한 목소리와 얼굴.

“죽지 않는다고 그런 일이 괜찮은 건 아니죠.”

얼마 전 상처투성이로 돌아온 조디의 몸이 로하나의 뇌리를 스쳤다. 이름조차 모르고 제집에서 죽어간 유모도.

“세상에 괜찮은 일만 일어나는 건 아니죠. 그때마다 누가 나서서 구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차가운 흑안이 그녀를 내려 보았다.

“불필요하지 않습니까? 심지어 공녀님의 계획만 틀어지지 않았습니까.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눈에 띄고 싶진 않았던 모양인데.”

입씨름할 일이 아니었고, 원래도 굳이 누구 말꼬리 잡는 일이 없었는데, 어쩐지 한마디를 더하게 만드는 묘한 화법이었다.

“그러게요, 공작님께서 먼저 움직여 주셨으면 제가 굳이 나서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말입니다.”

굳이 한마디를 더 쏘아붙이자 케이든은 잠시 침묵을 두더니 순순히 대답했다.

“특이하십니다.”

아린족 출신인 공녀가 굳이 천한 카르크 소년의 일에 발끈하는 것이 이상하다는 듯 케이든의 눈이 가늘어졌다.

“설령 제가 굳이 저 상황에 나선다고 해도, 물론 왜 그럴 일인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케이든은 천한 카르크족 소년의 안위는 이 세상 어느 누구도 관심 가질 일이 아니라는 것을 태연하게 설명했다.

“모든 일에는 적절한 때와 방법이라는 게 있는 법이니까.”

그러다 덧붙인 말에는 뼈가 있었다. 턱을 비스듬히 기울이면서 마주친 눈빛은 엷은 미소를 담고 있었다.

“어익후, 정말 죄송합니다. 이거 어쩌나.”

그때 마침, 상단의 박스를 한가득 실은 수레가 간신히 중심을 잡으며 다가왔다.

수레지기는 이런 길거리에 귀한 신분의 사람들이 서 있는 것이 난처하고 놀라운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로하나가 그로부터 멀어지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는 찰나였다. 케이든이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뻗어 그녀를 자연스럽게 당겨 제 바로 앞에 세웠다.

등을 지고 선 채 갑자기 그와 거리가 가까워지자 다시 그때 느껴졌던 독특한 나무 향이 났다. 눈보라 속에 선 나무의 향.

급격히 팽팽해진 긴장감이 공기를 휘감았다. 불편하고 어색했다.

너무 선을 넘었다 싶어 로하나는 재빨리 정신을 차렸다.

“샹들리에 건은 감사드립니다.”

화제를 전환하며 로하나는 몸을 돌려 그를 다시 바라보았다. 다만 눈은 피해서. 눈을 마주치기만 하면 위험한 경고음이 들리는 듯했기 때문이다.

가는 손이 공연히 서둘러 가죽 장갑을 꼈다. 그러고는 늦은 감이 있지만 뒤늦게 그의 안부를 물었다.

“다치신 곳은 없으세요?”

장갑을 끼고 천천히 고개를 들자 케이든은 설마 본인이 그런 걸로 다치겠냐는 듯 느른한 눈으로 로하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없으시다니, 다행이네요.”

로하나가 다시 모자를 쓰고 베일로 얼굴을 가리는 찰나, 낮은 목소리가 그녀를 붙잡았다.

“당신은.”

가을 햇살에 흑안이 오묘하게 다양한 빛으로 반짝였다.

“괜찮으십니까.”

언뜻 다정하다고 착각할 정도로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로하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덕분에.”

그때 멀리서 히스가 천천히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소년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더니 활짝 웃는 얼굴을 한 채.

“오늘 일은…….”

로하나가 서둘러 입을 떼자 케이든은 안다는 듯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네, 저의 부탁에 지트니 상단까지 안내를 해 주신 것이죠. 히스는 아무것도 모를 겁니다.”

약간의 침묵을 끌던 로하나가 다시 입을 뗐다.

“이렇게까지 해 주실 이유가 없으신데요.”

어깨를 으쓱하는 그를 보며 로하나는 인사치레를 덧붙였다.

“갚을 방법이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갚을 방법이요?”

예의상 던진 말에 의외의 질문이라는 듯 무감하던 공작의 얼굴에 처음으로 흥미로워하는 표정이 스쳤다.

“말씀하시니 생각해 보죠.”

특유의 정중함에 로하나도 고개를 까딱했다.

“그럼.”

로하나는 몸을 돌려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히스가 미처 인사하지 못했다고 아쉬워하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케이든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

“공녀님, 어디 다녀오셨어요!”

돌아오는 내내 이상하게 두근거리는 심장을 겨우 진정시키고 공작저로 들어오는데, 조디가 법석을 떨며 정원 앞까지 뛰어나왔다.

“조디, 몸은 괜찮아?”

“지금 제 몸이 문제가 아니에요!”

잔뜩 상기된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로하나 옆에 바짝 붙었다.

“무슨 일이야?”

손에 든 가방을 대충 벗은 망토로 가리며 로하나가 물었다.

“오셨어요, 드디어.”

흥분한 목소리에 로하나는 조디가 누굴 말하는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가장 큰 응접실로 걸음을 옮기자 붉은 옷을 입은 경비대가 앞을 지키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로하나가 무릎을 굽혀 인사를 올렸다. 큰 키와 두꺼운 몸에 꼭 맞는 붉은 예복을 입은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적갈색 머리카락 아래 짙푸른 눈동자가 반짝였다.

“황태자 전하.”

오랜 그녀의 연인, 제국의 황태자였다. 바르디는 성큼성큼 걷어오더니 그대로 로하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좀 어때?”

다정하고 편한 목소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자연스러웠다.

바르디는 로하나에게만큼은 어릴 때와 같은 말투를 유지했다. 그것이 둘 사이의 특별함이라고 했던가.

로하나는 바르디를 올려보았다.

다신 이런 식의 배신에 이렇게 흔들릴 거라 생각하지 못했는데. 배신은 아팠고, 그녀는 똑같이 구질구질했다. 이 와중에도 문득 반가운 것을 보니.

“결혼식이 코앞인데 요즘 너무 바빴어. 미안해.”

“결혼식이요?”

까맣게 잊고 있던 준비 과정들이 떠올랐다.

황궁의 가장 솜씨 좋은 시녀들이 모여서 일일이 짜는 레이스로 한 땀 한 땀 연결한 드레스. 봄에나 구할 수 있다는 꽃들로 장식될 연회장들에 대한 이야기까지.

로하나의 허무한 반문에 짧은 침묵이 흘렀다.

“로하나, 내가 우리 사이는 변화가 없을 거라고 말했잖아. 그동안은 너무 바빠서 틈을 못 냈어.”

황태자의 조부인 현 황제가 자리에 누운 지 어언 3년. 그의 남은 시간을 두고 황실은 낙관적이지 않았다. 하여 황태자가 바빠져야 했다. 한 달에 걸친 동부 순회도 그래서 있었던 것이고.

그렇지만.

로하나는 두통을 느꼈다.

“전하.”

오렐리아는 어쩌실 건가요?

그러나 그 말이 바보같이 목에 걸려서 나오지 않았다. 혹시 몰라 야반도주까지 계획하고 있는 주제에 다시 구질구질하게 매달리고 싶은 마음은 관성인가.

설마 정말 사랑인가.

“오렐리아 일은 정말 미안해. 사람들이 어떻게 떠드는지 알고 있어.”

로하나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황태자의 얼굴이 잠시 망설이는 듯 어두워졌다.

“그렇지만…… 그녀를 케이든 옆에 둘 수는 없었어. 얼마나 힘들게 살고 있었는지 당신은 모를 거야.”

“힘들게 살아요?”

“카르크족과 살게 할 수는 없잖아. 오렐리아는 남부 출신이야.”

오렐리아가 남부 출신인 것까지는 원작과 같은 모양이었다.

로하나는 오늘 일에 더하여, 황태자의 목소리에 실린 카르크족에 대한 강한 반감이 새삼스러웠다.

원작에서는 크게 묘사하지 않아 몰랐다.

“그리고 케이든은…….”

“델클리프 공작님이요?”

순간, 로하나의 입에서 불쑥 나온 그의 이름에 바르디는 불쾌한 듯 미간을 좁혔다.

“사실 누구를 옆에 둘 여지가 있는 사람이 아니야. 곤란에 처한 그녀를 그냥 둘 순 없었어.”

최근까지는 그저 험준한 동부 국경을 지켜 주는 형으로 케이든을 선망했던 바르디였는데, 미묘하게 그가 케이든을 불편해하고 있었다.

주인공과 악당의 신경전이 시작된 모양이었다.

그때, 커다랗고 따뜻한 손이 그녀를 잡았다.

“로하나, 이러고 있지 말고 나가자. 날씨가 엄청나게 좋아.”

“네?”

“곧 겨울이 되면 너무 춥다고. 가을이면 우리 늘 밖에서 시간 보냈잖아.”

억센 힘이 단호하게 공녀를 끌어올리자 앉아 있던 몸이 저절로 일으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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