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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지?’
고개를 든 로하나의 눈앞에 큰 빛이 휘청였다.
‘어?’
머리 위에 있던 샹들리에가 금속 마찰음을 내며 크게 휘청였다.
한 번 만났던 죽음이었기 때문일까. 익숙한 기분이었다.
오늘도 꼭 그날처럼 비가 오고 있었다. 비가 오는 날, 다시 보이는 눈이 부신 불빛. 날카롭게 멈추던 자동차 타이어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어쩜 비슷해라.’
샹들리에가 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샹들리에 밑에 내가 있구나.
끼이이이이이이익.
로하나는 연회장 사람들의 비명을 들으며 눈을 감았다.
‘설마 이렇게 죽는 건가.’
원작 같은 거 신경 쓸 주제도 아니었네.
콰아아아아앙.
샹들리에가 떨어지며 박살 나는 굉음이 연회장에 울렸다. 사람들의 비명이 연회장을 순식간에 아비규환으로 만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이상하게 등이 아팠다. 등으로 넘어진 것처럼.
‘그럼, 나 샹들리에를 몸 앞으로 맞은 건가.’
하긴, 뒷걸음질 치려고 했으니 뒤로 넘어진 모양이었다.
‘아프겠다.’
깨질 듯한 이명이 잦아들자 이번엔 요란한 구두 굽 소리와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때 차가운 뭔가가 뺨에 떨어졌다.
‘물?’
로하나는 어지러움을 참고 천천히 눈을 떴다.
‘뭐지?’
번쩍이는 빛의 환들에 어두운 그림자가 뒤섞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뺨에 다시 차가운 뭔가가 떨어졌다. 일렁이던 불빛이 제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돌아오기 시작한 감각들로 특이한 체취가 느껴졌다.
짙은 나무와 눈보라 냄새.
천천히 망막에 상이 맺혔다. 짙은 눈매에 새하얀 은발. 빨려들듯 어두운 검은 갑주를 입은 남자가 그녀의 몸 위에 올라와 있었다. 그리고 그의 몸이 그녀의 몸을 거의 덮다시피 가리고 있었다.
넓은 어깨와 단단한 가슴에서 놀랄 만큼 뜨거운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비에 완전히 젖은 머리칼에서는 차가운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하얀 늑대.
사람 같지 않은 묘한 기운이 온몸을 휘감았다.
왼팔로는 로하나의 뒤통수와 목을, 오른팔로는 큰 방패로 그들의 머리와 몸 위를 단단히 받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검은 눈동자가 그녀를 꿰뚫듯이 내려다봤다.
“괜찮으십니까.”
이명을 뚫고 짙고 낮은 목소리가 또렷하게 귓가에 울렸다.
탄식에 가까운 숨이 그녀의 입술 사이로 흘렀다.
그 사람이었다.
동부 노프탈의 영주.
은발의 혼혈 황족.
그의 날카로운 턱을 따라 흘러내린 차가운 빗방울이 다시 로하나의 뺨에 떨어졌다.
그리고 이 작품의 흑막.
케이든 델클리프.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로하나는 뺨에 떨어진 차가운 빗방울을 따라 시선을 올렸다.
깊은 흑색 눈동자의 짙은 시선이 집요했다.
사람들의 웅성거림과 비명이 요란했지만 그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그녀만을 바라봤다.
곧고 높은 코에 조각 같은 얼굴. 짙은 선을 따라 밝은 빛 옆으로 짙은 그림자가 얼굴에 졌고, 샹들리에가 떨어진 충격에 흐트러진 은발이 빗물에 젖은 채 이마 앞에 흩어져 있었다.
‘나를…….’
빠른 심장 박동이 비에 젖어 차가운 갑주를 넘어서 느껴질 만큼 선명했다. 서늘한 눈빛만으로도 온몸이 달아올랐다.
‘알아……?’
남자가 방패를 천천히 옆으로 내리자 촤르르 하고 유리와 금속이 바닥에 쏟아졌다.
과연 한 인간이 정말 견딜 수 있는 정도의 무게였나 싶을 만큼 어마어마한 무게감이 있는 파편들이었다.
“히스, 상황은?”
케이든이 천천히 고개를 들며 앞에 다가온 남자에게 물었다.
“이상 없습니다. 놀랍군요.”
눈앞의 광경은 너무나 비현실적이었다. 무엇보다 어째서 이 사람이 갑자기 여기에?
“……녀.”
머리가 아팠다.
“로하나 공녀.”
차가운 손이 뺨에 닿는 순간, 로하나가 펄쩍 뛰며 놀랐다. 그는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다는 듯 멀찍이 큰 손을 뗐다.
“지금 제가 공녀를 안아 올릴 겁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정말 케이든 델클리프였다. 으르렁거리는 듯한 낮은 중저음의 목소리에 로하나는 홀린 듯 그를 올려다보았다. 지나칠 만큼 날카롭게 번뜩이는 흑안이 오묘한 빛을 띤 채 빛나고 있었다.
대답을 기다리는 건지 그의 눈이 다시 로하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겨우 고개를 끄덕이자 목 뒤를 받치고 있던 그의 왼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머지 한 손이 허벅지 뒤로 다가오자 몸이 저절로 긴장했다.
손길이 조심스러운 것에 비해 들어 올릴 때는 아무렇지도 않게 가뿐했다.
직접 일어난 것도 아닌데 약간의 현기증이 일었다.
“공녀님!”
비비안이 놀란 목소리를 냈으나 선뜻 바로 옆까지 다가오지는 못했다. 그때, 낯선 목소리가 주의를 끌었다.
“공녀님.”
처음 보는 하늘빛 머리카락의 남자. 선이 가는 얼굴에 빙그레 짓는 평온한 미소가 인상적이었다.
그도 역시 비에 완전히 젖은 모습으로 짙은 망토와 갑주를 두르고 있었다. 동부의 노프탈에서 온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원작의…….
“공녀님, 황태자 전하는 혹시 여기 안 계시나요?”
원작의 누구지? 모르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네?”
빙그레 질문을 던지는 남자를 케이든이 가늘어진 눈으로 쳐다봤다.
“아아……. 제 소개부터 해야죠. 히스라고 합니다. 여기 이 사람의 호위 기사죠.”
“호위라니…….”
케이든이 못마땅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로하나!”
그때 아주 익숙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케이든이 마지못해 뒤돌자, 로하나의 눈에 황태자의 모습이 들어왔다.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푸른 눈이 크게 떠졌다가 이내 가늘어졌다. 붉은 옷을 입은 왕의 근위대가 그 주변을 둘러쌌다. 혼혈 왕자를 둘러싼 귀족들의 눈빛에 참을 수 없는 호의와 숨길 수 없는 호기심이 가득했다.
“로하나.”
내려서 걸어오라는 듯 황태자가 손을 내밀었다. 다시금 몸을 세우려는 로하나의 노력이 무색할 만큼 케이든의 팔은 움직일 기색이 없었다.
“다치셨을 수 있습니다. 들것이 오면 내려놓죠.”
정중함을 갖춘 목소리에는 미묘하게 날이 서 있었다. 어쩌면 상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고 느껴질 만큼 미세한 날카로움.
“공녀님!”
때마침 황궁의가 파리한 얼굴을 한 채 헐떡거리며 뛰어왔다.
“아니, 뭐 하나. 공녀님 안 모시고!”
황궁의의 명령에 들것을 가져온 의료진이 유리와 금속 파편을 치워 가며 로하나와 케이든 앞에 자리했다.
“파편에 다리를 다치셨다. 머리도 확인해야 되고.”
케이든이 나지막이 말했다. 의료진이 어쩔 줄 모르며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그의 시선이 다시 로하나를 향했다.
“어지럽거나 구토하고 싶으시면 반드시 말씀하셔야 합니다. 머리를 좀 부딪치셨어요.”
유리 공예 다루듯 조심스럽게 로하나를 내리며 말이 이어졌다. 아까보다 훨씬 정중하고 깊은 어투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기묘한 사과까지. 그때, 어느새 다가온 바르디가 케이든을 밀치듯 다가와 덥석 로하나의 손을 잡았다.
“로하나.”
“공녀님! 어떻게 하면 좋아요……. 괜찮으세요?”
바로 뒤에 딱 붙어 있던 오렐리아가 이미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로 말했다.
“괜찮아요.”
로하나는 그들의 등장에 오히려 급격한 피로감을 느꼈다. 드디어 원작의 삼인방이 다 모인 셈이었다.
그때였다. 공작가의 시녀가 다급히 와서 그녀의 몸을 가운으로 덮었다. 로하나는 그제야 제 몸에 상처가 났음을 알아차렸다.
아무리 케이든이 온몸과 방패로 막았다고 해도, 위에서 떨어져 산산조각이 난 금속과 유리를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어깨 밑으로 늘어뜨린 드레스 장식도 찢긴 채였고.
달려들어 울먹이는 시녀들에게 잠깐 웃어 보인 뒤 시선을 돌리는 순간, 로하나는 케이든과 눈이 마주쳤다.
그의 시선은 집요할 만큼 그녀를 좇았다. 한참이나 인파를 지나왔음에도 그의 시선이 끊기지 않음을 알 수 있을 만큼.
*
“노프탈을 비울 수 없다고 하더니?”
황태자는 먼 길을 온 제 사촌을 똑바로 바라봤다. 둘의 시선이 복잡하게 얽혔다. 결국 약간의 침묵을 깨고 바르디가 웃으며 말했다.
“어쨌든 고맙게 되었어. 덕분에 로하나가 크게 다칠 뻔한 걸 면했으니.”
“파티에 참석했던 사람들도 모두 확인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음악가, 마부, 시종, 시녀는 물론 드나든 사람은 전부.”
케이든의 정중하고도 사무적인 목소리에 바르디는 한껏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응, 당연하지. 다 목이 날아갈 거야.”
뒤이어 하는 말은 그 미소에 어울리지 않았지만. 새파란 눈이 반짝이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네.”
묵례로 대답한 케이든은 눈을 돌려 샹들리에가 붙어 있던 자리로 향했다.
귀족들은 떨어진 샹들리에보다도 10여 년 만에 수도에, 심지어 황궁에 모습을 드러낸 케이든에게 더 큰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애써 낮춘 목소리였지만 일부는 그의 귓가에 들렸다.
“웬일이야. 케이든 필립 델클리프 공작이야.”
“너무 잘생겼다. 어떻게 저렇게 완벽하지?”
“잘생기긴, 카르크 티가 나네. 제 아비를 똑 닮았구먼. 재수 없게.”
“카르크 티가 나니까 잘생긴 거지!”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소리가 케이든과 히스의 귀에 들어왔다.
“오, 잘생겼대. 좋겠는데, 케이든.”
능글거리는 히스의 말을 무시한 채 케이든은 주변을 살폈다. 사람들의 호감 어린 시선과 환호 아닌 환호에 아주 엷은 미소를 지어 주던 그때였다, 귓가에 그 이름이 들린 것은.
“악스본을 없애 준 덕에 우리가 이렇게 사는 거야. 감사해야지.”
그 엷은 미소마저 차갑게 굳은 케이든은 빠르게 몸을 돌렸다.
무거운 부츠 밑으로 유리가 절그럭 소리를 내며 깨졌다. 케이든은 잠시 멈칫했다. 그러나 수완 좋은 케이든의 미묘한 변화를 눈치챈 사람은 없었다.
전대미문의 특이한 사고와 모두의 선망인 동부의 수호자의 등장에 황궁은 그 후로도 한참 동안 흥분으로 소란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