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죽일 흑막과의 계약결혼-1화 (1/125)

프롤로그

탕탕탕탕.

유리 거울같이 티 하나 없는 대리석 바닥을 깨뜨리기라도 할 듯 구두가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창백한 얼굴에 피처럼 붉은 입술. 여자는 빠르게 뛰고 있었다. 새카만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렸고 푸른색 오프 숄더 드레스에 정교하게 수 놓인 비즈는 빠른 움직임에 쉴 새 없이 반짝거렸다.

“로하나 공녀님.”

황궁 내에 위치한 하노버 공작저에 이르자 경비병이 당황하는 얼굴로 경례를 올렸다. 로하나는 평상시 그녀답지 않게 그 어떤 인사에도 반응을 보이지 않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지나치게 눈에 띄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도망을 숨기는 것보다 빠르게 도망치는 것이 더 중요했으니까. 숨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상관없었다.

그렇게 급한 걸음을 내디뎌 도착한 제 침실은 황위 계승식으로 떠들썩한 황궁의 분위기가 무색할 정도로 조용했다.

항상 그 자리를 지키던 가장 친한 시녀도 해고한 후였으니 더욱 그랬다.

로하나는 서둘러 침대 쪽으로 향한 뒤 몸을 숙여 손을 뻗었다.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서 묵직한 가방이 손에 들어왔다. 그런데 뭔가가 이상했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가방을 여는 순간, 로하나의 선명한 보랏빛 눈동자가 까맣게 죽었다.

그간 모아 온 현금과 금이 사라져 있었다. 채권 서류와 각종 건물 매입 증서는 서명된 부분이 모두 잘려 나가 있었다.

‘드레고리 하노버.’

제 부친이라고 부르고 싶지도 않은 자가 해 놓은 그 교활한 짓에 로하나는 온몸이 떨렸다.

15년 전, 빙의한 순간부터 최후의 보루로 세워 놓았던 도망 계획이지만, 실행하기 전에 시녀를 해고해야만 했던 것은 남겨진 자들에게 무슨 짓이든 할 악랄한 드레고리를 의식해서였다.

15년간 그렇게 주변의 사람들을 인질 삼아 딸을 주무르던 부친이었다. 그런 그가 제 자산이 도망할 것을 이미 알면서도, 가방은 교묘하게 제자리에 두었다.

어떻게 안 것일까. 왜 알면서도 저지하지 않은 것인가.

심장 소리가 귓가에 들리듯 쿵쾅거렸다.

어떻게 해야 할까.

그때였다.

펑!

밖에서 불꽃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의 즐거운 환호성이 화사하게 이어졌다. 이방인까지 자유롭게 모여 전 제국이 새롭게 즉위한 젊은 황제를 축복하고 있었다.

한때는 로하나의 약혼자였던 황태자 바르디 렌트워스의 즉위. 그 옆에는 응당 그의 운명인 여주인공 오렐리아가 환하게 웃고 있을 것이었다.

이때가 아니면, 이때처럼 모두가 취할 때에 맞춰 세워 놓은 계획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드레고리 눈에 띄지 않고 도망칠 수 있을까.

이미 들통이 났다고 해도 다른 방법이 없다. 포기하고 가만히 있다가는 아까 옆에 앉아 있던 그 ‘흑막’의 말대로 그와 꼼짝없이 결혼하게 될지도 몰랐다.

원작을 떠올린 로하나는 일단 가방을 든 채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럴 리 없지만, 혹시 남은 서류로 발버둥이라도 쳐 볼 수 있을지 모르니.

떨리는 무릎에 강하게 힘을 준 로하나는 크게 숨을 쉬며 발걸음을 서둘렀다.

드레스 룸에서 망토만을 겨우 낚아채 몸에 두른 로하나는 뒷문을 열고 더 빠르게 뛰었다. 밤이슬을 맞은 잔디가 실크 구두를 적시고, 차가운 공기가 폐를 깊숙이 찔렀다.

미로 같은 정원수 사이사이, 우연한 설계의 빈틈인지 한구석에 황궁을 감싸고 있는 숲으로 나갈 수 있는 숨겨진 틈이 있었다.

아무도 모르는 그 통로.

그곳을 통해서만 황궁에서 눈에 띄지 않게 나갈 수 있다. 일전에 여주인 오렐리아를 구하기 위해 이용하기도 했던 그 통로로 나가야만 했다. 빨리.

나뭇가지와 이파리를 떨구면서 드디어 숲으로 나가는 길에 다다른 순간이었다.

“로하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얼어붙은 듯 발이 멈추어 섰다. 낮디낮은 저음의 목소리.

“내가 설명하겠습니다.”

가방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로하나는 뛰기 시작했다. 물론 필사의 달리기는 얼마 못 가 팔목과 어깨를 잡혀 그대로 돌려세워졌지만.

커다란 손은 너무나 쉽게 그녀를 붙잡았다. 로하나는 불에 데기라도 한 듯 온몸으로 남자의 팔을 쳐 냈다.

은발에, 오묘한 흑안.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큰 키에 지나치게 수려한 용모의 황족.

지금은 모두가 새 황제의 편이라 믿어 의심치 않지만, 결국 여주 오렐리아를 사랑해 그들을 배신하는 흑막. 그리고 로하나를 죽일 케이든 델클리프였다.

“무례했다면 용서하십시오. 이러실 것까지는 없습니다.”

“이럴 것까지 없다고요?”

로하나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똑바로 쳐다보는 보라색 눈동자가 번뜩였다.

“여긴 어떻게 알았어요?”

케이든은 대답이 없었다. 다만 조금 미간을 모은 채 그녀와의 간격을 좁힐 뿐이었다.

“나를 써서 드레고리든 황태자…… 아니, 황제에게든 뭔가를 얻으려는 모양이지만, 그거 그렇게 안 될 거예요.”

케이든은 로하나를 인질로 삼아 드레고리 하노버의 재산을 취하려 하지만 드레고리는 당연히 딸의 목숨보다 돈과 명예를 우선한다.

원작에선 사랑하는 딸을 애국심에 포기하는 절절한 아버지인 것처럼 묘사했지만, 직접 그와 살아 본 로하나는 단언할 수 있었다. 그는 애초에 고민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로하나를 인질로 잡는 행동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말해 봤자 미친 소리가 될 것 같은 온전한 진실에 로하나는 간신히 말을 골랐다.

“절 믿으세요. 드레고리 하노버의 약점을 잡고 싶다면, 내 동생도 남아 있어요.”

아들이라면 경우가 또 어떨지 모른다. 진심이었다. 그런 로하나의 항변에 케이든의 눈썹 밑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러니까 전 그냥 보내 주세요.”

로하나의 목소리가 크게 떨렸다.

“그냥 제발 좀.”

탄식에 가까운 혼잣말을 하고 나니 제 임기응변이 어이가 없어 비릿한 웃음이 났다.

퍽이나 보내 주겠다. 이상할 정도로 케이든 델클리프 앞에서 자꾸 평정을 잃더라니.

정직하게 읍소한다고 보내 줄 그가 아닌데 어쩌자고 이렇게 대응했는지 낯부끄러울 지경이었다.

주마등처럼 지난 15년의 세월이 뇌리를 스쳤다. 어떻게든 원작 이야기를 벗어나려 애썼던 지난 기억들이. 모든 것이 실패했다는 사실이.

기어이 눈물이 떨어져 흙바닥을 적셨다. 몽글몽글 흙이 둥글게 뭉쳤다.

차가워진 밤바람이 귓가의 머리카락을 흩뜨렸다. 로하나가 다 포기한 채 고개를 드는 찰나였다. 깊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로하나 공녀님.”

기묘한 흑안이 번뜩였다.

그때였다.

<아파, 많이?>

순간, 과거의 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아직 소녀였던 그때, 죽고 나서 기이한 꿈을 꾸고 있다고만 믿을 때.

의아한 기억에 로하나가 인상을 쓴 채 고개를 떨군 사이, 케이든의 구두가 가까워지는 것이 보였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더 다가와 이제 닿을 듯 가까워진 그에게서는 처음 만난 날처럼 눈보라 향이 났다.

로하나가 천천히 고개를 들자 달빛에 비친 그의 콧대에 그림자가 비쳤다. 짙고 긴 눈매가 그녀를 뚫어지게 내려다보았다.

눈을 마주친 지 얼마나 지났을까, 커다란 손이 아주 조심스럽게 로하나의 팔을 감쌌다.

흠칫하는 그녀를 부드럽게 감싼 그의 팔이 조심히 그녀의 망토를 쥐어 새하얗게 드러난 어깨와 가슴을 덮었다.

“보내 드리겠습니다.”

검은 눈동자가 묘하게 여러 빛깔로 빛났다. 망토에서 망설이며 떨어진 손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턱을 향했다.

떨구었다고 생각했던 눈물이 미처 떨어지지 못하고 목덜미에 맺혀 있었다. 눈물을 가볍게 쓸어 없앤 그의 긴 손가락이 놀랄 만큼 뜨거웠다.

그리고 이내 이어진 목소리는 더 의외의 말을 했다.

“다만…… 제가 보내 드리게 해 주십시오.”

나를 죽일 흑막과의 계약 결혼

헉, 하는 소리와 함께 보랏빛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파르르, 유난히 긴 속눈썹이 속절없이 떨렸다.

또 그 목소리였다.

<당신이 필요했어.>

기묘한 소년의 목소리.

<그래서 데려와야 했어.>

빠르게 방망이질 치던 심장이 겨우 제 속도를 찾아갔다.

“공녀님, 좋은 아침이에요.”

실크 커튼이 대리석 바닥을 스치는 소리와 함께 높다란 창문으로 아침 햇살이 한가득 밀고 들어왔다.

로하나는 서둘러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꼭 이맘때면 꾸는 악몽이 그녀를 밤새 괴롭혔지만 티를 내지 않으려 서둘러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공연한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그렇네.”

“공녀님, 어디 안 좋으세요? 또 악몽이라도 꾸신 거예요?”

저와 똑 닮은 검은 머리카락을 양 갈래로 단아하게 묶어 내린 조디가 인상을 썼다.

로하나는 큰 눈을 동그랗게 뜨며 천연덕스럽게 시치미를 뗐다. 그렇다고 시녀가 속는 눈치는 아니었지만.

폭 하고 한숨을 쉰 조디가 말을 이었다.

“오늘같이 좋은 날 아침부터 웬 악몽이세요. 그동안 황태자님 엄청 보고 싶으셨죠? 이제 진짜 결혼식도 코앞이네요.”

인기 판타지 소설 <골든 튤립>의 로하나로 살아가기 시작한 것도 꼭 15년이 되어 가고 있었다.

시녀라지만 가장 친한 친구나 마찬가지인 조디의 들뜬 얼굴을 보며 로하나는 미소를 지었다.

투명한 유리 대야에 손을 담그자 찰박, 하는 소리와 함께 잔잔한 파동이 일었다.

<골든 튤립>은 제국의 황태자인 바르디 콘스탄스 렌트워스와 평범한 남부의 몰락한 귀족 아가씨 오렐리아 브리의 사랑 이야기였다.

아린족으로 대표되는 대제국 아르드골드와 카르크족이 주를 이루는 이웃 변방 신흥국인 샤톤웰 사이의 실감 나는 전쟁 속에서 피어나는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

“오늘은 특별히 더 아름답게 꾸며 드릴게요!”

거울로 시선을 돌리자 비친 모습이 새삼 낯설었다.

투명한 얼굴에 대비되는 칠흑 같은 머리카락이 길게 굽이쳐 허리까지 내려왔다. 짙은 보랏빛 눈동자로 길고 큰 눈매가 돋보였다.

로하나 마르시아 하노버. 아르드골드 대제국에서 제일가는 하노버 공작의 1남 1녀 중 첫째.

아름다운 모습이지만 원작에서 ‘로하나’는 가련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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