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죽일 흑막과의 계약결혼-2화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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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하나는 고귀한 신분 덕에 황태자와 우정으로 약혼한 사이였으나, 오렐리아가 등장한 후로 남주의 행복만을 빌어 주던 로하나는 대의를 위해 그의 사촌과 정략결혼 한다.

거기까진 그렇게 가련할 일은 아니었지만.

로하나가 결혼한 남주의 사촌, 케이든 델클리프가 알고 보니 흑막이었던 것이 문제가 된다.

특히나 로하나는 그런 그에게 살해까지 당하기에 더더욱 그 문제가 심각하다.

그녀의 죽음은 소설의 클라이맥스인 두 세력 간의 전쟁을 일으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진정한 흑막인 ‘사촌’의 본모습이 드러나는 순간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사건이었다.

“공녀님.”

거울 속에 비쳐 보이는 조디의 얼굴에 걱정이 한가득이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로하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때 로하나의 시선이 자석처럼 긴 머리를 빗어 내리던 조디의 작은 손에 고정되었다.

새로 생긴 여러 생채기. 긴 소매로 가렸지만 팔은 어떨지 안 보아도 훤했다.

‘미친 인간 같으니.’

그리고 로하나가 생각보다 더 가련한 처지였던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사람의 팔자가 기구해지는 흔하디흔한 이유, 가족.

부친인 드레고리 하노버는 원작에서 잘 나오지도 않아 그 성정을 미리 알지 못했지만, 실로 어마어마한 사람이었다.

가장 값진 재산인 딸을 조종하는 방식으로, 주변인을 활용하는 치밀함을 갖춘 전략가. 시녀, 유모, 사용인들, 심지어 남동생인 브란드까지도 예외는 없었다.

철저히 순종적이고 착했으며 최선을 다했지만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로하나는 죽게 되고, 여주인 오렐리아는 친자매를 잃은 것처럼 가슴 아파했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로하나의 미소에 조디는 다시 명랑함을 되찾고 재잘거렸다. 이런저런 머리핀을 대 보며 신이 난 목소리가 공기를 밝게 채웠다.

“황태자 전하께서 공녀님이 얼마나 보고 싶으셨을까요?”

부친의 패악을 막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반항은 나름대로 다 해 보았다.

그러나 그 어떤 행동도 사실 어린아이의 우스운 객기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는 걸, 이미 어른으로 살아 보았던 로하나는 쉽게 알 수 있었다.

결국 필요한 건 힘이다.

그래서 로하나는 자신이 가진 자원을 활용했다.

빙의한 지 고작 한 달 후, 원작이 시작되는 여덟 살의 나이에 처음 만났던 남주 바르디 렌트워스는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듯 홀로 고고히 빛났다.

짙은 적갈색 머리카락 아래 빛나던 푸른 눈을 곱게 접어 웃던 그는 이 세상에 걱정 하나 없는 듯 밝고 씩씩했다.

프롤로그 정도로 짧게 소개된 남주 바르디 렌트워스와 여주 오렐리아 브리와의 만남은 그해 겨울, 남부의 휴양지에서 이뤄질 예정이었다. 소설의 시작이었다.

로하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만약 황태자가 아예 그녀를 만나지 못한다면?

첫 시작을 바꾸어 버린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충동적인 마음이었다. 그래서 오늘같이 아름다웠던 가을날, 소녀였던 로하나는 떠나는 황태자를 붙잡았다.

수줍음이 많아 사람 많은 곳에서는 목소리를 내는 것조차 버거워하던 그녀의 목소리에 모두가 놀랐다.

<가지 마세요.>

이런 것으로 남주와 여주를 못 만나게 하는 것이 가능할까. 짧은 침묵이 한없이 길게만 느껴지는 순간, 낭랑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왜?>

<네?>

<왜 가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푸른 눈이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적갈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스쳐 부드럽게 나부꼈다. 로하나는 마른 입술을 깨물었다.

<그게…….>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가시면 큰일이 날 것 같아서……. 거긴 너무 멀고…….>

거짓말은 아니었다. 가게 되면 오렐리아를 만나고, 그녀를 수도로 데려오게 된다.

그리고 그 둘의 약혼식장에서 케이든은 오렐리아를 사랑하게 되고, 결국 그 흑막의 배신과 더불어 엄청난 전쟁이 일어나는 것 아닌가.

황실과 제국을 대표하는 아린족과 노프탈과 동부의 세력을 대표하는 카르크족의 전쟁이.

<내가 걱정돼?>

거짓말은 아니다.

<네.>

그녀를 빤히 바라보던 황태자의 얼굴이 미묘하게 움찔거리다 이내 어두운 방에 불을 밝히듯 환해졌다.

<그래.>

그의 장밋빛 볼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로하나가 가지 말래. 내가 걱정된다잖아.>

해사한 웃음이 햇살처럼 반짝였다.

<그러니까 안 갈래.>

그리고 그날 이후로 그는 무서운 속도로 로하나에게 빠져들었다. 이상할 정도로.

하루라도 보지 않으면 얼굴의 그늘이 무릎까지 내려왔고, 어쩌다가 함께 무도회라도 참석하는 날에는 어린 나이에도 남자답게 보이겠노라고 최선을 다해 멋을 부렸다.

황후가 된다면 권력을 얻을 수 있다. 드레고리를 막을 수 있다. 죽은 유모를 되살릴 순 없어도 최소한 제 옆의 사람이 다신 그런 일을 당하지 않게 할 수 있다.

어이없게 흑막과 정략 결혼했다가 살해당하지 않을 수 있다.

처음에는 그런 안심이었다. 그리고 원작에서의 ‘로하나’가 그를 사랑했듯, 거짓말처럼 로하나도 결국 그에게 젖어 들어갔다.

그리고 그렇게 별 어려움 없이 영내 최고 명망가 하노버의 공녀는 자연스럽게 황태자와 약혼했다.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그리고 개인적으로 완벽한 조합이었다. 오렐리아가 없는 완벽한 평행 세계.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행복한 나날이 계속되었고, 이제 결혼식은 한 달 앞으로 성큼 다가와 있었다.

‘원작과 이미 많이 달라.’

이상하게 불안하게 두근거리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로하나는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응시했다.

“그런데 황태자 전하께서는 왜 굳이 그런 위험한 곳에 가셨던 거예요? 그 무시무시한 카르크 것들이 득시글득시글하다는 동부라뇨! 우리 공녀님 옆에 찰싹 붙어 있어도 모자랄 이 아름다운 날에!”

“동부도 아르드골드 제국이야.”

로하나가 부드럽게 설명했다. 그런 뻔한 이야기를 듣고 싶지는 않다며 조디가 입술을 내밀고 뾰로통하다가 이내 다시 노래하듯 재잘거렸다.

“그나마 동부 노프탈에 케이든 델클리프 공작님께서 계시기에 다행이지 뭐예요.”

로하나는 오랜만에 듣는 ‘흑막’의 이름에 동요하지 않으려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

모두가 믿어 의심치 않는 케이든 델클리프. 제국의 통치가 닿지 않던 카르크족을 제압한 노프탈의 영주이자 피의 통치자는 아르드골드 제국의 수호자로 명성이 자자했다.

“황실 결혼식에는 오실까요? 항상 그 춥고 험준한 동부에만 계시니…… 사촌 동생이신 황태자님을 지키시겠다는 열의가 대단하신 것 같아요.”

“잘생겼다는 소문이 너무 자자해서 그러는 것 아니고요?”

이내 옆에서 불쑥 끼어든 다른 시녀 아이의 말에 조디가 얼굴을 붉히며 웃었다.

“어쨌든 덕분에 우리가 카르크족 걱정 없이 지낼 수 있잖아요.”

“그래도 카르크족 얘기는 조심해. 아무리 그래도 델클리프 공작님은 어쨌든…….”

“알아, 알아. 카르크족 혼혈이신 거.”

완벽한 남자의 유일한 흠이라는 것을 강조하듯 조디가 너스레를 떨며 대답했다.

“쉿!”

마침 문에 들어선 시녀장이 두 어린 시녀에게 핀잔을 주며 로하나의 눈치를 살폈지만, 로하나는 태연하게 저만의 생각에 잠겨 있다가 눈짓으로 괜찮음을 표현할 뿐이었다.

“황태자 전하께서 오늘 정오에는 도착하신다고 하시네요.”

시녀장이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이틀 정도 늦어진 일정에 모두가 조금 걱정하는 눈치였지만, 로하나는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의 남은 걱정거리는 하나.

케이든 델클리프.

그가 어떤 속내를 감추고 있는지 알고 있기에, 그가 황실에 관심을 보이는 것 자체가 우려스러웠다.

그러나 한편으론 벌써 결혼식 전야제 수준으로 화려하게 꾸며진 황궁과 공작저를 보면, 이제 와 그 흑막과 자신이 결혼하게 될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오늘은 가을 분위기가 나니 이 드레스가 어때요?”

그녀의 보라색 눈과 어울리는 짙은 크림색의 가을 드레스였다. 풍성하게 퍼진 드레스 밑단에 어깨가 드러나는 상의가 레이스로 화려하게 반짝였다.

“그래, 그게 좋겠네.”

로하나가 웃으며 대답했다.

*

“로하나 님.”

부친의 최측근인 힉슬리 백작의 딸, 비비안이 인사를 해 왔다.

붉은 머리카락에 어울리는 녹색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당장이라도 결혼에 대해 더 묻고 싶은 듯 입술을 달싹였다.

“비비안 님.”

대연회장은 이내 여러 고위 귀족들로 가득 들어찼다. 휘황찬란한 샹들리에의 보석들이 햇살을 받아 고고히 빛났다.

그때 나팔수의 알림이 울렸다. 로하나는 들뜬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마중 나갈 대연회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폐하께서는 오늘 몸이 안 좋으셔서 못 나오신다고 합니다.”

조디가 속삭였다. 제국의 초대 황제이자 바르디의 조부인 콘스탄스 렌트워스는 벌써 몇 달째 병세가 악화되어 겨우 침상을 지키고 있었다. 결혼식이 다소 빠르게 진행된 것도 그래서였다.

“황태자 전하 오십니다.”

하인들이 나팔을 울리고 후작, 백작은 물론 모든 궁내 귀인들이 고개를 숙였다.

로하나 역시 연회장으로 드는 바르디의 발치가 움직이는 것을 보며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무엇인가 이상했다. 너무 오래 보아 익숙한 그의 발치 옆으로 연푸른 드레스 자락이 보였다.

‘드레스?’

인사를 마치며 고개를 들자 거짓말처럼 로하나의 시야에 한 여자가 들어왔다. 너무 작아서 그의 뒤에 가려져 처음에는 보이지 않았다.

금발에 금빛 눈을 한 자그마한 여자가 바르디 옆에 살짝 긴장한 얼굴로 서 있었다.

허리 아래까지 흐드러지게 늘어뜨린 빛나는 금발, 장밋빛 붉은 뺨, 수줍고 어색한 듯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황금빛 눈은 지친 기색 없이 당당하게 반짝였다.

세상의 끝이라 여겨지는 동부, 음험하고 사악한 카르크족이 모여 산다는 곳에서 왔다기에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산뜻하고 발랄한 모습이었다.

“로하나.”

바르디의 목소리가 약간 꿈결같이 들렸다. 로하나는 천천히 바르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인사해.”

골든 우먼, 오렐리아.

“오렐리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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