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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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준은 재이의 변화를 기민하게 알아채는 사람이었다. 안색은 물론이고 눈짓 몇 번, 말 한마디에도 심정을 유추할 수 있었다. 그의 온 신경은 재이에게 쏠려 있었으니까.

방금 전만 해도 볼을 발갛게 물들이던 재이는 식사 내내 불쾌함을 숨기지 못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기분이 몹시 나빠 차마 완전히 감추지 못한 듯 보였다. 해준이 식사하다 넌지시 입을 열었다.

“맛이 없는가 보네.”

“어, 음. 그냥 그래요. 아니 뭐, 나쁘지 않다는 뜻이에요.”

둘 사이에 의미심장한 분위기가 흘렀다. 재이는 그가 이미 자신의 변화를 알아채고 미끼를 던진 것이라는 걸 알았고, 그는 재이의 말이 거짓임을 알아챈 상태였다.

재이는 스테이크를 썰다 한숨을 속으로 삼켰다. 터질 것 같은 마음을 더 이상 움켜쥐고 있기 힘들었다. 그가 바람을 피웠다는 의심보다는 가윤이 등장했을 때의 스트레스가 다시 떠올라 ‘또 시작인가’ 하는 마음에 너무나 불안했다. 이러다간 정말 화병에 돌아가서 잠도 못 잘 거 같아 터트리듯 질문했다.

“혹시 또 선봤어요?”

쌀쌀맞은 질문에 해준이 의아하게 물었다.

“선이라니. 전 국민이 날 예비 신랑으로 알고 있는데.”

재이가 울컥 솟아오르는 신경질을 꾹꾹 눌러 담으며 말했다. 상대가 자신이 누군지 제대로 밝히지도 않고 도망치듯 허겁지겁 전화를 끊었던 게 마음에 걸렸다.

“……아까 전화 오더라구요. 실수로 연결됐는데, 여자고. 제가 누구냐니까 허겁지겁 끊던데요.”

“그럴 리가.”

재이가 설명하며 그가 자신에게 맡겼던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물었다.

“저 너무 의부증 환자 같나요?”

“아니.”

해준이 단호하게 말하며 휴대폰으로 통화 목록과 메시지를 확인했다. 잠시 휴대폰을 살펴보던 그는 감정적 동요 없이 말했다.

“식사하고 갈 데가 있어.”

긴장감이 흐르는 식사가 끝나고, 해준이 안내한 곳은 아무도 없는 카페였다. 커피를 주문하려던 재이는 아무리 둘러봐도 직원이 보이지 않아 의아한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해준은 잠시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짬을 내어 메일을 답장하던 중이었다.

“안녕하세요.”

자신보다 훨씬 나이가 많아 보이는 여성이 나타났다. 재이가 눈을 깜빡이며 누구인지 추정하다 맥없는 말투로 전화를 끊었던 문제의 그 여자라는 걸 깨달았다.

“아, 안녕하세요.”

“여기는 저랑 결혼할 여자입니다. 오랫동안 만났으니 별다른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네에.”

여자는 여전히 조금 곤란해 보였지만 아쉬운 입장에선 별다른 선택지가 없는 듯했다. 그리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아니었던 터라 재이가 둘 사이에서 조용히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여자가 어렵게 입을 뗐다.

“저기. 전에 이야기 나온 비행기 티켓이요.”

“네. 말씀하세요.”

“……괜찮다면 윤재를 제가 직접 찾아보고 싶어서요.”

재이는 그제야 여자가 윤재와의 염문설로 떠들썩했던 상대란 걸 눈치챘다. 여전히 윤재를 찾지 못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미국이라는 거대한 땅덩어리에서 그게 가능할 거라 기대하지도 않았다.

“굳이 그런 선택을 할 필요가 있나요.”

“…….”

해준도 자신의 생각과 비슷한 듯했다.

“윤재를 만약 찾는다고 해도, 그리 좋은 결말이 기다리고 있진 않을 겁니다.”

해준은 덤덤히 충고했지만 재이보다도 여자를 이해할 수 없었다. 진드기처럼 달라붙는 놈팡이와 가정 폭력을 일삼는 남편에게서 간신히 벗어났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이들마저 빼앗겼지만 정말 홀몸처럼 살 수 있는 기회일 텐데. 서로가 없으면 못 살 만큼 사랑하는 것도 아니면서, 왜 굳이 대원에서도 꺼리는 가시밭길을 자처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여자는 해준의 차가운 눈초리에 한숨을 몰아쉬더니 대답했다.

“이해 안 되겠죠. 저조차 제가 미쳤다고 생각하니까요. 하지만 걔가 죽는 것보단 나아요.”

“…….”

“윤재 여태 저 찾아다녔으니까. 이젠 제가 찾아야겠죠.”

재이는 얼굴을 흐린 채 잠자코 침묵을 지켰다.

여자는 다음 날, 해준의 새로운 비서를 통해 미국행 티켓을 제공 받았다. 출국 준비를 꼼꼼히 마치고 서둘러 비행기에 올랐다.

긴 비행시간 동안, 여자는 윤재와 있었던 일들에 관해 꿈을 꿨다. 윤재는 여전히 능청스럽고 유쾌했지만 어진지 모르게 아슬아슬하고 불안해 보였다.

윤재를 못 찾고 있다는 말에 여자는 그와 자신이 짧은 연애를 했던 미국의 작은 도시를 떠올렸다. 폭력적인 남편에게 시달리고 현실에 지쳐 ‘에라이’ 하는 마음으로 윤재를 받아들였던 짧은 시간이었다. 고작 몇 달간이었지만 둘은 도피하듯 그들의 가정을 꾸렸다.

그곳에서 윤재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다. 막연하고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뇌리에 꽂힌 이후, 그럴 리가 없다며 몇 번이나 생각을 고쳐먹어도 포기하기 어려웠다.

윤재에 대한 자신의 감정은 여전히 혼란스러웠지만 그를 그대로 모른 척할 수 없었다. 그것만이 명확했고, 그것만을 기억하며 미국에 도착했다.

여자는 또다시 기차를 타고 함께 살았던 도시로 갔다. 자신과 그가 가장 좋아했던 카페로 걸었다. 이맘때쯤부터 봄이 올 때까지,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시며 울고 웃던 그때를 생각하며.

“…….”

그리고 여자의 예상은 정확했다.

너무나 익숙한 남자가 야외 좌석에서 커피 잔을 앞에 두고 손도 대지 않은 채 멍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특별한 초점도 없이,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있는 듯 보였다. 삶의 감흥이 없어 보이는 표정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아 보였다.

여자는 차마 그를 부를 수 없었다. 바라던 걸 찾아 미국까지 왔지만 발걸음이 도저히 떨어지지 않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가만히 그 광경을 쳐다보았다.

그때, 다른 사람의 존재가 느껴졌는지 그가 고개를 들었다.

“……누나.”

추레하고 마른 모습의 윤재가 홀린 듯한 표정으로 여자를 바라보았다. 순식간에 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두 사람은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여자는 고개를 돌려 울음을 삼켰다.

미국까지 도망쳐 왔으면 아주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거나, 아니면 아예 새로운 사람처럼 정착을 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과의 추억으로 돌아와 머물렀다. 그가 미련하고 답답하면서도 가여운 마음에 심장이 아플 만큼 저릿했다. 덩치만 크고, 나쁜 것에 해박한 윤재는 정작 자신과의 관계에선 첫 주인을 잊지 못하는 강아지처럼 굴었다.

여자는 이 지독한 관계가 조금 더 이어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윤재도 마찬가지였다.

* * *

유 회장은 해준이 부쩍 피곤해하는 것을 눈치챈 상태였다. 살이 빠지고 수척해지는 기색이 보였다. 그가 얼마나 자기 관리에 철저한지 알기에 겉으로 그만큼 티가 나는 걸 넘어가기 힘들었다.

게다가 회의 중 해준의 이마에 난 상처를 발견했다. 나중에 해준의 비서를 불러다 물으니 ‘넘어지셨다’는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했다.

“넘어졌다고?”

“네. 업무 보시다가 미끄러져 책상에 이마를.”

해준이 다친 것에 대해 보고하지 말고, 나중에 누가 물어도 사실대로 대답하지 말라는 지시가 있었다.

“자네 지금 날 바보로 아나?”

“……예?”

그대로 대답했을 뿐인데 회장의 반응은 차가운 정도를 넘어 본인을 괘씸하게 여겼다. 신입 비서는 손을 바들바들 떨며 회장의 분노를 고스란히 떠안았다.

“지금 장난하는 거야! 해준이가 어디 가서 덜렁대며 넘어진 적이 없는 앤데! 사실대로 말하지 못해!”

“아…… 저기 그게…….”

결국 유 회장은 30대 초반의 신입 비서를 울려 버렸다. 포기하지 않고 더욱 다그쳤더니 돌아오는 대답은 ‘과중한 업무로 쓰러지셨다’는 말이었다. 미끄러졌든, 과로든 둘 다 반갑지 않았다.

유 회장은 그때를 기점으로 해준의 컨디션에 대해 상세히 보고 받는 중이었다.

한창 바쁠 때도 끄떡없는 손주였으나 이번에는 달랐다. 사실은 두 개의 회사를 새로 시작한다는 중압감이 더해진 결과였으나 이를 알지 못했다. 유 회장이 비서 실장에게 물었다.

“그 띨띨한 비서 놈은 뭐라든?”

“새로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제가 물어봤는데 명확한 이유를 못 대더라고요.”

“보약이나 뭐 좀 챙겨 먹여 보지 왜.”

“지금 꾸준히 드시는 중이랍니다. 종종 수액도 맞으며 업무 보시고요.”

“그런데도 그런다고?”

유 회장이 골치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를 눌렀다. 자나 깨나 해준이 걱정되어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유 회장이 방법을 궁리다가 마지못해 질문했다.

“권 비서 그놈은 뭐 하고?”

“최근에 새로운 곳에 취직했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여전히 서울에서 지낸다고 합니다.

“…데려와 봐라.”

“예? 아, 아니. 알겠습니다.”

비서 실장이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되물었다. 유 회장은 자존심이 빼면 시체인 영감이었다. 대개 그의 판단은 여전히 훌륭했으나 가끔 일어나는 오판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았다. 그렇게 꼿꼿한 인간이 자신의 결정을 번복하다니.

“어떻게든 데려와 봐. 서울에 있다며. 지금 얼마나 중요한 시기인데 수발드는 것도 손발이 안 맞으면 되겠어? 더 바빠질 텐데 사업 말아먹을 일 있어?”

유 회장이 신경질적으로 설명했다. 그제야 비서 실장이 그의 말에 수긍했다. 비서 실장은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권 팀장에게 전화를 하려다 문득 미국에서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먹고살 만은 해? 내가 회장님께 잘 말해 볼까?”

“아, 아니요. 괜찮습니다. 지금 이직까지 했는데요 뭐. 저도 회장님께 서운한 게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고요.”

“괜찮기는 인마. 서울 살이 하는 게 보통 일이야? 무슨 뭐 이름도 없는 스타트업 다닌다며. 네 능력을 왜 그런 데서 썩히냐.”

“아니에요. 이것도 할 만합니다.”

“정확히 거기가 어디인데.”

“아 하하. 너무 작아서 아직은 좀 그렇네요.”

 

두루뭉술한 대답으로 때우며 일하는 곳을 밝히기 꺼려 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차라리 헤드헌팅으로 사람을 위장하여 보내 볼까. 이런저런 방법을 고안하던 비서 실장은 유 회장의 재촉에 결국 친한 탐정에게 권 팀장의 거취를 의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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