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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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이는 침대에서 깊은 잠에 빠져 뒤척이다 목이 말라 깼다. 데스크 위에 올려 둔 해준의 휴대폰이 요란하게 진동했다. 재이가 시간을 확인하였다. 새벽 세 시. 그의 휴대폰이 시도 때도 없이 울리긴 했지만 이렇게 이른 새벽에는 드문 일이었다. 그것도 일상용 휴대폰이라니. 문득 궁금함이 솟은 재이가 휴대폰 액정에 뜬 알람을 슬쩍 살폈다.

[해준아 최근 신문 기사를 보았다. 네가 얼마나 마음고생이…….]

재이는 뒤가 잘렸지만 문자의 내용을 보고 얼굴이 굳었다. 발신자가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

조금 놀라 말문이 막혔다. 거물거물 눈꺼풀에 달려 있던 잠도 달아나는 연락이었다. 재이는 조용히 자고 있는 해준과 문자 내용을 번갈아 보았다.

“…….”

얼떨떨한 마음으로 도로 침대에 누웠다. 차라리 보지 않는 게 좋았을걸. 재이는 자신의 행동을 바로 후회했다. 일어나면 해준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괜스레 싱숭생숭 걱정스러웠다.

재이는 해준의 아버지에 대해 대략적으로 알고 있는 상태였다. 부친은 해준의 아픈 손가락이었다. 철저히 존재가 지워졌던 강력한 후계자. 이제는 사실상 집안의 일원도 아니었고, 쉬쉬 받는 사람이란 걸 본인도 알 만큼 푸대접을 받았다.

해준은 평소에 부친에 대한 그리움을 표출하거나, 이야기를 많이 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1년에 한두 번 짬을 내어 들르곤 했다. 그날은 돌아와서도 평소보다 조금 가라앉아 있었기에 재이도 매번 주의하곤 했다.

해준의 마음을 아주 이해 못하는 건 아니었다. 재벌가 자제들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숱한 사고를 치고 다녔지만 그렇게 노골적으로 쫓겨나는 사람은 없었다. 유 회장이 얼마나 지독한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정재계에서도 해준의 부친은 비운의 재벌 2세로 일컬어졌다. 분명 잘못한 부분이 있지만, 포악하고 유별난 아버지 밑에서 맥을 못 추다 삐뚤어졌다는 말이 많았다. 영조와 사도 세자에 비유하는 사람도 있었다.

유 회장의 극심한 통제력은 해준에게도 예외가 없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해준은 아버지처럼 되면 안 된다는 강박을 가지고 버텨 왔다.

“괜찮을까.”

재이가 몸을 돌려 누워 해준을 빤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재이는 해준의 부친을 직접 보지 못했다. 그러나 사진을 통해 얼굴을 알고 있었고, 두 사람은 전체적인 인상이 닮은 잘생긴 부자지간이었다. 검은 머리칼이 잘 어울리는 남성스러움, 뚜렷한 티존, 단단한 턱. 해준의 부분 부분에서 아버지의 얼굴이 남아 있었다.

아침 일찍 세탁을 맡긴 정장이 배달되었다. 해준은 그보다 더 일찍 일어나 출근 준비 중이었다. 재이는 여전히 비몽사몽한 상태로 이불 속에 파고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괜찮겠어요? 좀 더 쉬는 게 좋을 거 같은데.”

“그럼. 정 이상하면 바로 병원 가면 돼. 그리고 한동안은 이 룸에서 지내며 일하도록 해. 재택근무라고 생각하고.”

1박에 100만 원이 조금 안 되는 곳에서 기약 없이 지내라니. 금전적인 부분도 무시할 수 없었지만 한국에 온 재이는 얼른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저 그냥 사무실에서 숙식해도 되는데.”

“그럴 거면 차라리 여기서 해. 일단 필요한 건 권 팀장이 다 가져올 거야.”

“팀장님은요?”

“사무실에서 있겠지. 재이는 조금 더 잠잠해지면 그때 출퇴근하도록 하자.”

이 화제의 중심에 자신이 있었기에 마냥 싫다고는 할 수 없었다. 재이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물었다.

“대원으로 가세요?”

“아니. 새로 계획된 계열사 대표직으로 인사이동이 있었어.”

“예? 정말요? 본사에서는 나오구요?”

해준은 파격적인 변화를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하지만 협상의 자세한 내용을 모르는 재이는 본사에서 쫓겨나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에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어쩔 수 없지. 지금 당장은 아니고, 잠정적으로 결정된 사안이야. 참, 전보다 바빠질 수도 있어.”

“……얼마나요?”

“뭐, 한창 일할 때만큼은 될 거야.”

자신도 모르게 해준의 부친을 떠올린 재이가 혼란스러운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생활이 주목 받는 것을 꺼리는 유 회장이 이번 사건으로 해준에게 불이익을 주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도 그럴 것이 유 회장은 본사와 장남에 집착하는 사람이었다. 해준의 사촌들에게도 금전적인 지원이나 여타의 도움을 베풀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후계자의 기회는 전혀 주어지지 않았다. 일적으로는 대원 그룹의 중심은 본사라는 사명 아래에 본사의 위엄에 집착하기도 했다.

“새로 만든 회사는요?”

“권 팀장이 아무래도 많은 역할을 하게 되겠지 한동안. 이미 신규 채용이 진행되고 있으니까 그건 걱정하지 마.”

말은 그렇게 하지만 재이는 해준이 절대 새로운 회사도 소홀히 하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었다. 제 손을 거치지 않으면 안심하지 못하는 성격 탓이었다. 그만큼 그가 뛰어난 인재이기도 했다. 재이는 그에게 일중독의 기미가 보이는 건 알고 있었지만 더 이상의 과도한 업무는 지켜보기 힘들었다.

해준은 이미 유학 시절부터 시간이 부족할 만큼 빽빽한 생활을 했다. 명문 대학 생활을 투잡, 쓰리잡을 뛰며 자신을 건사하는 걸 지켜봤다. 그때는 막연히 자신이 졸업하면 나아질 거라 생각했지만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한국에 들어오자 더욱 막중한 책임감과 과도한 업무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리 해준이 튼튼하다고 해도 부족한 잠과 잔인할 정도의 일정에 시달리다 보면 언젠간 고장 날 것이다. 재이는 진심으로 걱정되었다.

“아니. 업무가 너무 많아요. 건강도 생각해야 하잖아요.”

하지만 해준은 언제나처럼 강경했다.

“내가 살아남지 못하면 아무 의미가 없는 것들이야.”

재이는 이번에도 그의 부친이 떠올랐다. 그는 부친이 유 회장에게 자식 취급도 받지 못하며 고생하는 걸 지켜보며 자랐다. 언제 어디서나 치열한 건 자신만큼은 달라야 한다는 강박에서 나온 걸지도 모른다.

“본격적으로 설립되면 더 바빠지겠네요.”

“어쩔 수 없지.”

그가 쉽게 말려지지 않을 걸 알았기에 실망은 없었지만 답답한 마음은 여전했다. 둘의 분위기가 무거워질 기미가 보였으나 재이는 이런 기분으로 출근시키고 싶지 않아 화제를 돌렸다.

“주말에 시간 조금 내주실 수 있으세요?”

Rrrrrrr-

그때 해준의 휴대폰이 울렸다. 해준이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보았다.

[비서 실장]

해준은 발신자만 확인한 후 전화를 받지 않고 재이에게 물었다.

“얼마나?”

“일단 전화 받고 출근하세요. 이따 이야기해요.”

비서 실장이 전화한 걸 함께 본 재이는 이야기를 갈무리 지었다. 일과 관련해서는 최대한 간섭하지 않는 편이었다. 해준은 재이의 말에 서류 가방을 챙겨 룸을 나섰다.

“여보세요.”

-본부장님. 아니 이제 대표님이시죠.

“대표는 무슨.”

비서 실장의 너스레에 덤덤히 대꾸했다. 평소 직접 연락할 일이 적었기에 아침부터 무슨 일인지 의아했다.

-비서실에서 대표님 번호로 어떤 여자가 연락이 왔다고 하는데, 저에게 보고가 올라왔더라고요.

“웬 여자.”

-그…… 윤재 씨랑 만났던 사람 같습니다.

“뭐?”

-…….

반갑지 않은 말에 두 사람 사이에서 잠시 정적이 흘렀다. 비서 실장의 목소리도 처음과 달리 조금 무거웠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좀 만나 달라던데요. 일단은 대표님께 한번 여쭤봐야 할 거 같아서 전화드렸습니다.

해준은 생각지도 못한 말에 차에 타고도 선뜻 시동을 걸지 못했다. 잠시 고심하다 입을 뗐다.

“……일단 알겠어요. 나한테 번호 남겨 놔요.”

-괜찮으시겠습니까?

“윤재가 안 괜찮은데 뭐 가릴 게 있나. 문자로 보내 놔요.”

사고를 치고, 자신을 칼로 찌르고 도망쳤지만 해준도 마냥 통쾌하진 않았다. 윤재는 자신 때문에 오랫동안 집안에서 비교를 당하고, 애물단지 취급을 받아 왔다. 재이에게 탐탁지 않은 짓을 한 놈을 예뻐할 수는 없었지만, 가족이란 존재로 촘촘히 얽혀 있는 사이였다. 윤재를 완전히 외면하기는 현실적으로 힘들었다.

전화를 끊고, 복잡한 마음으로 탁한 한숨을 쉬었다. 일적으로도, 사적으로도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그는 선뜻 출발하지 못한 채 밤중에 와 있던 연락을 체크했다.

그리고 그중에는 기대하지 않았던 격려도 있었다.

[해준아 최근 신문 기사를 보았다. 네가 얼마나 마음고생이 많았을지 헤아릴 수 없구나. 하지만 네가 언제나처럼 굳건히 버틸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좋은 소식 또한 반가우니 그걸로 위로 삼자꾸나. 아빠는 엄마를 끝내 지키지 못했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항상 아껴 주거라.]

* * *

대원에는 본격적인 계열사 설립을 위해 새로운 프로젝트 팀이 꾸려졌다. 새로운 회사를 설립하는 것은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했지만 시장 상황이 대원에게 더 이상의 여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건재하지만 여전히 고루한 산업에 익숙한 대원에게는 완전히 새로운 도전이자 혁신이었다. 그리고 해준이 최전선에서 그 총대를 맡게 되었다.

임원진들은 해준이 대표직을 자처했다는 말에 놀라는 한편 크게 안심했다. 노인 공경이 약하고 싹퉁바가지일지라도 일에는 지독했으니까. 일단 해준이 대표직에 앉는다는 말에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낙관론이 잔잔하게 깔렸다.

긴 회의가 끝나고 유 회장은 해준과 함께 식사 시간을 가졌다. 유 회장이 첫술을 뜨며 물었다.

“별 탈 없이 잘 될 거 같으냐.”

“별 탈 없게 만들어야죠.”

해준이 덤덤히 대꾸했다. 어차피 외부의 말에 흔들릴 필요는 없다. 모든 것은 자신이 어떻게 하느냐, 또는 하늘의 뜻인 것이다. 매 순간 최선을 다하기만 하면 제 몫은 끝났다는 게 해준의 지론이었다.

그를 빤히 바라보던 유 회장이 무겁게 말했다.

“한눈팔지 말고 이것만 집중해라.”

“…….”

“5년 안에 업계 1위. 네 말에 책임을 져야 할 거야.”

해준이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한눈팔지 말라는 건 유 회장의 욕심일 뿐이라 생각했다. 재이를 위해 권 팀장과 합심하여 꾸린 회사가 떠올랐다. 그의 큰 그림 중 일부였기에 어느 하나 포기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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