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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준은 재이가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티 한 점 없는 인간. 무슨 일이 일어나도 초연한 태도에 재이에게 관심이 많은 것 빼고는 타고나길 세상만사 무감한 성격.
자신을 범접할 수 없는 그런 존재처럼 바라볼 때, 해준이 속으로 웃음을 삼킨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물론 타고난 기질이 유별나거나 예민한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해준에게도 단점은 있었다. 염세적이고, 차갑다 못해 매정한 면이 있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그것을 숨기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던가. 해준이라고 해서 로봇처럼 무감한 인간은 아니었다.
그에게도 나름대로 사정이 있었다. 물론 뭐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환경이었지만 그러기 싫었다. 재이가 아주 어릴 때부터 자신이 모범적인 모습을 보이기 위해 노력했다. 재이에게는 흐트러짐 없이 좋은 것만 보여 주고 싶었다.
내면 깊은 곳에, 그는 사실 좀 더 큰 욕망을 가지고 살았고, 이를 재이 앞에서 시시때때로 억눌러 왔다.
변화는 재이가 커서 성인이 되어 애티를 완전히 벗어났을 때부터였다. 그가 품은 감정의 결이 달라졌음을 인정하게 되자 이후로 자신의 인내심을 시험받아야 했다.
“오빠 뭐 해?”
재이가 어릴 적처럼 무심코 얇은 티셔츠를 입고 다가왔을 때. 자신이 붙잡고 있는 업무를 보기 위해 허리를 숙이자 가슴골이 보였을 때, 우산을 잃어버렸다고 비를 쫄딱 맞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짧은 치마를 사 보았다며 자신의 앞에서 해맑게 빙글빙글 돌았을 때.
순간순간이 그의 고비였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해준이 재이의 붉어진 목을 보며 중얼거렸다.
“넌 아무것도 몰라.”
그의 진심이 빼곡하다 못해 꽉 찬 말이었다. 얼마나 고상하게 포장한 건지 해준은 스스로의 앞뒤 다름에 혀를 내둘렀다. 그의 추접한 속내를 재이가 알면 분명 과대 포장이라고 화낼 테지. 그는 재이 앞에서 이토록 가식적으로 굴 수 있는지 스스로 놀라울 정도였다.
“…….”
재이는 곤란한 건지, 부끄러운 건지 모를 얼굴을 하고 말이 없어졌다.
해준은 그런 모습을 보고도 전혀 사그라들지 않은 자신의 욕심을 실감하며 속으로 기가 찼다. 배에 칼자국이 나고도, 재이가 자신을 병간호하는 와중에도 탐하고 싶은 자신이 인간 말종 같았다. 다행인 점은 재이는 자신의 말을 별스럽게 여기지 않는 듯 보였다.
몸을 붉힌 채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재이가 조심스레 입술을 열었다.
“저도 알 건 알아요.”
맹랑한 대답에 해준이 재이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욕실에서 흐르는 침묵이 미묘한 긴장감을 띠었다. 그는 자신을 쳐다보지도 못하면서 ‘알 건 안다’고 대답하는 재이를 어떻게 해야 좋을지 고민했다.
“까불지 마.”
“…….”
그의 속도 모르는 재이가 뾰로통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삐친 듯한 표정도 그의 눈에는 혼자 보기 아까울 정도로 귀여웠다. 재이가 투정 부리듯 말했다.
“애 취급 하지 마세요.”
“애잖아.”
“아니에요.”
재이는 힘주어 아니라며 대답했다. 다소 단호한 대답에는 결연함까지 깃들어 있었다. 조금 신경질이 난 것 같아 굳이 더 이상 놀리지 않았다. 그때였다.
재이가 조금 긴장된 얼굴을 하고 그의 어깨를 짚고 섰다. 해준과 하는 키스. 몇 번이고 해 보았지만 새삼스럽게 느껴지며 긴장됐다. 조금 다르게 들리는 목소리, 감각이 곤두서는 건조하고 찬 공기, 발바닥에 닿는 차가운 타일 바닥.
해준이 무언갈 하려는 걸 알고 팔꿈치를 가볍게 잡았지만 재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안재이.”
“……저도 안다구요.”
목소리 끝이 떨렸다. 재이는 제 목소리가 불안정한 걸 들으며 더욱 긴장했다. 능숙하게 굴고 싶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어리숙하고 서툰 모습이 낱낱이 보여지고 있다는 생각에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평소라면 엄두도 내지 못했을 텐데. 가운과 속옷만 입고 있는 그가 왜 이렇게 달라 보이는지. 왜 이렇게 짓궂은 짓을 하고 싶은 건지. 오늘따라 그의 말이 아니라는 걸 왜 이렇게 증명하고 싶은 건지.
두 사람 사이에서 정적이 흘렀다. 차가운 욕실이 조금 추울 정도였지만 재이는 어딘지 모르게 머리가 뜨겁고 멍해졌다. 해준은 욕조에 걸터앉은 채 자신을 바라보고, 드물게 그와 시선을 맞춰 눈을 바라보고 있는 순간이었다.
자신의 시야에 그가 같은 위치에서 오롯이 담겨 있다. 그의 눈, 코, 입, 그리고 얼굴의 조화, 단단한 턱, 긴 목과 어깨선을 따라 날렵하게 빠진 어깨까지.
그를 어떻게 욕심내지 않을 수 있을까.
“뭘 아는데.”
해준이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물었다. 재이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는 깊은 감정이 일렁였다. 기꺼이 받아들이고 싶지만 못내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재이가 눈을 내리깔았지만 속내를 훤히 보여 주듯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냥. 알 만한 건, 다…….”
“그럴 리가.”
해준이 쭈뼛대는 재이의 말에 단호히 대꾸했다. 알 리가 없다. 자신이 이렇게 시커먼 속내를 네게 품고 있다는 걸 알 리도 없고, 알아서도 안 됐다.
“…….”
키스하려 했는데. 민망할 정도로 단호한 말에 재이가 머쓱해하며 어깨를 잡은 손을 잡았다 놓길 반복했다. 그때, 해준이 천천히 고개를 비스듬히 돌리며 재이에게 키스했다.
부드럽고 가벼운 키스였다. 짧게 떨어졌다. 그가 재이에게 ‘괜찮다’고 말하는 것 같았지만 재이는 전혀 괜찮지 않았다.
약이 올랐다고 말하면 유치하겠지만, 자신도 그에 대한 마음을 낱낱이 보여 보이고 싶었다. 단순히 어린 시절의 재이를 기억한다고 자신의 마음을 과소평가하는 것 같았다. 얼마나 그를 좋아하다 못해 성인 여자로서 설레어 하는지, 해준이란 남자와 함께 뭘 하고 싶은지 알려야 했다.
재이는 한 손을 올려 그의 눈을 가렸다. 이번엔 그녀가 먼저 키스했다.
서툴고 의욕이 앞서지만 좀 더 노골적인 키스였다. 해준은 별달리 거부감 없이 묵묵히 재이의 키스를 받아 주었다.
재이는 그의 눈을 가리고, 제 의욕껏 키스한다는 자체에 배덕감을 느꼈다. 말 한마디도 조심스럽던 사람이었다. 어려운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쉽지도 않았다. 그가 가볍게 끝내어 버린 키스를 저 좋자고 진득한 욕망을 담아 퍼붓는 꼴이라니.
그와 혀가 얽히고 뭉근한 체온이 느껴졌다. 그 와중에도 해준은 재이에게 맞춰 주며 은근하게 그녀를 이끄는 중이었다. 둘의 뜨거운 숨이 오갔다. 욕실 안에서는 입술이 붙고 떨어지는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려 그의 얼굴을 잡았다.
입가로 침인지 무엇인지 모를 액체가 흐르고 머리카락이 볼에 붙기도 했지만 재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모든 감각과 신경은 해준에게 쏠려 있었다.
자신이 그를 자극하고, 그가 반응을 보인다는 이 상황 자체가 야릇하게 느껴졌다. 정직한 신체 반응이 순전히 자신 때문이라는 것 자체가 기뻤다. 욕실에는 적나라한 소리가 끊이지 않고 울렸다. 재이는 완전히 몰입하여 시간 가는 것도 잊은 채 구석구석 그를 느꼈다.
재이는 그의 어깨를 타고 팔뚝을 만지다 문득 다친 상태라는 게 떠올랐다. 아쉬웠지만 마지못해 입술을 떼야 했다. 해준에게서 떨어지자 그가 아무 말 없이 입가에 묻은 타액을 닦아 주었다. 재이가 머쓱한 마음에 둘러댔다.
“……그냥. 아프니까.”
맥락 없이, 두서없는 대답이었지만 두 사람에게는 하등 중요하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서 긴장감을 실은 침묵이 흘렀다. 재이가 덧붙여 말했다.
“더 할 수 있는데. 그냥. 참은 거예요…….”
해준의 인내심은 그쯤에서 끊어졌다.
“뒤돌아봐.”
그가 재이를 일으켜 세웠다. 재이는 생각도 못 한 말에 화들짝 놀란 와중에 엉거주춤 일어났다. 끝난 거 아니었나?
“아니, 아저씨, 지금 무리하면 안 되는.”
“괜찮아.”
벽에 달라붙은 재이의 등에는 해준이 밀착했다. 이제부터 정말 시작이라는 걸 실감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픈 사람과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재이의 생각은 잠깐이었다.
전처럼 기억도 제대로 하지 못할 만큼의 격렬한 과정은 아니었지만 그는 진득하고 노골적으로 재이를 느꼈다. 민망한 마음에 조금 쉽고 빠르게 넘어갔으면 하는 바람 따위는 통하지 않았다. 짧지 않은 시간의 순간, 순간이 아주 낱낱이 느껴졌다.
재이는 허우적거리듯 정신을 차리지 못하며 헐떡였다. 평소의 관계가 해일처럼 몰아쳤다면 오늘은 깊은 늪처럼 자신을 빨아당겼다. 발버둥 칠수록 자꾸만 빠져 갔다. 욕실에서는 애달프고 가쁜 숨이 이어졌다. 장소의 특성상 욕실을 가득 메우는 울림이 퍼졌다.
집이 아닌 호텔. 그와 여행을 가면 같은 룸을 써 왔지만 매번 아무 일도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완전히 달라진 둘의 사이가 새삼 놀라웠다. 먹고 자는 곳이 아닌 씻는 곳에서 엉켜 있는 둘이 너무나 자극적이었다.
“상처, 터지면, 어떡해요.”
재이가 타일에 볼을 붙인 채로 걱정스레 물었다. 목소리는 뚝뚝 끊기고 불안정했으나 그는 용케 알아듣고 대답했다.
“괜찮아. 안 죽어.”
그는 절대로 멈출 생각이 없었다. 시작했으니 끝을 봐야 했다. 몇 번이고 절정에 다다라도 재이가 고팠다. 완강한 그의 말에 재이는 체념한 채 자신을 무력하게 만드는 감각에 빠져 갔다.
그와 빈틈도 없이 밀착한 이 순간이 너무 좋았다. 완벽히 자신이 원하던 결합이었다. 그의 몸이 자신과 붙어 있을 때, 재이는 완성감을 느꼈다.
어깨에서 그의 숨이 느껴졌다. 그 따뜻함과 조금 갈라지는 듯한 허스키한 소리. 점점 날이 서는 감각에 오감이 새로이 느껴졌다.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는 느낌이었다. 재이는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젖혔다. 재이의 반응이 조금 달라진 걸 느낀 그가 재이를 꽉 끌어안았다.
원 없이, 꾹꾹 숨겨 놓은 자신의 마음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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