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따뜻한 가을 햇살처럼 들떠 있던 장밋빛 뺨이 차갑게 식었다. 그러나 변한 것은 볼의 생기뿐.
황태자 바르디 렌트워스는 오렐리아를 보고도 당황하지 않는 그녀를 보며 마치 천군만마를 보듯 자랑스러워했다.
그 눈을 보고서야 싸늘한 현실이 얼음 조각이 되어 로하나의 등허리에 흘렀다. 그 눈은 예전의 저를 보던 눈과 이미 달랐다.
그래도 로하나는 흔들림 없이 말을 이었다. 모두가 그 아버지에 그 딸이라며 혀를 내두를 정도로.
우아하고, 침착하게.
로하나는 그들과 인사를 한 뒤, 애써 늦추었지만 자꾸 빨라지는 발걸음으로 공작저로 향했다.
대제국의 황궁은 역사에 없는 규모로 웅장했으며, 특히나 넓었다. 그리고 최측근의 귀족들은 그 안에 별실을 만들어 함께 기거했다.
걸어서 공작저까지 갈 수 있다는 점은 때론 용이했으나, 이럴 땐 대단히 불편했다.
가장 아름다운 식을 만들라는 황태자의 엄명에 따라 대리석 바닥은 유리알처럼 맑았고, 각종 꽃장식으로 꾸민 실내는 벌써 결혼식 날이라도 된 것처럼 화려했다.
로하나는 그럼에도 마주치는 귀족들에게 우아한 눈인사와 미소를 잊지 않았다.
막상 마음이 흔들린 것은 공작저에 다 도착해서였다.
로하나는 그대로 발걸음을 돌렸다.
제국의 개국 공신이자 최고로 명망 높은 공작가인 하노버 공작가의 서재는 수도 내의 도서관보다 넓었다. 그 넓고 무거운 문을 열고 로하나가 들어섰다.
“무슨 일이냐.”
오직 공작가의 혈통만이 출입이 가능한 서재 내부의 업무실. 웬만한 침대보다 큰 대리석 데스크 앞에 공작 드레고리 하노버가 비스듬히 앉아 있었다.
“어떤 애더냐.”
“알고 계셨던 모양입니다.”
차분한 목소리에 드레고리 하노버는 혀를 쯧 찼다.
“그런 여자가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
그녀와 똑같은 보랏빛 눈동자가 서늘하게 번뜩였다.
“노프탈의 델클리프 공작가에 눈에 띄는 여자가 있다는 소문이 있어 조사했었다. 가히 미인이라기에 공작이 다 몰락한 귀족 여자애를 노리개로 쓰나 보다 했는데, 일이 이렇게 되다니 유감이야.”
로하나는 이를 악물었다. 노프탈의 공작. 그 흑막과 오렐리아가 이미 알다 못해 함께 지내고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공작은 그런 그녀의 표정이 못마땅한 듯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잃을 것을 자꾸 잊는 모양인 것 같구나. 그런 눈을 다 하고.”
말을 마친 공작의 시선이 빠르게 벽에 걸린 초상화를 향했다.
브란드 하노버.
동생의 초상화로 향하는 시선에 소름이 돋았지만 로하나는 감정을 숨기는 데 익숙했다.
“브란드도 더 이상 쉽게…….”
“그래, 그 반푼이가 퍽이나 나와 상대가 되겠다, 그렇지 않으냐.”
로하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번 주말에 나와 사냥을 하러 가기로 했다.”
좁아진 미간을 보며 드레고리는 피식 웃었다.
“제 아버지에게 평생 처음 인정받아 보겠다고 애쓰던데, 네가 내 기분을 자꾸 상하게 하는구나.”
로하나는 눈을 내리깔며 이를 아득 물었다. 침묵 끝에 겨우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직 끝난 건 아니니 다른 사람들은 내버려 두세요.”
드레고리는 눈을 치켜뜨며 입꼬리를 비틀어 웃었다.
“결혼만 해.”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황후가 되면 너도 나한테 이런 꼴은 그만 당해도 되지 않겠느냐.”
새하얀 얼굴이 태연하게 딸을 향했다.
“이기지 못할 자를 미워하지 말거라. 애먼 감정 낭비다.”
말없이 돌아선 로하나가 내딛는 구두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
“황실 결혼이 예정되어 있는데 데뷔탕트라뇨.”
시녀장이 나직한 목소리로 타박하듯 중얼거렸다.
오렐리아가 황궁에 나타난 지 며칠 되지 않아 급작스럽게 변경된 비비안의 데뷔탕트가 오늘 열릴 예정이었다.
예를 갖추겠다고 결혼 후로 미뤄졌었던 비비안 힉슬리의 데뷔탕트는 그녀의 생일에 꼭 맞추어 열리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별걸 신경 쓴다.”
로하나는 태연히 입을 뗐다.
물론 힉슬리 백작은 어떻게든 데뷔탕트를 당겨서 열고 싶었을 것이다.
황태자의 여인으로 추정되는 오렐리아 브리가 처음 등장하는 파티를 열 기회를 잡게 되었으니 얼마나 좋았겠는가.
데뷔탕트가 얼마나 성황리에 열릴지 미루어 짐작했을 때 그 화제성을 놓치기 아까웠을 것이다.
실제로 황궁의 별관 중 하나인 힉슬리 별관 앞은 새벽부터 마차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 콧대 높던 하노버 공작가의 위기에 모두가 입맛을 다시는 소리이기도 했다. 남의 불행은 늘 최고의 애피타이저였으니까.
“뭐 대단한 일이라고 이렇게 소란스러운지요.”
시녀 아이인 마리가 조디 대신 퉁명스럽게 말했다.
드레고리의 패악에 심하게 다친 것인지 조디는 좀 쉬어야겠다며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다. 생채기가 나 있던 그녀의 손이 다시금 떠오르자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로하나는 상상이 내달리는 머릿속을 진정시키기 위해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준비해야겠구나.”
차갑게 내리뜬 눈을 들어 올리자 거울 안에 지나칠 정도로 붉은 입술에 대비되는 하얀 얼굴이 비쳤다.
‘도대체 어떻게 오렐리아가 동부에 있었던 거지?’
오렐리아는 남부 브리 자작의 외동딸이다. 어떻게 그녀가 동부에 가 있던 걸까. 그것도 그 케이든 델클리프 옆에.
‘게다가 그 흑막이 오렐리아가 순순히 떠나게 내버려 뒀다니?’
그거야말로 말도 안 됐다. 그때, 또 다른 시녀가 어마어마한 꽃장식과 함께 작은 박스를 들고 들어왔다.
“황태자 전하께서 보내신 초콜릿이에요.”
로하나가 좋아하는 작은 상점의 것이었다. 로하나는 물끄러미 그것들을 바라보며 어제의 대화를 떠올렸다. 황태자는 찾아와 예의 빛나는 미소로 입을 열었다.
<로하나, 우리 사이는 그대로야.>
‘어디가 그대로라는 거지?’
운명의 여인을 만난 황태자가 왜 헤어지자고 하지 않는지 로하나는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오렐리아는 친구일 뿐이야. 그러니 사교계 데뷔도 내가 아닌 실비우스가 함께할 거고. 불필요한 오해는 막아야 되지 않겠어?>
원작의 남주이자 15년간 보아 왔던 그는 굳이 애매하게 굴 사람은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오렐리아와 ‘친구’인 것이 최소한 지금으로선 정말 진심인 듯도 했다.
어느새 각각 서너 벌의 드레스를 든 시녀들이 옆으로 줄을 맞추어 섰다.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드레스 일색이었다. 로하나는 어깨가 드러난 와인색 드레스를 골랐다.
“머리는 어떻게 해 드릴까요?”
마리가 능숙하게 빗질을 마무리하며 물었다.
어쨌든 죽지 않기 위해서는 새로운 계획이 필요할 것 같았다. 부드러운 빗질에 흑단 같은 머리칼이 우아한 웨이브를 그리며 허리까지 흘러내렸다.
“화려하게.”
목줄에 매여 있다고 매여 있는 사람처럼 보일 필요는 없는 법이었다.
*
비가 쏟아지고 있었는데도 연회장 안은 사람들로 가득 찼다.
로하나와 오렐리아가 마주하는 장면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 인사는 이 수도 안에 단연코 한 명도 없을 테니 놀랄 일은 아니었다.
비싸고 향긋한 샴페인 잔이 빠르게 비워졌다. 그때, 웅성거리는 소리가 나며 사람들의 시선이 한쪽으로 일제히 쏠렸다.
로하나가 고개를 돌리자 오렐리아가 연회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옆에는 바르디가 말한 대로 황태자의 절친한 친구인 부디에르 백작의 후계자, 실비우스가 서 있었다.
오렐리아는 어느새 궁 안 유행에 맞춘 화려한 아이보리 레이스 드레스를 입은 채 금발을 길게 풀어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순간, 두 여인의 눈이 마주쳤다. 황금빛 눈이 고양이 눈처럼 빛났다. 오렐리아가 마치 오랜만에 만난 친구를 본 듯 환한 미소를 띤 채 다가와 인사를 올렸다.
“안녕하세요, 로하나 공녀님. 이렇게 다시 만나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별말씀을요.”
사람들의 시선이 쏟아졌으나, 로하나는 침착하게 미소를 지었다.
굳이 긴 대화를 나누는 것은 피하고 싶어 몸을 돌린 지 얼마나 되었을까.
“로하나 공녀님.”
오렐리아는 그럴 생각이 없었는지 금세 배시시 웃으며 다가왔다. 새하얀 얼굴이 와인에 살짝 상기된 채.
“황태자 전하께 말씀 많이 들었어요. 듣던 대로 정말 멋있으세요. 키도 크시고.”
오렐리아가 노래하듯 이야기했다. 그녀의 금발 머리가 찰랑거렸다.
“네, 고맙습니다.”
“전하의 하나뿐인 소꿉친구라고, 누나 같은 정혼자시라고 들었어요.”
로하나는 행간을 읽으며 가만히 오렐리아의 황금빛 눈을 쳐다보았다.
“전하께서 에스코트하실 줄 알았는데.”
로하나가 천천히 입을 뗐다. 신경 쓰고 있던 정곡을 찔렸는지 오렐리아의 얼굴에 살짝 금이 갔다.
“불필요한 오해가 생길까 걱정되셨나 보네요.”
그렇게 말해야 할 것 같았다. 개인적인 악감정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말간 얼굴을 보니 본능적으로 화가 났다.
바르디 렌트워스는 좋은 사람이었다. 좋은 15년이었다.
막상 그녀의 얼굴을 마주하니, 원작을 미리 알고 있었으니 마음도 괜찮지 않을까, 잠깐이라도 상상했던 것이 낯이 홧홧할 만큼 민망했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이 안타까웠다.
그리고 이어서 찌릿 얼음이 문질러지는 듯한 통증이 가슴을 후벼 팠다. 로하나는 감정을 떨치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른 데로 가자.
몸을 돌리려는 찰나였다. 순간 뭔가가 그녀를 멈추게 했다. 별안간 오렐리아가 로하나의 손을 덥석 잡은 것이다. 소름 끼치게 차갑고 작은 손이었다.
“공녀님! 저희 저 위로 올라가 봐도 돼요?”
그녀의 눈이 향하는 곳은 나선형 계단 위였다. 연회장의 양옆으로는 계단이 있어 2층으로 올라갈 수 있었는데, 그 층 중앙에는 화려한 샹들리에 밑에 건물 오르간이 설치되어 있었다.
“저 저렇게 화려하고 큰 오르간은 처음 봐요. 저도 언젠가 이런 연주를 들을 수 있을까요?”
로하나는 무심코 반쯤 이끌려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작은 몸에 힘이 엄청났다. 무리에서 벗어나 둘이 남자 주위가 제법 조용했다.
“황궁에 계시다면 못 들으실 것도 없으시죠.”
할 말이 없어 기계적으로 예의 바른 말을 내뱉었다.
“정말요? 너무 기뻐요! 듣던 대로 공녀님은 좋은 분이세요. 올라가 봐도 되나요, 오르간 자리에?”
날 선 태도에 죄책감을 갖게 할 정도로 해맑은 얼굴이었다.
로하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오렐리아는 복도에서 오르간으로 향하는 계단을 총총거리고 올라갔다.
그녀의 작은 손이 조심스럽게 악기를 쓰다듬었다. 정교하게 금으로 장식된 오르간은 밝은 샹들리에 빛에 보석처럼 빛났다.
그때였다.
끼이이이이이이익.
머리 위에서 소름 끼치는 금속 소리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