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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네 시가 되어서야 해준이 퇴근하여 호텔 룸으로 들어왔다. 무드 등을 켜 놓고 졸던 재이는 화들짝 놀라 일어나 그를 반겼다. 며칠째 꼭두새벽에 퇴근하고, 아침에 출근하는 강행군이 이어졌다.
재이는 반갑지만 잠이 덜 깬 채로 그와 포옹하고 재킷을 건네받았다. 그의 얼굴을 살피고 걱정스레 물었다.
“늦었네요. 피곤하겠다.”
“좀 그렇네.”
뜻밖의 대답에 재킷을 옷걸이에 걸던 재이가 흠칫 놀라며 당황했다. 같은 질문을 아무리 해도 웬만큼 힘든 게 아니면 괜찮다고 하는 사람이었다. 괜찮은 건가?
해준은 재이가 놀란 것도 모른 채 곧장 씻으러 욕실로 직행했다. 재이는 문 너머로 들리는 샤워 소리를 들으며 위험 신호를 감지했다. 해준은 빠르게 씻고 샤워 가운을 입고 나왔다. 여전히 아물지 않은 봉합 부위를 드레싱 해 주고 싶었지만 지금 당장 1분이라도 더 재워야 할 것 같아 나서지 않았다. 해준이 침대에 누웠고 재이가 우려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얼마나 잘 수 있어요?”
“지금 바로 누우면 한 세 시간쯤.”
“…….”
“부쩍 피곤해 보여서. 걱정돼요.”
“둘 다 새로 시작하는 입장이라 여기저기 다녀야 하니까 좀 바쁘네.”
막 씻고 나와 완전히 마르지 않은 검은 생머리가 그의 이마를 덮었다. 정돈된 머리로 일할 때 날 선 모습과는 전혀 다른 무드를 만들어 냈다. 재이의 마음에 모성애를 닮은 감정이 몽글거렸다. 치열한 하루를 보낸 그를 안아 주고 싶었다.
여전히 잘생긴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재이가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앞머리를 들췄다.
“……머리에 이건 뭐예요?”
“아. 어디 부딪쳐서 찢어졌어.”
이마를 꿰맨 흔적이었다. 재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해준은 되레 태연하게 대답했다. 재이는 황당한 마음 반, 걱정되는 마음 반이었다.
“누구랑 싸운 거 아니죠?”
“싸우긴.”
“그럼 어디에 부딪쳤…… 아니 일단 자요. 푹 자요.”
“이리 와. 자자.”
해준은 일부러 재이를 안심시키려는 건지 팔을 벌려 보였다. 재이는 그의 품에 안겼다. 해준은 금방 잠들었다. 하지만 재이는 여전히 심란한 기분으로 밤을 새워야 했다.
다음 날 오전, 재이는 고민하다 비서 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재이가 걱정스레 물었다.
“혹시 어제 대표님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었을까요? 이마를 다쳐 왔는데 제대로 말을 안 해 줘서…….”
-아. 그게 말입니다.
비서 실장은 이미 상처에 대해 알고 있는 눈치였지만 선뜻 말하지 못했다. 분명 해준이 이야기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을 게 분명했다.
-회장님께는 아직 올라가지 않을 예정입니다만 …일하다가 잠시 졸도하셨던 거 같습니다.
“뭐라고요?”
재이가 화들짝 놀라 되물었다. 너무 놀라자 어디서부터 어떻게 물어야 할지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래저래 요즘 일이 많으셔서 무리하셨나 봅니다. 아니라고는 하시는데 부쩍 피곤해 보이시더라고요. 회장님도 비슷하게 말하셨고.
“……아, 네.”
-많이 다치진 않으셨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러고 바로 병원 가서 처치하셨습니다.
“네네.”
당장은 ‘네’밖에 나오지 않았다. 전화가 끊기고서야 재이는 두려움이 몰려왔다. 졸도를 했다니. 그가 왜 자세한 일은 자신에게 말하지 않았는지 예상이 갔다. 지금처럼 이런 반응을 보일까 봐 그런 거겠지.
하지만 해준은 더 많은 일을 소화하기 위해 운동할 정도로 자기 관리에 철저한 사람이었다. 그런 해준에게도 한계가 찾아왔다. 만약 운전하다 졸도했다면?
“……안 돼.”
끔찍한 상상이 이어졌다. 재이는 그를 일찍이 잃게 될까 너무나 무서웠다. 대책이 필요했다.
* * *
재이는 다음 날 해준 몰래 호텔 룸 대신 사무실로 출근했다. 혼자서 업무를 보고 있던 권 팀장이 깜짝 놀라 재이를 반겼다. 재이는 일부러 포장해 온 초밥을 들어 보이며 웃었다.
둘은 사무실에서 포장해 온 것을 펼쳐 놓고 식사를 했다. 권 팀장이 유학 시절부터 본격적으로 둘에 관한 일을 처리했으니 그를 알고 지낸 것도 10여 년이 넘었다. 재이에겐 단순히 직원보다는 점잖은 젊은 삼촌 같은 느낌이었다. 재이가 젓가락을 입에 댄 채 권 팀장을 힐끔거리다 입을 뗐다.
“아저씨가 이마가 찢어져서 왔더라구요.”
“…….”
권 팀장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재이는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알고 계셨어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권 팀장은 두서없이 변명을 늘어놓았다.
“아……. 다음 미팅이 있는데 지금 병원이라 조금 늦을 거 같다고 연락이 오셔 가지고 제가 모셔 왔습니다.”
“제가 몰랐으면 말 안 하셨겠네요.”
“죄송합니다. 근데 월급쟁이가 다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답지 않게 너스레까지 떨었지만 뾰로통한 재이의 표정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과연 대책 없는 남자 둘은 자신이 모를 거라 생각했던 건가. 숨길 게 따로 있지 이런 걸 숨겼나 싶어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권 팀장은 안 되겠다 싶어 허겁지겁 말을 덧붙였다.
“크게 다쳤으면 바로 말씀드렸죠.”
“네에.”
“뭐 다른 건 궁금한 거 없으신……?”
권 팀장이 진땀 흘리며 재이의 기분을 풀어 주려 애썼다. 사실상 그가 모시는 상사는 해준과 재이 두 명이나 다름없었다. 이를 감안해 대원에서 재직할 때에도 비서 실장과 엇비슷할 정도의 고액 연봉을 받았었다.
재이가 진짜 원하던 질문이 나왔다. 재이는 사양하지 않고 냉큼 운을 떼었다.
“회사 차린 걸로는 회장님께서 별말 안 하시는가 봐요.”
“그릴 리가요. 아직 모르십니다.”
“예?”
어쩐지 내내 의아하게 여겨지며 찜찜했던 점이었다. 유 회장은 오로지 대원을 위해 사는 사람이었다. 후계자인 해준이 다른 회사를 차린다고 하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자세히 알지는 못해도 어느 정도 이야기가 나온 상태인 줄 알았던 재이는 아예 모르고 있다는 말에 걱정이 되었다. 걱정을 읽은 듯 권 팀장이 그녀를 달랬다.
“때가 되면 보고하지 않을까요. 원체 회장님께서 한눈파는 걸 싫어하시니 아직은 조심스러우신 듯합니다.”
“나중에 알게 되면 가만히 안 있을 거 같은데요.”
“제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생각이 통한 둘 사이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두 사람 모두 해준이 벌인 일에 대한 후폭풍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유 회장의 뜻에 맞서는 것과 다름없었다. 분명히 해준을 괘씸하게 여길 것이다.
무엇보다 재이는 해준의 컨디션이 걱정되었다. 기계도 과부하가 오는데 사람 몸이 남아날 리가 없다.
“그냥 경영하는 사람을 데리고 오면 안 되나요?”
“글쎄요. 생판 남을 믿고 맡길 성격은 아니니까요. 그런 것 보면 대표님이 일적으로도 회장님이랑 비슷한 것 같습니다.”
“…….”
재이는 사람 마음이 웃기다고 생각하며 말없이 눈살을 찌푸렸다. 전엔 마냥 프로페셔널해 보여 멋있게 여겼던 면이었는데, 이젠 그런 성격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좀 설렁설렁해도 될 텐데. 모든 걸 짊어지려고 하지 않아도 되는데.
재이는 식사가 끝난 후에도 사무실을 떠나지 않고 간단한 업무와 공부를 이어 나갔다. 하지만 여전히 뇌리에는 해준에 대한 걱정이 도사리고 있는 중이었다. 문득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다. 재이는 의자를 돌려 권 팀장을 다급히 불렀다.
“저기, 권 팀장님. 아저씨 아버지는요? 아니 그러니까. 아버님은요?”
“예? ……갑자기요?”
권 팀장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재이는 그러거나 말거나 열성적으로 의견을 제시했다.
“남에게 못 맡길 거면, 가족이면 되잖아요.”
“아니 그건…….”
“맞아. 왜 이 생각을 못 했지.”
권 팀장은 난색을 표하며 선뜻 대답하지 못했지만, 재이는 마음의 결정이 끝난 뒤였다.
* * *
나름대로의 해결책을 고안해 낸 재이는 조금 가벼운 마음으로 대원을 찾았다. 재이가 올 줄 몰랐던 해준은 비서의 인터폰을 받자마자 한달음에 달려갔다.
“재이야.”
“혹시 저녁…… 가능한가요?”
응접실 소파에서 그를 기다리던 재이가 그의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해준은 사실 저녁 시간을 업무에 할애할 계획이었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안 될 건 없지. 밖에는 왜 나왔어.”
그가 재이의 모자를 대신 눌러 주며 걱정했다. 손길에는 다정함이 묻어났다. 뜻하지 않은 데이트를 하게 되어 기분이 좋아진 재이가 해맑게 대꾸했다.
“답답해서 사무실 잠깐 들렀어요.”
“잠시만 기다려. 바로 외투만 갈아입고 올 테니까.”
해준이 자신의 휴대폰을 재이에게 맡기며 말했다.
“그럼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재이는 웃으며 돌아서서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때, 그가 자신에게 맡긴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
Rrrrrrrr-
“휴대폰 다시 필요한가?”
재이가 발신자를 확인하려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었다. 예상과 달리 해준의 다른 휴대폰이 아닌 모르는 번호였다. 재이는 별스럽지 않게 생각하며 휴대폰을 도로 가방에 집어넣었다.
-여보세요?
“……어.”
낯선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재이가 놀라 휴대폰을 열어 보았다. 자신의 손에 부딪쳐 통화가 연결된 듯했다.
-해준 씨. 저…….
그 짧은 순간이었지만 재이의 직감으로 ‘업무적인 관계가 아니다’는 걸 알아챘다. 여자는 어딘지 모르게 애달픈 목소리로 해준을 불렀다.
가윤과의 관계에 종지부를 찍은 지 오래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아닐 걸 알면서도 그간 마음고생에 시달려 온 재이로서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대로 끊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자신도 모르게 통화 너머의 상대에게 물었다.
“누구세요?”
잠시 정적이 흘렀다. 여자는 재이가 전화를 받아 놀란 눈치였다.
-아……. 죄송합니다.
허둥지둥 전화가 끊겼다. 재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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