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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님, 오늘은 혹시 모르니 침대에 기대서 주무셔야 합니다. 누우시면 위험합니다.”
주치의의 말에 로하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동공 움직임을 확인해야 하니 두 시간마다 일어나셔야 해요. 불편하셔도 오늘 밤만 참으셔야 합니다. 혹시 구토할 것 같거나 구토하시게 되면 반드시 저를 부르셔야 합니다.”
<어지럽거나 구토하고 싶으시면 반드시 말씀하셔야 합니다. 머리를 좀 부딪치셨어요.>
케이든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네, 알겠어요.”
그때 침실 문이 벌컥 열렸다.
“공녀님!”
조디였다.
“조디!”
“공녀님, 괜찮으세요? 이게 무슨 일이에요.”
조디는 왈칵 눈물을 쏟으며 침대 옆으로 달려왔다.
“유난은. 별일 아니야. 다치지도 않았고. 이건 예방 차원.”
로하나가 밝게 이야기했다. 주치의가 인사를 올리고 나가자마자 조디는 더욱 소리를 높여 울었다. 로하나의 시선은 그녀의 작은 손에 다시 고정되었다.
“조디, 너야말로 괜찮아?”
로하나는 안 떨어지는 입을 떼며 물었다.
“전 괜찮아요, 공녀님. 아무렇지도 않아요.”
거짓말.
조디는 벌써 겨울 메이드복을 입고 있었다. 두껍고 긴 상의, 검은 타이츠까지. 미친 남자 같으니라고.
로하나는 제 아버지의 폭력이나 잔인함이 다른 귀족들보다 특별히 나쁘지 않다는 조디의 너스레를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더 역겨웠다.
“공녀님, 지금 너무 동요하시면 안 돼요. 절대 안정하셔야 한다고요!”
마리가 조디를 나무라듯 쳐다보며 말했다.
“아, 그렇지. 미안해. 그래도 너무 뵙고 싶어서.”
조디가 머쓱한 듯 웃었다.
“너도 들어가서 좀 쉬어. 오늘은 내가 공녀님을 모실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마리가 똑 부러지게 말했다.
“알겠어. 공녀님, 저는 일단 물러나 볼게요.”
로하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꼭 잡고 있던 조디의 손을 풀어 주었다. 로하나는 침대에 기댄 채 밖을 바라보았다. 빗소리가 정적을 채웠다.
‘죽을 뻔했다.’
발끝부터 천천히 소름이 끼쳤다. 또다시 이렇게 어영부영 살다가, 또 ‘흰빛’을 보고 죽을 뻔했어. 그리고 날카로운 금속 소리마저 비슷했지.
로하나는 사그락대는 시트를 바짝 끌어당겼다.
몸이 추웠다.
‘춥다…….’
추운 건 어떻게 해야 하지. 로하나는 고단한 마음을 추스르며 생각했다. 아무래도 쉽게 잠을 이룰 수가 없을 것 같았다.
*
오랜만에 온 황궁은 여전했다. 역겨울 정도의 사치와 함께 귀족들의 별관이 조금 더 늘어난 것 빼고는.
황족에게 내주게 되어 있는 내실은 그중에서도 더욱 화려했다. 끝도 없이 높은 천장 아래 빳빳하고 화려한 레이스로 장식한 벽이 달빛에 어스름히 빛났다.
“이걸 봐.”
젖은 머리카락을 털면서 다가오는 히스에게 케이든이 입을 열었다.
그의 큰 손에는 샹들리에의 잘린 기둥 끝부분이 들려 있었다. 철로 만들어진 단단한 이음새 고리가 억지로 벌어진 듯 어그러져 있었다.
“그건 언제 챙겼대? 중요한 증거품을 가로채다니.”
히스가 놀리는 말을 하며 소파에 털썩 앉았다. 케이든은 조각을 내려놓으며 창가로 걸었다. 물기 어린 은발이 달빛에 은은하게 반짝였다.
“뭐…….”
히스가 말을 이었다.
“애먼 카르크인들 또 줄초상 나게 하는 것보단 적당히 우리 선에서 해결하는 게 낫겠지.”
마력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미 사라졌다고 믿는 금기의 능력이었다.
그나마 그것이 가능하려면 카르크족의 피가 섞여야만 했으니, 어쩌다 있는 ‘불길한’ 일이 있을 때면 카르크족이 제일 먼저 의심을 받았다. 사실 여부와는 상관없이.
케이든은 별다른 반응 없이 밖을 바라보기만 했다. 말이 없는 그의 시선을 따라가자 중앙 정원과 분수대가 보였다. 그리고 그 너머에 있는 으리으리한 하노버 공작가의 별관도.
“정말 아슬아슬했어.”
너스레를 떨던 히스가 덧붙였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케이든이 미간을 좁히며 대답했다.
“애초에 목표가 로하나 하노버였는지, 오렐리아였는지, 아니면 그냥 소란이었는지 알 수가 없군.”
“웬일로 말이 많네. 신경이 많이 쓰이나 봐.”
“너는 태연하군.”
무심히 대답한 케이든의 날카로운 시선이 창밖의 하노버 별관에서 다시 샹들리에 조각으로 옮겨졌다. 부자연스럽게 벌어진, 손가락보다 굵은 강철.
마력을 쓰는 자가 황궁 안에 있다.
“글쎄, 나는 그냥 좀 반가운 정도?”
히스가 샹들리에 조각을 들어서 던졌다 잡으며 물었다. 반농담이었는데 케이든의 진지한 눈을 보고 히스는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마력을 쓰는 자를 그들 선에서 수습하는 것이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이번 일은 미묘하게 뭔가가 달랐다.
‘황궁에 와서 그런가?’
히스는 속으로 끙 소리를 내며 기지개를 켰다.
사흘 거리를 하루 만에 달려왔다. 저도 어디 가서 누구보다 먼저 피곤했던 적이 없는 사람이지만 케이든 앞에선 예외였다.
케이든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하게 소파에 기대어 생각에 잠겨 있었다.
저 괴물.
히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뜨거운 물수건으로 눈자위를 꾹 눌렀다.
*
오랜만에 지난 삶의 꿈을 꾸었다. 아버지의 장례식장. 처음 보는 사람인 양 낯설었던 어머니의 얼굴이 마지막 시야에 스쳤다. 원망만이 가득하던.
<남자가 그럴 수도 있지, 그렇다고 이혼해서 집안을 말아먹어?>
그날은 비가 내렸고, 어머니의 절규와 사람들의 동정과 조롱 섞인 나지막한 목소리가 비 냄새에 섞여 가슴을 찢어 놓았다.
길을 건너던 중 환한 전조등 앞에서 갑자기 이상한 목소리가 들렸다. 꼭 머릿속에 콕 박혀서 떠나지 않는 음성이었다.
<미안해, 당신이 필요했어.>
“허억!”
로하나는 거친 숨을 들이켜며 눈을 떴다. 반짝이는 실크로 장식한 침대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시야에 머문 창문 밖의 푸른 새벽빛이 이른 시각임을 나타냈다.
그때 밖에서 익숙한 인기척이 났다. 시녀들이 공손한 목소리로 인사를 올리는 소리가 뒤를 이었다.
이 이른 새벽에 걱정되는 발걸음을 할 남자. 그녀의 유일한 혈육다운 혈육. 브란드 하노버였다.
작은 키에 제 누이보다 마른 몸매 위로 입은 근위대 군복이 어쩐지 어설펐지만, 절도 있는 군인이 되기 위해 그가 얼마나 노력하는지 아는 로하나가 보기엔 충분히 멋있었다.
극악한 부친의 성에는 어느 구석으로 보아도 마음에 들지 않는 아들이었지만 심성이 착해 누나 일이라면 껌뻑 죽는 동생.
잠옷에 레이스 가운만을 걸친 채 침대에서 나와 자리에 앉는 로하나의 몸에 감긴 붕대를 보며, 브란드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로하나가 겨우 긁힌 것뿐이라 괜찮다고 여러 번 안심시키고 나서야 브란드는 겨우겨우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누나, 미안. 어제 근무가 너무 늦게 끝나서.”
“무슨, 별일도 아니었는데.”
로하나의 미소에도 브란드의 하얀 얼굴은 걱정을 담고 가라앉았다.
“조명 관리자는 황태자가 그다음 날 바로 다 죽인 모양이야. 담당자는 물론 그 수하들까지도.”
“어떻게, 벌써?”
“그냥, 어젯밤에 바로.”
잠이 든 사이 그런 일이 있었을 줄은 몰랐다.
“재판도 하지 않고? 그렇게 빠르게 결정이 가능한 거야?”
브란드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잠시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열었다 다시 닫았다.
주변엔 조디만이 커튼을 조용히 걷고 있을 뿐인 것을 확인한 동생은 이내 다시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당연히 원래는 그렇게 하면 안 되는데, 이번엔 황태자 전하의 심기를 많이 거스른 것 같아. 아무래도 누나가 많이 걱정되셨던 모양이야.”
내가 아니라 오렐리아가 걱정된 거겠지, 하는 말이 입 속에만 맴돌았다.
누이의 눈빛을 보고 무슨 뜻인지 눈치챈 동생은 다시 입만 열었다 닫았다 했다. 아마 적당한 위로의 말을 찾는데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브란드는 말을 이었다.
“그…… 그 여자분은 델클리프 공작님의 성에서 지내고 있었다나 봐.”
“성에서 같이?”
“꽤 어릴 때부터였다는 것만 알아냈어.”
로하나가 잠시 생각에 잠긴 사이 브란드가 계속했다.
“황태자 전하는 아무래도 카르크족들 사이에서 아린인이 계속 살기는 힘들다고 생각하셔서……. 그래서 이번에 함께 돌아오셨던 모양이야.”
바르디도 여러 번 해명했던 내용이었다. 로하나는 피식 웃고는 여명이 밝아 오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도 노프탈에서 케이든과 오렐리아가 만났다면 둘의 인연이 거기에서 시작된 것이다.
사랑하는 여자를 쫓아 미친 듯이 달려오는 것은 로하나가 아는 케이든의 성격과 맞아떨어졌다.
“너무 걱정하지 마. 그것보다 나 오늘 어디 좀 다녀와야겠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아직 몸도 좋지 않을 텐데 집에서 쉬어야지.”
“조용히, 다녀올 데가 있어.”
‘조용히’라는 말을 하는 것을 보니 혼자서 잠행에 나서려는 모양이었다.
마차도 없이, 심지어 말에 가문의 문양도 모두 뗀 채 여자 혼자 밖을 나서겠다니.
브란드는 천생 얌전해 보이는 누이가 가진 의외의 이면에 항상 간담이 서늘했다. 아마 아무도 상상조차 하지 못할 일이리라.
“금방 돌아올게, 걱정하지 마.”
“아니, 도대체 어디로 어떻게 다니는 거야? 나한테라도 말해 주면 안 돼?”
어릴 적에 우연히 발견한 정원 속 통로. 그곳을 떠올리며 로하나는 장난스럽게 미소를 짓고 고개를 저었다.
그럼 그렇지, 하는 브란드의 얼굴에 다시 무거운 수심이 내려앉았다. 어쩐지 단순히 늘 있던 일을 걱정하는 눈치가 아닌 것 같을 정도로.
“누나, 아무래도 이상해. 지금은 조심해야 될 것 같아.”
“샹들리에 일은 그냥 사고야. 불운하지만 그런 일도 있는 거지.”
별일 아니라는 듯 대수롭지 않게 말을 마친 로하나는 몸을 일으켰다.
눈에 띄지 않게 시내에 다녀오려면 빨리 준비하는 편이 나았다. 해상 상단은 해가 밝기 전 새벽부터 바쁘니까.
마음이 분주한 로하나의 생각을 깨운 것은 다급한 남동생의 목소리였다.
“누나, 아무래도 많이 이상하다니깐.”
“무슨 일인데?”
“그게…….”
브란드는 굉장히 곤란한 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털어놓듯 말을 꺼냈다.
“좀 이상한 일이 있어. 델클리프 공작께서 황궁에 들어오는 관문마다 이상한 질문을 하셨더라고.”
케이든이?
브란드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손을 마주 잡았다.
“무슨 질문?”
“그…… 그게 나도 잘은 모르겠는데. 어쨌든 조심해, 누나. 정말로.”
“뭔데 그래?”
로하나가 재차 채근하자 동생은 열심히 주변을 다시 둘러본 후에야 겨우 입을 열었다.
“로하나 공녀가 어디 있느냐고 묻더래. 황궁 입구부터 연회장 입구를 지키던 경비병한테까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