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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란드를 보낸 뒤 로하나는 시녀들을 물리고 오랜 시간 침대 밑에 숨겨 놓았던 종이 박스를 꺼냈다. 안에는 서류 더미가 가득했다.
살아갈 계획을 황태자에게만 기대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이전 생도 그녀의 계획은 늘 어그러지기만 했으니 이번 생이라고 다를까.
로하나는 담담하게 서류 더미를 긴 손가락으로 넘겨 보았다.
공작가 재산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소액이지만 이렇게 저렇게 몰래 작성한 채권이 보였다.
약간의 땅과 선박에 대한 소유권을 큰 눈이 빠르게 훑었다. 모두 그녀가 빼돌린 자산이었다.
그녀의 부친 드레고리 하노버는 이런저런 밀거래에 로하나를 써 왔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여자이니 얼굴과 머리카락만 가리면 이런저런 거래에서 ‘목격’되지 않고 활동할 수 있었다.
‘모두 현금화하는 것이 낫겠어.’
머리로는 야반도주를 떠올리기까지 하고 있으면서도 뒤따르는 무거운 생각에 서류를 훑던 손의 속도가 느려졌다.
도망하고 나면 남은 인물들이 어떻게 될까. 수많은 시녀들은 물론이고 가장 가까운 조디, 그리고 누구보다 브란드는?
로하나는 냉정하게 계획을 세우다가 손을 떨며 부디 이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있기만을 다시 한번 기원했다.
‘도망’에 실패한 대가는 매서웠다. 지난 생엔 아버지의 목숨이, 이번 삶에선 유모의 목숨이 이미 한번 그 대가로 치러졌었다.
그래도 어쨌든 돈은 없는 것보단 있는 것이 늘 나았다.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해.’
로하나는 수도 시내로 향하기 위해 방을 나섰다.
*
지트니 상단은 하노버가 관리하는 상단 중 하나였다. 몰래 온 것이라 찾은 작은 뒷방 사무실은 거의 쓰지 않는 듯 먼지가 소복했다.
로하나는 실무자 중 가장 입이 무겁고 공작가와는 가장 먼 욥을 만났다. 그리고 그가 채권을 현금화시켜 가져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공작께서 모르게 하실 일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로하나 일이라면 껌뻑 죽는 욥은 그래도 드레고리 하노버 공작의 눈치가 보이는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아버님 선물을 마련하려고 하는데 놀라게 해 드리고 싶어서.”
로하나는 눈웃음을 지으며 달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남부에 별장이라도 하나 지으려는 거네.”
그제야 안심이 된 듯 젊은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공녀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이건 철저히 비밀로 할 테니 아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때 저희 아이에게 전담 의원 불러 주신 것을 제가 얼마나 감사해하는지…….”
싱긋 미소를 지으며 로하나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이었다.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아…… 뒷문으로 나가셔야죠?”
누구의 눈에도 띄고 싶지 않다고 해 얼굴을 짙은 베일로 가리고 뒷문으로 들어섰던 그녀의 눈치를 보며 욥이 자리를 안내했다.
그때였다. 날카로운 비명이 건물 안을 울렸다. 소년의 것으로 들리는 비명에 로하나가 미간을 좁혔다. 어린아이의 비명이라니. 세상에서 가장 듣기 싫은 소리였다.
로하나는 말없이 중앙 쪽으로 몸을 틀어 현관을 지나 소란의 진원지로 향했다. 걸음이 빨랐다.
장성한 사내 밑에 엎드려 있는 작은 소년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린 새끼가 어디서 버르장머리 없게.”
베일에 가린 로하나의 차분한 눈이 욕을 내뱉는 남자에게 고정되었다.
“돈을 받을 때가 되면 받게 되겠지. 너 같은 걸 써 주는 걸 감사히 여기지는 못할망정.”
남자는 몸을 수그리더니 소년의 이마를 검지로 툭툭 찔렀다.
겨우 열 살 남짓 되었을까, 어린 은발의 소년은 넘어지면서 크게 다친 것인지 움직이지도 못하고 악에 받친 눈으로 남자를 죽일 듯이 노려보기만 했다.
다시 한번 남자가 소년을 걷어찼다. 소년은 몇 개 없던 계단 밑으로 힘없이 굴러떨어졌다.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남자가 다시 육중한 다리를 움직여 소년에게 다가갔다. 무지막지한 다리를 들어 올리는 순간이었다.
“그만하게.”
낮은 로하나의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
“넌 뭐야?”
남자는 허리에 손을 얹으며 팔자걸음으로 엉거주춤 로하나를 향해 걸었다. 시큼한 술 냄새가 먼 거리에서도 진동을 했다. 로하나는 소년에게 시선을 돌렸다.
“얼마를 받아야 하지?”
소년은 분노한 눈으로 로하나까지 죽일 듯 노려보았다. 어디서 본 듯한 시선이었다.
로하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소년에게 대답하라는 눈빛을 보냈다. 거구의 남자가 거리를 좁혀 왔다.
“아니, 얼마고 나발이고, 네가 뭔데 끼어들어서.”
“넌 물러서.”
로하나가 낮은 목소리로 으름장을 놓았다.
순간, 남자의 거친 손이 로하나의 망토 앞섶을 잡았다. 욥이 깜짝 놀라 안절부절못하면서 그녀 뒤에서 서성거렸다.
“여자라고 봐줄 정도로 상단이 우스워 보이나. 여긴 해상 상단이야. 어딜 재수 없게 여자가 바닷일 하는 델 나돌아다녀?”
로하나가 거칠게 그의 손을 치웠다. 술에 절어서인지 그는 조금 중심을 잃을 정도로 휘청였다.
소년이 흘린 피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넌 나를 따라오너라.”
더 눈에 띄기는 부담스러워했던 그녀가 소년을 불러 나가려는 찰나였다.
“이년이 진짜!”
거친 손가락이 그대로 로하나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우악스러운 손아귀에 몸이 휘청하며 넘어질 뻔했으나 그녀는 간신히 몸을 피해 빠져나왔다.
그러나 그 순간의 충격으로 모자와 그에 달린 베일이 바닥에 떨어졌고 순식간에 얼굴이 드러났다.
욥보다 상관인 부대표가 그녀를 알아보고는 헉, 하고 놀라는 소리를 냈다. 술에 취한 주정뱅이는 그런 제 상사의 얼굴을 보더니 그녀를 향해 인상을 찌푸렸다.
부대표가 어쩔 줄 모르고 허리를 숙였다.
“아…… 아, 하노버 공녀님.”
하노버라는 이름에 모두가 술렁였다. 술에 취해 있던 남자가 정신을 차린 듯 당황한 얼굴을 했다.
“하노버 공작가와 거래를 하는 상단이면서 소년의 임금 하나 제대로 지불 못 하나?”
“죄…… 죄송합니다. 제가 술에…… 아니, 제가 미쳐서…….”
“이런 일은 없게 했으면 좋겠네. 아버님께서 아시면 좋아하지 않으실 텐데. 제국민으로서의 기본을 지켜야지.”
그때 그새 귀신같이 소식을 듣고 온 상단의 대표인 지트니가 헐레벌떡 뒤에서 뛰어왔다. 쿵쿵, 무거운 발걸음에 바닥이 울렸다.
“아, 아니, 공녀님께서 어떻게 여길. 오늘 오신다는 말씀 없으셨지 않습니까!”
로하나는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이렇게 상단의 주인까지 나서면 드레고리가 그녀의 출입을 알게 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게…….”
뭐라고 핑계를 대야 하나. 공작의 명 없이 혼자 상단을 드나드는 것을 누구에게든 알려서 좋을 것이 없었다.
이번 계획을 엎어야 하나.
로하나가 빠르게 머리를 굴리던 그때였다.
“제가 안내를 좀 부탁드렸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목소리가 난 정문 쪽으로 쏠렸다. 천장이 낮아 보일 정도로 키 큰 남자가 여유롭게 문에 기대서 있었다. 가을 햇살에 깔끔하게 올린 은발이 반짝였다.
‘케이든?’
그는 달랑 셔츠 위에 간단한 청색 망토를 걸친 차림이었다. 햇빛 아래에서 처음 보는 그의 모습은 당황스러울 만큼 완벽했다.
짙은 눈매에 높고 곧은 콧대, 강하고 날카로운 턱이 눈매만큼 각져 있었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무료한 얼굴로 소년을 슬쩍 보더니 이내 로하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본능적인 두려움이 모두를 압도한 것이 분명했다.
‘혼혈 왕자.’
언뜻 보아도 카르크족 출신인 것이 자명한 은발의 소년이 당하는 것을 보았다.
아무리 카르크족을 소탕한 영웅이라지만 케이든이 저와 똑같은 머리 색의 소년이 이렇게 당한 것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지 기묘한 긴장이 상단을 휘감았다.
“샘을 밀어 넣어. 어쨌든 저 새끼가 잘못한 거잖아.”
상단인들의 속삭임이 귓가에 들렸다.
“됐어. 악스본 목을 치신 게 누군데. 공작님은 어엿한 아르드골드 제국의 황족이셔.”
로하나가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케이든의 눈이 그녀를 막았다.
‘그냥 있으세요.’
로하나는 살짝 벌어진 입술을 다물었다. 비현실적인 미남자의 눈빛엔 거역하기 힘든 무언가가 서려 있었다.
“데…… 델클리프 공작님.”
갑작스러운 고위 귀족, 아니 황족의 등장에 지트니는 어쩔 줄 몰라 하며 허리를 조아렸다.
상단에 공작 정도 되는 귀족이 직접 나타나는 건 드문 일이었다. 편집증적으로 재산을 관리하는 하노버 정도가 아니라면.
“무……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아…… 해상 무역에 관심이 있어서.”
케이든이 태연하게 낮은 목소리 대답했다. 시선은 로하나에게서 떨어지지 않은 채였다.
“한 번은 직접 눈으로 보고 확인하는 편이라.”
집요한 눈빛에 로하나는 샹들리에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때도 꼭 저 눈이었다.
‘호기심……?’
아니, 그것과도 뭔가 달랐다. 남자의 시선이라면 로하나도 지겹게 받아 왔었다. 그것과도 달랐다.
로하나의 보랏빛 눈동자가 가늘어지는 순간, 그녀로부터 시선을 뗀 케이든이 입을 열었다.
“확인은 했으니 다음에 사람을 보내지.”
정중한 말에는 알 수 없는 한기가 서려 있었는데, 주변 사내들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인지 ‘그럼 그렇지.’ 하는 얼굴로 태연해했다. 묘한 승리감까지 띤 얼굴들은 역겹기 그지없었다.
“드레고리 하노버 공작께서 저희 상단을 델클리프 공작께 추천하신 것일까요?”
먼저 걸어 나가는 케이든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지트니는 마주 잡은 손을 초조하게 비볐다.
“제가 추천했습니다. 어쩌다 이야기가 나와서. 시내에 나온 김에.”
로하나가 차분하게 장단을 맞추었다.
“아아, 그러셨군요. 공녀님, 샘 저놈은 제가 오늘부로 해고하겠습니다. 혹시 다치신 곳은…….”
“없네.”
로하나는 짧게 대답하며 케이든의 뒤를 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