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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수백 번의 고민 끝에 대원에 해준의 연락처를 물었고, 그 소식은 직원을 타고 타고 올라가 비서 실장에게까지 당도했다. 그리고 해준에게 연락을 받기까지는 며칠간의 시간이 더 걸렸다.
약속을 잡기 전 보안에 대한 신신당부를 들은 여자는 온몸을 꽁꽁 싸맨 채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약속 장소인 카페는 직원 한 명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 여자는 한참을 기다리며 해준과의 과거 일화를 떠올렸다.
“윤재 많이 불안한 친구입니다. 그 점은 누구보다 잘 아실 거예요. 서로 간에 합의점을 잘 찾아서, 정리해 주십시오.”
“그 댁에서 그렇게 시키나요?”
“……찾아온 건 제 판단입니다. 하지만 이게 회장님께 알려져서 좋을 건 없죠.”
해준이 자신을 찾아왔을 때는 막내를 출산한 지 나흘밖에 되지 않을 때였다. 해준의 첫인상은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매정해 보이고, 몹시 일방적이었다. 출산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람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게 놀랍기도 했다.
한편 상황이 유쾌하지 않은 건 여자도 마찬가지였다. 막연히 남편의 아이인 줄 알고 낳았지만 첫눈에 보자마자 윤재와 판박이였기 때문이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정도였다. 고심해서 낳은 막내였기에 그녀의 충격은 더했다.
몹시 혼란스러운 와중에 찾아와 하는 말이 윤재와 거리를 두라며 반 협박이라니. 그녀가 윤재와의 관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든, 말이 곱게 나올 리가 없었다.
“애는 나왔는데요. 저더러 어쩌라는 거죠. 남편은 벌써 본인 안 닮았다고 절 의심하더라구요.”
“……매달 양육비 명목으로 얼마씩 보내드리겠습니다.”
자존심이 상하다 못해 모멸감을 느꼈다. 여자는 며칠 전, 발끈하여 윤재에게 이제 어쩔 거냐며 사실을 말한 것을 후회했다. 나름대로 둘만의 비밀이라 생각하여 홧김에 따진 건데 이런 일이 있을 줄은 상상을 못하기도 했다. 그녀가 발끈하여 물었다.
“윤재가 이르던가요? 이러라고?”
“아니오.”
“아니라고요? 거짓말하지 마세요. 그럼 어떻게 알았는데요.”
“윤재가 얼마 전에 백화점에서 아기 신발을 보며 귀엽다고 하더라고요.”
해준은 무표정하고 느릿하게 자신이 본 것을 이야기했다. 여자는 그때 조금 소름이 돋았다. 유윤재와 달리 해준은 만만치 않은 인간이라는 느낌이 정수리에 꽂혔다.
여자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해준이 도착했다. 자신에게 걸어오는 해준은 여전히 근사하고 반짝였다. 고단한 인생에 이혼까지 겪은 후 마음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 생기를 잃어 가는 자신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안녕하세요. 유해준입니다.”
둘은 구면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윤재조차도 그 사실에 대해서는 모르는 상태였다. 여자가 맥없는 목소리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네요. 휴대전화 번호가 바뀌셨더라고요.”
“그러게요.”
해준이 심드렁하게 정장 단추를 풀며 앉았다. 자신의 말에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이는 태도였다. 혹시 자신이 돈을 요구하거나 무리한 부탁을 하러 온 거라 생각하는 걸까. 여자는 조금 주눅 드는 기분을 느꼈지만 용기 내어 용건을 밝혔다.
“다름이 아니라 윤재가 미국에서 저한테 전화를 했는데. 걱정이 되어서요.”
“뭐라고 하던가요?”
해준이 질문하며 여자를 빤히 쳐다봤다. 말투는 덤덤하고 느릿했지만 날카롭고 차가운 눈빛에는 자신에 대한 탐탁지 않음이 도사리고 있었다. 여자가 흠칫 놀랐다.
“마지막으로 전화했으니까 끊지 마요.”
“잘 먹고 잘 살아요. 좆같은 놈 또 만나지 말고. 아줌마 남자 보는 눈 꽝이니까 그럴 거면 차라리 독수공방 꼬부랑 할머니가 되라고.”
차마 마지막 통화 그대로 대답하기는 힘들었다. 내용을 떠올리며 대답을 얼버무렸다.
“잘 지내라고 하던데. 뉘앙스가 심상찮더라구요.”
“걱정되시나 보군요.”
“……사실 미국에 가기 전에 절 찾아왔어요.”
“알고 있습니다.”
“같이 가자고 하던데 제가 너무…… 매몰차게 뿌리친 게 아닐까 싶어서. 저도 인간인지라 그런 말을 들으니 내내 걱정이 되네요.”
여자가 혼란스럽게 한숨을 푹 쉬었다. 전화를 받고 윤재가 마지막 전화라고 할 때까지도 별생각이 없었다. 그 정도의 말은 윤재가 술주정으로도 이따금 했던 소리였다.
문제는 그가 전화를 먼저 끊고 나서였다. 항상 전화를 일방적으로 끊어 버리는 건 자신이었다. 전과 다른 행동에 여자는 불길한 생각이 먼저 들었다.
“여보세요? 여보세……. 뭐지?”
지긋지긋한 인연이 드디어 끝났다는 생각이 들기는커녕 무섭고 우려스러웠다. 이후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밥도 넘어가지 않았다.
누구에게라도 걱정을 털어놓으니 조금 살 것 같았다. 여자는 해준이 무슨 대답이라도 해 주길 바라며 간절하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해준은 무척 사무적인 대답을 내놓을 뿐이었다.
“지금 신변 확보 중입니다. 한국도 아니고 미국이라 시간은 좀 더 걸릴 듯싶고요.”
그의 태도가 너무나 차가웠다. 여자는 당황하여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둘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그게 끝인가요?”
“이게 저희 측에서는 할 수 있는 최선이나 가족으로서 남아 있는 최대한의 호의입니다.”
해준은 마치 모르는 사람의 일처럼 반응했다. 차갑고, 매정하고, 기계적이었다. 여자는 자신의 말을 듣고도 어떻게 심각성을 느끼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말은 그렇지만 과도하게 태평하시네요.”
“저희가 들을 말은 아니죠.”
“뭐라구요?”
“원해인 씨. 본인도 이혼 끝에 이제 걸릴 것도 없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따라가지 않기로 한 거 아닌가요.”
“…….”
여자는 순간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뭐 그게 잘됐다느니 그러지 말았어야 하느니 하는 게 아닙니다. 다만 끝난 관계라면 저희가 굳이 그런 이야길 들을 이유는 없습니다.”
여자는 기가 차서 얼굴이 화끈거릴 지경이었다. 그녀는 좋든 싫든 윤재를 오랫동안 알고 지냈다. 윤재가 집안에서 어떤 푸대접을 받는지는 이미 알고 있는 상태였다. 그가 아주 어릴 적부터 비뚤어지기 쉬운 환경이었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해준의 말이 곱게 들리지도 않았고 납득조차 어려웠다. 아무리 그래도, 가족이, 사촌동생이, 세상을 떠났을 수도 있다는데.
“그럼 어디 가서 죽기라도 해도 상관없다는 건가요?”
“대원의 각 직원은 모두 각자 과중한 업무를 버텨 가며 지내고 있습니다. 비서실도 마찬가지고, 회장님 댁 직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윤재를 찾을 인력은 없다는 말입니다.”
“정말 너무하시네요.”
“정 걱정되시면 직접 가 보시죠. 티켓까지는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해준이 자신의 입장을 밝히며 테이블 위에 명함을 올려 두었다. 여자는 어안이 벙벙한 채로 더 이상 받아치질 못했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게를 나섰다.
* * *
어린 나이에 가족을 잃게 된 재이는 그게 자신의 운명이었다고 해도 여전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사고가 너무 일찍 났다는 게 가장 슬펐다.
재이는 그래서 가정이란 것에 집착하게 되었다. 해준과 이룬 가정이 특별할 수밖에 없었다.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그와 자신이 완전하고 단단하길 빌었다.
겨우 중학생이었다. 가족에게 좀 더 살뜰하고 진지하게 마음을 표현하지도 못할 나이였다. 부모님의 사랑과 오빠의 정성을 당연하게 여기던 자신의 모습이 원망스러울 때도 있었다. 그때 조금이라도 더 표현할걸.
한 편으로는 어릴 적부터 친구를 포함한 주변인에게 가족에 대한 충고를 자주 하게 되었다.
“아, 진짜 아빠 너무 짜증 나.”
“……그러지 말고 생각이 달라서 그런 거니까. 네가 한 번만 더 생각해 봐.”
“야 넌 내 편이야 우리 아빠 편이야?”
“그래도 있을 때 잘해 드려야지.”
남의 집 사정은 모르는 거라고 생각해도, 가족에 관해서는 자꾸만 고지식한 말이 나왔다. 자신에게 뼈아픈 기억을 자신이 아끼는 사람들은 겪지 않길 바랐다.
그런 탓에 재이는 간밤에 보았던 해준의 부친에게서 온 문자가 부쩍 신경이 쓰였다. 사랑하는 해준만큼은 같은 후회를 하지 않길 바랐다. 주말에 시간을 내어 달라고 부탁한 것도 부친의 집에 함께 방문하자는 의도였다.
“권 팀장님.”
일하는 내내 마음에 걸렸다. 재이는 고민을 거듭하다 권 팀장과 통화하는 와중에 이야기를 꺼냈다.
-네네.
“그…… 아저씨 아버지 말이에요.”
-아. 네.
“만나 본 적 있으세요? 어떤 분이세요?”
여전히 집안에서 쉬쉬 받는 인물이라 혹시 ‘그런 건 왜 묻냐’며 되물을까 우려한 것과 달리 흔쾌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럼요. 대원에 있을 때도 명절 가까워지면 한 번씩 방문하곤 했습니다. 대표님은 워낙 바쁘시니까. 좋은 분이세요. 되게 평화로우세요.
“아…… 지금은 시골에 계시는 걸로 알고 있는데.”
-네. 지금은 뭐 한적한 시골에서 텃밭이나 일구며 지내시는데 뭐, 그것도 적응이 쉽지 않으신 거 같더라구요.
“어떤 게요?”
-아무래도 외지인이 들어오면 까탈스럽게 굴 때도 있고, 나이대가 지긋한 주민들은 대부분 알아볼 테니까. 재벌이다 뭐다 옛날 소문도 있고요.
“…….”
실제로 해준의 부친은 전혀 티를 내지 않았지만 시골 생활에 익숙해진 반면 주민들과 섞이지는 못하는 중이었다. 주민들은 재벌 2세가 마을에 돈도 제대로 쓰지 못한다는 둥, 콧대만 높다는 둥 하며 여러 트집을 잡았다. 해준의 부친은 유 회장의 손을 피해 안정되었지만 여전히 외롭게 살고 있었다.
권 팀장의 설명에 대략적인 상황이 그려지는 듯했다. 해준은 자세한 상황까지는 모를 것이다. 알았다면 분명 서울로 모셔 왔을 텐데. 재이는 볼을 부풀리며 고민하다 물었다. 진짜 궁금했던 것이었다.
“오빠가 평소에 걱정 많이 하죠?”
권 팀장이 대답했다.
-직접적으로 말하진 않으시지만…… 종종 먼저 이야기 꺼내시는 걸로 보아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지 않으실까요. 자식 된 입장으로서.
자식 된 입장으로. 더 이상 자식 도리를 하고 싶어도 못하게 된 재이의 마음에 꽂히는 대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